오늘은 시카고대학 석좌교수 브루스 커밍스가 40년째 집필중인 “한국전쟁의 기원” 을 통하여 과거 100년간 청산하지 못했던 민족의 쓰레기들을 소개한다.
개인적인 시각이 아닌 미국인들이 한국이라는 식민지를 지배하기 위해 미 국립문서보관소에 보관된 한국의 지난 100년간 극비문서를 분석하여 브루스 커밍스가 70년대 초부터 연구를 시작하여 1981년 “한국전쟁의 기원” 역사서를 가을경에 출판하였다.
내용이 얼마나 충격적인지 당시 국외 역사학계는 물론 국내 전두환 군사정권은 금서로 규정하였다.
그럴 가능성은 전혀 없지만 국내학자가 저술 하였다면 간첩죄로 감옥이나 사형 당했을 거라고 브루스 커밍스 교수는 증언을 했다.
국내에 원전이나 해적 번역본이 출간되었을 때 군사정권의 눈치를 보느라 제대로 번역이 안 되고 왜곡이 심하여 저자인 커밍스교수는 3페이지를 읽고 벽에 던졌다고 한다.
미국정부가 중국내전과 한국전쟁에서 죽을 쑨 후 동아시아를 원활히 통치하기 위해 북한까지 방문하고 미국인이 연구하여 쓴 도서지만 중국이나 구소련 공산권 자료나 시각이 전혀 반영되지 않아 주류 사학자들의 비판을 받았다.
제 2권이 소련의 몰락 후 90년대 초에 출판되었고 5년 후에 개정완역판이 출간된다고 한다.
미국 측 시각으로만 한국전쟁을 분석한다면 주관적이지 못하여 중국인 쑹홍빙이 저술한 “화폐전쟁”을 대입하여 객관적으로 알아보자.
이제 과거로 충격적인 역사 여행을 떠난다.
우리가 알고 있는 한국전쟁은 세계2차 대전이 끝나고 단순히 극동의 한반도에서 공산주의와 민주주의간의 대립은 전혀 아니다.
해방 후 사상적 대립은 우연히 발생한 것이 아니라 조선말기의 관료주의나 양반지주계급의 극심한 부패에서 비롯된다.
조선의 권력층은 일제식민지 시절 기득권을 유지하기위해 혈서와 창씨개명을 하고 군관학교나 순사로 활동하면서 국내외 독립운동을 토벌하고 일부 지식인들은 신문사나 학교를 설립하여 10만 강제징용 200만 광산 철도노동자 열도이주 수만의 꽃다운 처녀들의 위안부 징집 등 총독부에 적극 협조한다.
이제 브루스 커밍스 교수가 연구한 “한국전쟁의 기원”에 대해 그의 주장을 들어보자!
한국전쟁의 원인은 1930년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특히 소련과 미국은 각각 군 출신(독립군과일본군)들을 지원했다.
당시 김일성은 만주에서 독립군 게릴라로 일본군과 싸웠다.
그리고 일본군은 김일성을 잡으려 애썼고, 그들 중 한 명이 김석원(주:일본 육사를 졸업하고 일본 육군장교로 복무했다. 육군대좌로 광복을 맞았고, 56년 육군 소장으로 예편했다.
사학재단연합회 이사를 맡기도 했고, 충무 무공훈장, 국민훈장 모란장을 받았다)이었다.
45년 해방 이후, 소련은 만주독립군 김일성을 지원했고, 미국은 김석원과 같은 이들을 지원했다. 미국은 일본군에 있었던 한국군 장교들을 등용했다. 이들 중에는 박정희, 김재규 등도 포함돼 있다. 미국은 한국의 권력기구에 일본군 출신들을 기용하는데 큰 책임이 있다.
그리고 48년 미CIA 입김으로 하지장군이 불러들인 미국에서 35년 거주한 70세의 이승만이 한국에 들어왔을 때, 이승만은 북한에서 내려온 일본군 출신 한국인 장교들을 군 장성으로 기용했다. 이들 중 한명이 김석원이다.
그리고 미국은 48~50년에 500명의 미군 장교들로 이뤄진 자문단을 구성했다. 이 자문단은 김석원과 같은 (일본군 출신들에게) 38선 방어를 책임지게 했다.
이 점에서 소련과 미국이 30년대 일본강점기에서부터 부딪친 양쪽을 각각 지원한 것은 외국이 (한 나라에) 개입한 경우로는 최악이다. (그렇지 않았다면) 한국은 통일됐을 것이다. 김일성은 한국군의 한 부분을 차지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일본군과 싸웠기 때문이다. 김석원은 일본 제국주의 아래에서 가장 심한 부역자 중 한 사람이었다.
그는 군이 아니라, 벌을 받았어야 했다. 그러나 소련은 북쪽에서 김일성을 지지했고, 미국은 남쪽에서 김석원(과 같은 인물들)을 지지했다. 이는 한국으로선 최악이었다. 49~50년 한국 상황에서 이는 거의 피할 수 없었다.
“미국인들 중 미국이 한국을 점령하고 미군정을 실시했다는 것을 아는 이는 별로 없다. 미국인들은 (미국의) 독일과 일본 점령만 알 뿐이다. 미국인들은 한국에 대해 잘 모른다. 그들은 전쟁이 1950년에 일어났다고 생각한다. 내가 강조하고 싶은 것은 미국이 이승만과 같은 애국자들이 남한 정부를 수립하도록 하는데 큰 역할을 했는데, 이들 중 많은 사람들이 일본에 봉사한 이들이다.
일제 식민지 시대의 본질이지만, 그건 매우 현명하지 못한 처사였다. 이런 배경들이 전쟁을 야기하는 상황을 만들었다. 미 군정은 좌익, 노동조합, 인민위원회, 여성조직 등을 탄압했고, 나중에 이는 제주 항쟁과 여수 항쟁으로 집약됐다. 이는 한국에서 일어난 일들에 대해 미국이 깊은 책임을 갖게 되는 또 다른 예다.
남북한에 외세가 개입했다는 건 한국전쟁의 핵심 원인 중 하나다. 전쟁이 일어났을 때 미국과 소련의 역할은 더 중요했다. 나는 미국인이어서 전쟁의 이런 측면을 더 강조할 수 있다. 뭔가하면, 미국인들은 한국전쟁이 공산주의자들에 의해 1950년 6월25일 발발한 것으로 생각하는 이들이 많다. ‘미국은 아무 일도 하지 않았는데 말이다. 그리고 우리는 용기 있게 남한을 방어했다. 그리고 한국에서 (미국이) 한 일은 모두 다 올바른 것이었다’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내가 지금까지 35년동안 학생들을 가르치고 책을 출판하면서 한국전쟁의 그 복잡한 기원을 설명하느라고 애쓴 이유다.”
북한은 종종 한반도 분단과 전쟁을 일으킨 장본인으로 일본을 고발한다. 오랫동안 나는 그걸 이해하지 못했다. 일본은 (강점기 한국인) 분열책을 썼고, 이는 45년부터 50년까지(해방 이후)의 혼란을 야기하게 했다.
한국전쟁에 대한 온전한 역사를 안다면, 한국전쟁 또한 내전으로 바라볼 것이다. 일본은 일제강점기동안 분열책을 썼다. 한쪽은 김일성, 다른 한 쪽은 김석원 같은 이들로 나눠. 그때 미국과 소련이 진주했다. 나는 아직도 한국전쟁의 적절한 정의는 ‘국제적 세력이 개입된 내전’으로 본다. 만일 내전이 아니라면, 북한은 소련이 붕괴됐을 때 같이 붕괴했을 것이다.
또 북한이 베를린 장벽 붕괴 이후 20년동안 지속됐다는 건 북한이 자신들의 방향이 옳다고 믿고, 자신들을 지키고 있다는 것을 뜻한다. 만일 북한이 소련의 꼭두각시이고, 스탈린이 버튼을 눌러 김일성이 (남한을) 공격하게끔 시켰다면, 북한은 유럽에서 공산주의가 붕괴됐을 때 같이 사라졌을 것이다.
다른 말로, 북한의 영속은, 나같은 학자들에게는 북한이 소련의 꼭두각시라기보다는 근본적으로 민족주의 체제라는 것을 뜻한다. 북한의 영속성에 의해 이는 증명되고 있다. 오는 6월이면 60년이 된다, 60년. 그것(이렇게 분단된 상태가 오래되고 있는 것)이 한국전쟁의 비극이다. 그러나 영속성은 한국전쟁의 기본적인 속성이 내전이기 때문이다.
“한국의 분단은 아마 미국이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을 투여한 이후 24시간만에 일어난 최악의 결정이었다. 가장 강경한 외교정책가였던 존 맥콜리는 (국무부의) 딘 러스크 등에게 한반도를 나눌 위치를 찾으라고 지시했다. 나는 러스크가 나중에 이와 관련한 증언을 하는 것을 들었다. 러스크는 미국이 서울을 차지하기를 원했다.
서울은 프랑스의 파리, 일본의 도쿄처럼 모든 것이 집중된 거대 도시다. 1945년에도 그랬다. 미국 지역에 서울을 포함시킨다는 건 미국으로선 매우 중요한 정치적 결정이다. 우리는 서울을 원했고, 그래서 38선을 선택했다. 지리학자를 제외하곤 한국인들이 이전에는 전혀 몰랐던 그 선이 영원하게 된 것이다.
미국과 소련 양쪽이 38선을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비록 소련은 어떤 공공문서로도 38선을 받아들였다는 것을 남기지 않았지만. 그들은 38선 이남으로 내려가지 않음으로 해서 묵시적으로 38선을 수락했다. 그러나 소련이 한국을 분단하는 것을 직접 저지르진 않은 것이다. 그래서 38선은 미국의 결정이었다.
맥콜리와 러스크는 한국인 어느 누구와도 이를 상의하지 않았고, 동맹국들, 영국, 프랑스, 소련과도 상의하지 않았다. 매우 사려깊지 않은 결정이었다. 그 파급효과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오늘날 한 한국인 작가는 (38선을) 역사의 장애물로 묘사했다. 38선은 동북아시아와 한국사의 거대한 장애물이다. 대부분 미국인들은 이를 모른다. (38선의 획정은) 한-미 관계 비극 중 하나다.”
김일성의 목표 중 하나는 남한을 점령해서 김석원과 같은 사람을 붙잡아 그들의 목을 비틀고 그들이 30년대에 저지른 것을 추궁하려 했다는 것이다. 김석원이 김일성의 첫번째 아내 김혜순을 살해했다는 루머가 있다. 나는 김혜순이 그의 첫번째 아내인지, 그리고 이게 사실인지 모른다. 그러나 김일성과 김석원 사이에 누군가의 죽음이 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나는 김대중 대통령의 (한국전쟁에 대한) 주장이 옳았다고 본다. 김대중은 ‘김일성이 50년대에 한반도를 통일시키려고 했다’고 말했다. 김일성은 먼저 한국, 그 다음 일본 식의 세계 공산화 전략을 추구한 게 아니었다.”
“적법성은 한국전쟁과는 거의 관련이 없다. 해리 트루만은 미국 헌법을 따르지 않았다. 미 헌법은 전쟁을 선언할 때 의회의 비준을 받을 것을 요구한다. 그는 의회 대신 유엔으로 갔다. 그리고 전쟁선언 없이 지구 건너편으로 50만명의 미군을 보낸 첫번째 대통령이다. 린든 존슨 대통령도 베트남전에서 그렇게 했다. 조지 H.W.부시, 조지 부시도 이라크전에서 그렇게 했다. 4번의 주요한 전쟁에서 미국은 전쟁선언 없이 전쟁을 시작했다. 미국 헌법에 따르면, 모두 불법이다. 53년 한국전쟁이 끝났을 때, 아이오와주 법원은 한국에서 전쟁이 일어나지 않았다는 판결을 내렸다. (하하하) 그건 경찰 출동이었으니까, 전쟁으로 불릴 수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합법성이란 한국전쟁에선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다.
나는 아직도 김대중과 노무현 10년이 통일을 위한 큰 진전을 만들었다고 생각한다. 기본은 화해였다. 즉각적인 통일이 아니라. 만일 남북한 사이에 화해가 없다면 통일로 조금도 나아갈 수 없다. 남한 사람들이 북한 사람들을 공산주의자, 적으로 보기보다 오랫동안 잃어버린 친적으로 보기 시작했다는 건 매우 긍정적인 일이다.
‘진실과화해위원회’가 한국전쟁을 조사했는데, 매우 훌륭한 아이디어라고 생각한다. 새로운 문서에 기반한 역사의 재건, 진상규명, 그리고 희생자들과 가해자들에 대한 이해 등이 통일을 위한 배경이 된다. 최근 ‘진실과화해위원회’의 조사결과를 보면, 전쟁기간 동안 남한에서 일어난 민간인 학살이 50년 6월부터 51년 중반까지 전쟁 첫해에 일어났고, 남한 당국이 6~7건에 관여돼 있다. 또 공산주의자들과 좌익의 학살행위도 한 번 있다. 6 대 1의 비율이다.
이제 “화폐전쟁”의 저자 쑹홍빙의 한국전쟁의 주장은 무엇인지 알아보자.
내용이 길어져서 간단히 말하겠다.
미제는 세계2차 대전 종전 이후 폭발적으로 증가한 군수산업의 영향으로 극심한 경제적 압박을 겪게 된다.
중국내전에 미국은 장개석 국민당 정부에 미군 병력 40만과 국민당 정부병력 39개 사단을 완전무장할 수 있는 30억 달러(요즘 시세3000억달러?)를 지원하지만 부패와 무능으로 실패하였다.
장개석 이놈도 일본군에 부역한 김석원이나 박정희와 같은 부류인간이다.
중국내전에서 아무런 소득도 얻지 못한 미국이 엄청난 재고량에 시달리는 군수산업체의 로비로 한국전쟁을 기획하여 세계패권과 경제적 이득을 얻는다.
결국 민주주의나 사상과는 관련이 없이 오로지 돈 때문에 미국은 전쟁을 일으켜 200만 명의 한국인을 학살하는 만행을 저지른 것이다.
결론은 일제 시대부터 부역자 집단인 매국노들이 해방이후 한민당(지금은 왜나라당)을 조직하여 오늘날까지 통일을 방해하고 나라를 팔아먹고 전쟁을 일으킨 민족의 원수인 미국을 개처럼 따르며 국민을 노예처럼 부리고 있다.
독립군의 손자는 입국을 불허해서 외국에서 유리걸식하고 독립군을 토벌하던 매국노들은 국가유공자로 위장하여 국립묘지에 묻혀 있고 후손들은 축제한 부동산을 소유하고 연금을 타먹으며 호위호식 하고 있다.
나는 단지 노예가 아닌 이 땅의 주인으로 살고 싶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