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번호 521121 | 2009.01.21 IP 118.223.***.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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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인의 종말

 

경제인의 종말-피커드러커(요약)

 

자본주의와 사회주의의 이념과 질서는 모두 실패했다

 

자본주의는 폐쇄적이고도 뚜렷하게 구분된 계급들 사이에 불가피하게 계급 갈등을 초래하기 때문에 거짓 하느님이라는 것이 증명되었다. 사회주의도 그런 계급들을 철폐할 능력이 없다는 것을 보여주었기 때문에 허구라는 것이 증명되었다.

 

 자본주의 체제 하에서 현실적으로 존재하는 계급사회는 자본주의적 이념과는 양립할 수 없으므로 자본주의는 그 의미가 없어진다. 반면 마르크스의 계급투쟁은 비록 그것이 현실을 있는 그대로 인식하고 있고 또 설명하고는 있지만, 사회를 어디로 이끌고 가는지 알 수 없으므로 아무런 의미가 없다. 결과적으로 자본주의와 사회주의의 이념 및 질서는 모두 실패했다. 그 이유는 개개인이 경제적 자유를 실천하면 자유와 평등이 자동으로 도래하게 된다는 개념이 틀렸기 때문이다.

 

경제인 개념

 

그런 실패는 경제 영역에 가장 직접적으로 영향을 끼쳤다. 그것은 정치 영역에서도 모든 제도를 무의미하게 만들었거나 아니면 적어도 의문을 제기하도록 했다.

 

그러나 그것이 끼친 가장 심각한 영향은 모든 사회가 성립될 때 기초로 삼았던 근본적인 개념을 뒤흔든 것이었다. 즉 인간은 고유한 본성을 가지고 있고, 사회에서 자신만의 역할과 위치를 갖고 있다는 개념이 그것이다. 개인의 경제적 자유는 자동적으로 또는 변증법적으로 평등과 연결되지 못한다는 것이 증명되자, 그것은 자본주의와 사회주의가 근거로 삼은 인간의 본성에 대한 개념, 즉 경제인(economic man)의 개념을 무너뜨리고 말았다.

 

인간을 경제적 동물(economic animal)로 보는 개념은 부르주아 자본주의와 마르크스 사회주의의 진정한 상징이다. 왜냐하면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모두 인간의 자유로운 경제활동을 인간 존재의 목적을 달성하는 수단으로 보기 때문이다. 경제인은 경제적 만족만이 사회적으로 중요하고 또 의미가 있는 것으로 간주한다.

 

경제인은 경제적 지위, 경제적 특권, 그리고 경제적 권리를 획득하기 위해 노력한다. 그것들을 위해 인간은 전쟁을 하고, 심지어 죽을 각오도 하는 것이다. 다른 모든 것들은 단지 위선적이고, 속물적이며, 또는 낭만적이지만 무의미한 것으로 취급된다.

 

경제학의 흥망 : 헨리 포드는 고전 경제학의 법칙을 깨트렸다

 

사회 성립의 기초로서 경제인의 개념이 등장했다는 것을 알려주는 분명한 징후가 바로 독립적 과학으로서 경제학이 등장한 것이었다. 경제인의 개념이 인간의 진정한 본성을 대변하는 것으로 인정되자마자 경제학이라는 과학이 즉각 발전 가능한 것이 되었을 뿐 아니라 필요하고도 불가결한 것이 되었다.

 

그러나 헨리 포드가 독점은 생산을 축소하고 가격을 올린다는 경제법칙을 깨끗이 무시하고 보다 싼 가격으로 훨씬 더 많은 생산을 함으로써 독점을 하기 시작했을 때 고전 경제학의 과학적 체계는 붕괴하고 말았다.

 

오늘날 대부분의 국가들이 훈련받은 경제학자에게 국가 운영을 맡기고 있다. 경제학을 전공한 사람들이 기업의 경영자로서, 정치 지도자로서, 강사로서, 그리고 매스컴의 해설자로서 등장함에 따라 경제 전문가에 대한 수요가 폭증하고 있다.

 

 그러나 이는 단지 겉으로 드러난 현상일 뿐 진실과는 거리가 멀다. 우리는 경제인 사회를 구제하기 위해 최후의 절망적인 노력의 일환으로 경제학자를 국가의 고위직에 배치했는데, 그것은 마치 18세기에 이성주의자로서 계몽되었고, 누구보다도 더 많은 훈련을 받은 학자인 계몽 철학자들에게 위기에 빠진 국가의 왕좌에 앉혔던 것과 똑같다. 그런데 18세기의 철학자-이 그랬던 것처럼 20세기의 경제학자-총리도 역시 실패했다.

 

 전문가로서 경제학자들이 권력을 소유한 듯이 보이는데도 불구하고, 비록 그들 사이에도 의견의 일치를 보기 어렵지만 현실의 사태는 모든 경제학자들이 불가능하다고 선언한 경로를 따라 발전해 갔다. 이런 것을 보면 과학으로서 경제학의 가르침이 사회의 현실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한다는 것을 대변해 줄 뿐이다.

 

경제보다 더 중요한 사회적 평등

 

경제학이 사회의 현실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한 것은 경제학자의 지식수준이 낮아졌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낮아진 것은 경제 영역의 주권과 자율성이 바람직한 것인가, 그리고 필요한 것인가에 대한 신뢰이다. 신뢰가 사라지자 현실도 따라서 사라졌다. 대중은 자유로운 경제활동이 자유평등 사회로 이끌지도 않을 것이고 또한 만들 수도 없다는 것을 인식했다.

 

그러므로 대중은 경제행위를 사회적으로 바람직한 대표적 행위로 간주하기를 거부한다. 대중은 경제 제도들이 경제적 목적에만 봉사하기 때문에 그것들을 수용하기를 거부하고, 그것들이 제공하는 만족 역시 오직 경제적 만족뿐이기 때문에 거부한다. 경제 전문가의 관점에서 보면 이런 모든 것들은 도대체 있을 수 없는 일일 뿐이다.

 

경제 전문가는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는지 설명할 수가 없다.

 

경제법칙은 인위적인 규칙이 아니라 수확체감의 법칙과 같이 물리학과 지질학의 영역에서 끌어온 진정한 자연법칙과 같은 것이므로, 경제법칙을 위반함에 따라 받게 되는 경제적 벌은 매우 심각한 것이 될 수도 있다. 그런데도 대중은 기꺼이 벌을 받을 용의를 갖고 있다.

 

 그런 벌을 받게 된다는 위협마저도 유럽의 대중을 말리지 못하는 것은 그들이 경제법칙을 위반하고서라도 획득하기를 바라는 목표가 그들에게는 경제적 목표보다 한층 더 중요하다는 것을 증명해주고 있는 것이다. 대중이 보기에 경제는 더 이상 다른 모든 영역들이 종속되어야 할 자율적이고 독자적인 영역이 아닌 것이다.

 

마르크스주의마저도 자유평등 사회를 실현시킬 수 없다는 것이 증명되자마자 경제인의 개념에 기초를 둔 사회가 붕괴한다는 것 역시 기정사실이 되었다. 경제 영역의 우월성과 사회의 진정한 목적으로서 자유와 평등에 관한 신념을 융합시킬 수 있는 수단으로는 마르크스주의보다 더 나은 것이 없다. 그리고 경제인 개념 그 자체와 경제인 개념에 기초하여 성립된 사회를 합리화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과 근거는 자유와 평등을 실현한다는 약속뿐이다.

 

마르크스주의의 체계의 엄밀성과 취약성

 

마르크스주의는 개인의 자유를 계급의 이익에 종속시킨 결과로 엄청난 종교적 힘을 확보했다. 마르크스주의는 그런 교의에다 그것의 불가피성, 궁극적 성공의 확실성, 그리고 황홀한 지적 합목적성을 부여했다. 개인의 자유를 계급의 이익에 종속시키지 않고서는, 지금까지의 사회가 항상 계급투쟁 사회였기 때문에 계급 없는 사회가 도래한다는 것, 혹은 최상의 불평등이 진정한 평등을 이룩한다는 것을 믿도록 요구하는 것은 터무니없는 것으로 보였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이성의 힘에 의해 인간이 우주를 이해하고 자신의 상황을 개선할 수 있다고 생각한) 이성의 시대에서만 그런 것이 아니다. 그러나 마르크스주의는 개인의 자유를 계급의 이익에 종속시킨 결과, 독단적이고도 경직된 본질을 형성하게 되었다.

 

 그 결과 마르크스주위의 지적 체계가 너무나 엄밀하게 되어서, 마르크스주의는 마치 하나의 돌만 건드리면 집 전체가 무너질 그런 위험에 처해 있다. 목적으로서 또는 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약속으로서 자유의 포기 없이는 마르크스주의에 변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이것이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믿음이 극단적으로 취약하다는 점을 설명해주고, 자유롭고 평등한 사회의 실현이라는 목적 달성이 실제로 가능한가 하는 의문이 처음으로 제기되자마자 마르크스주의가 빠른 속도로 해체되었던 이유를 설명해준다.

 

악마의 추방

 

애처로운 노력

 

전쟁과 대공황이라는 새로운 악마들을 추방하는 것은 유럽 사회의 최고 목표가 되었다. 그것들을 추방하기 위해 유럽 사회가 취한 최초의 조치는 자본주의 및 사회주의 원칙에 기초한 전통 노선을 따라 더욱더 사회를 발전시키고 또 개선하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제1차 세계대전 후로부터 독일에서 나치즘이 등장하기 전까지 서구의 역사는, 그리고 뮌헨 회담 이전까지 서구의 민주주의는 사회와 개인이 이성과 정신적인 건강을 회복하려는 애석하지만 헛된, 비통한 시도였다.

 

대중의 심리 변화 : 전쟁과 대공황을 막을 수 있으면 자유와 평등도 포기할 수 있다

 

마치 공황이 경제 성장의 결과로 초래되는 것과 같이, 바로 그 전제(경제 성장) 때문에 불가피하게 발생하는 결과(공황)를 제거함으로써 사회를 유지하려는 시도는 본질적으로 모순일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유럽 전역이 점진적으로 인식했다.

 

특히 프랑스에서 인민전선의 실험이 실패로 끝나자 이에 대한 인식은 보편화되었다. 그 이후 대중은 의식적으로 또는 무의식적으로 전통적 사회를 포기하든지 아니면 악마를 퇴치할 시도를 포기하든지, 둘 중 하나를 선택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대공황의 직접적인 희생자들 가운데, 예컨대 1932년경 독일에서 뚜렷이 나타난 것으로 경기회복은 전혀 바람직한 것이 아니며, 차라리 사회체제 자체가 몽땅 붕괴해 버리는 것이 낫다는 모호한 감정은 국제 관계에 있어 처칠의 외교정책을 경제 분야에 그대로 옮겨놓은 것이다. 그리고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평화를 유지해야 한다는 유화론은 경제적 대가와 결과가 어떻든지 간에 다음의 공황에서는 실업을 무조건 막아야 한다는 확신과 궤를 같이 한다.

 

마치 유화론자인 체임벌린이 강경론자인 처칠을 압도했듯이, 심지어 다른 것 모두를 포기하는 대가를 치른다 해도 경제적 악마만큼은 반드시 퇴치해야 한다는 견해는 경제 분야에서 득세를 하고 있다. 대중은 악마의 세력이 지배하는 세계에서는 살 수가 없다.

 

그 결과 유럽 어디서나 경제인 사회에 대한 믿음과 신조는 단 한 가지 기준, 즉 그것이 악마를 불러들인다고 위협하는가 아니면 악마를 회피하고 또 퇴치한다고 약속하는가에 따라 심판을 받게 되었다. 악마를 퇴치해야 한다는 무엇보다 중요한 최고의 목적을 위해서라면 다른 모든 것을 양보하겠다는 이런 새로운 풍조는 경제 발전을 바람직한 것으로 받아들였던 대중의 태도를 완전히 바꾸어 놓았다.

 

 

강요된 민주주의와 획득한 민주주의

 

이탈리아와 독일의 공통성 : 국가 통일이 민주주의보다 더 중요했다

 

무엇이 이탈리아와 독일에서 민주주의를 붕괴시켰는가 하는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서는 먼저 이 두 나라만 공통적으로 갖고 있는 사회적·정치적 특성들 가운데 유럽의 다른 나라들은 갖고 있지 않은 것이 무엇인지를 확인해야만 한다. 그런 공통의 특성이 오직 한 가지가 있다. 그러나 그것은 다양한 방법으로 설명될 수 있다.

 

어떤 사람은 이 두 나라에서 부르주아 질서가 아래로부터의 혁명에 의해서가 아니라 위로부터 강요된 것이라고 주장할 수 있을 것이다. 다른 사람은 이 두 나라가 민주주의적 제도를 보유했고 또 수많은 부르주아와 프롤레타리아가 존재했지만, 이들 두 계급은 정치의 실권을 장악한 적이 없다고 주장할지도 모른다.

 

심지어 독일에서는 정치학 교수들, 그리고 이탈리아에서는 정치 법학자들이 내각에 참여하기는 했지만 사회적으로 별 영향력이 없는 무력한 존재였다는 사실이 지적되기도 했다. 마지막으로 이탈리아, 독일, 그리고 구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서부 지역은 유럽 민주주의의 동쪽 변방을 형성하는 것으로 간주할 수 있다고 말할는지도 모른다.

 

다시 말해 민주주의 제도가 한 번도 안정적으로 정착한 적이 없는 일종의 군사적 변방이란 말이다.

 

이 세 가지 각각 다른 주장들은 다음 한 가지 측면에서 공통점이 있다. 이탈리아와 독일 사람들이 19세기에 경험한 것 가운데, 정서적으로 그리고 감상적으로 대중을 한데 묶어준 가장 큰 사건은 부르주아 질서의 승리가 아니라 국가 통일이었다는 점이다. 이 두 나라에 있어 혁명은 국가가 일차적 목적이었고, 민주주의는 부차적이었다. 전쟁은 국가 통일을 위해 치른 것이었고, 전장에서 흘린 피도 국가 통일을 위한 것이었다.

 

부르주아 질서는 일차적으로 국가 통일을 위한 수단으로서만 수용되었다. 부르주아 질서의 신조와 구호는 결코 국민감정을 일깨우지 못했다. 부르주아 질서의 신조 그리고 구호의 위력은 그것들이 제시한 사회적 약속과 실체 때문이었다. 그것들은 대중의 마음속에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정서적·감상적 실체가 아니었다. 따라서 실체가 타당하지 않은 것으로 인식되자마자 부르주아 질서의 신조와 구호는 곧 존재 가치를 한꺼번에 상실했다.

 

다른 한편으로, 두 나라를 제외한 유럽의 나라들, 예컨대 영국, 프랑스, 네덜란드, 그리고 스칸디나비아 국가들의 경우 민주주의를 위한 투쟁은 사람들의 마음속에 생생한 경험과 전통으로 살아 있었다. 이들 나라에게 국가 통일은 훨씬 이전에 이루어졌기 때문에 민주주의 신조가 그 자체로써 정서적 가치를 갖고 있었던 것이다.

 

서부 유럽 국가로서 벨기에는 국가 통일과 독립 달성을 19세기에 이룩한 가장 큰 성취로 생각하고 자국의 전통과 국민감정에서 첫 번째로 중요하게 생각하는 유일한 국가이다. 그리고 벨기에는 렉시스트당을 통해 서구에서 처음으로 가장 심각한 파시즘 운동을 전개했다.

 

 

산업사회의 비경제적 운영 혹은 파시즘이 목표로 하는 비경제인 사회

 

긴급한 과제

 

이탈리아와 독일의 전체주의에서 가장 근본적인 특성은 비록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지만, 산업사회에 사는 개개인의 계급, 역할, 그리고 지위의 기초가 되는 경제적 만족, 보상, 그리고 가치를 비경제적 만족, 비경제적 보상, 그리고 비경제적 가치로 대체하려는 시도이다.

 

비경제적 산업사회는 파시즘이 추구하는 사회적 기적들 가운데 하나로서 그것은 산업사회의 속성인 대량생산 방식의 유지, 다시 말해 경제적으로 불평등할 수밖에 없는 생산 방식의 유지를 가능하게 해주고 또 의미 있는 것으로 만들어준다.

 

이것은 동시에 가장 긴급하게 달성해야 할 과제인데, 적어도 독일에서는 그렇다. 독일에서 자본주의 생산 방식을 1932년까지 그대로 유지하는 것은 확실히 불가능했다. 자본주의 생산 방식을 다른 어떤 방식으로 대체하는 것도 마찬가지로 불가능했다. 독일 사람들 절대 다수는 비록 제1차 세계대전 후 사회주의에 대해 신뢰를 잃어버렸지만, 자본주의 생산 방식에 대해서도 절망했었다.

 

그들은 자본주의 체제로 복귀하는 것도, 그렇다고 해서 사회주의 혁명도 원하지 않았다. 절망에 빠진 그들이 기대할 수 있는 것은 거의 혼동뿐이었다. 1934년 이후 독일과 마찬가지로 이탈리아도 산업사회의 기초가 되는 경제사회의 기초로서는 배제하면서도 동시에 산업사회의 형태와 생산 방식은 그대로 유지하는 하나의 해결책을 마련해야만 했다.

 

전체주의는 자본주의인가 혹은 사회주의인가

 

전체주의가 자본주의인가 아니면 사회주의인가 하는 질문 그 자체가 잘못된 질문이다. 물론 그것은 어느 쪽도 아니다. 파시즘은 어느 쪽도 타당하지 않은 것으로 단정하고 사회주의와 자본주의를 초월하는, 즉 경제적 가치에 기초하지 않는 사회를 추구한다. 파시즘이 경제에 대해 갖는 유일한 관심은 산업사회의 생산 수단을 원활한 상태로 유지하는 것뿐이다. 누가 그 비용을 부담하는가, 혹은 누가 이익을 보는가 하는 것은 부차적인 질문이다.

 

왜냐하면 경제적 결과는 주요 사회적 과제를 수행하는 과정에 전적으로 부수적으로 발생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파시즘이) 사회주의뿐만 아니라 사적 이익이라는 자본주의의 지상과제에 대해서도 동시에 적대시하는 이 명백한 모순이, 비록 엉터리이긴 하지만 파시즘의 본질적 의도를 일관성 있게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파시즘과 나치즘은 사회적 혁명이지만, 그렇다고 사회주의는 아니다. 그것들은 산업사회 생산 방식을 유지하긴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자본주의도 아니다.

 

노동자계급에게 과시적 소비 수단을 제공하다

 

이런 방향으로 나아가는 최초의 단계는, 사회적으로 전혀 혜택을 받지 못하는 최하층 계급의 사람들에게 경제적 특권층만이 누리던 비경제적 특혜를 제공하는 것이었다. 그런 시도들은 주로 파시스트 조직을 통해 노동자들의 여가 시간을 조직적으로 활용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이탈리아에서는 일과 후(Dopo Labor)라는 구호로, 독일에서는 즐거움에서 비롯된 힘(Kraft durch Freude)이라는 구호로 추진되었다.

 

물론 이런 강제적 조직 활동은 일차적으로 잠재적인 위험 계층과 적대 계층을 정치적으로 통제하기 위한 수단으로 고안되었다. 파시스트 조직은 경제적 부와 특권을 누리는 유한계급의 전형적인 비경제적 과시적 소비 기회를 노동자계급에게 제공했던 것이다. 노동자계급이 누리는 이런 만족은 그 자체로써는 경제적 가치가 전혀 없는 것이지만, 그것들은 사회적 지위를 표현하는 강력한 상징이었다. 그것들은 사회적 평등의 수단으로서, 즉 계속되는 경제적 불평등을 보상하려는 의도에서 제공되었다.

 

 

전쟁과 평화

 

군국주의에서 전쟁이 차지하는 역할

 

군국주의에 기초한 비경제인 사회는 실업이라는 악마를 퇴치하는 데 성공하고 있다. 그러나 군국주의에 기초한 비경제인 사회는 현대의 또 다른 악마의 위협인 전쟁을 합리적인 것이고 또 의미 있는 것으로 보이도록 만들 수 있어야 할 뿐만 아니라 전쟁을 명백히 바람직한 것으로 만들 수 있는 경우에만 그 자체가 성공적이고 또한 타당성이 있다고 증명될 수 있다.

 

 만약 전쟁 그 자체가 목적으로 수용되면 마치 부르주아 민주주의와 마르크스 사회주의가 경제 발전 그 자체를 목적으로 삼는 것처럼 파시스트 국가의 과제는 완성된다. 계급투쟁이나 경제적 불평등도 비경제인 사회에서는 중요하지 않아야만 한다. 그렇지 않으면 전체주의의 기적은 일어나지 않는다.

 

전체주의가 시종일관 주장하는 새로운 사회관은 만약 전쟁을 합법적으로, 그리고 최고의 목적으로 수용하지 않으면 신기루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전쟁 중 개인의 역할과 위치는 요컨대 개인이 사회에서 수행할 역할과 차지할 위치를 결정하는 근거를 제공해야만 한다. 히틀러와 무솔리니의 사회적·정치적 이념체계 전체는 당연히 영웅적 인간을 인간의 진정한 본성으로 삼고서 형성되었다.

 

희생의 승화 : 영웅적 인간의 등장

 

파시즘의 영웅적 인간의 중심 이론은 개인의 희생을 스스로 정당화하는 것이다. 이것은 인간에 대한 가장 오래된, 그리고 가장 깊이 뿌리내린 주술적 개념으로서 악마적 세력을 달래려 하거나 혹은 퇴치하는 데 항상 사용되어 왔었다.

 

 이 개념은 제1차 세계대전 후 이탈리아와 독일 모두에서 전후 세대의 젊은이들 사이에 널리 퍼진 것이다. 1차 세계대전이 그 불합리성과 어리석음을 드러내고 나자 국가의 가장 우수한 자식들을 끔찍하게 죽이고 또한 절멸시킨 것이 참으로 의미 없는 짓이고 헛된 일이라고 선언하는 것은 참을 수 없었다.

 

그들의 희생은 그것 스스로 정당화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의미 없는 산 제물의 희생을 마법의 공물로 승화시키는 것을 통해서만 바로 그런 비합리적인 전쟁의 요소들이 다시 합리화되는 것이다. 기계화된 전쟁 속의 고독한 개인,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개인의 희생, 그리고 맹목적인 운명의 장난 등은 마치 그것들 자체가 목적인 것처럼, 개인 희생의 자기 정당화를 통해 출현한다.

 

영웅적 인간의 개념

 

전체주의가 이런 식으로 희생을 찬양하는 것을 위선, 자기기만, 혹은 프로파간다 기술로 간주하는 것은 흔하고 우매한 실수이다. 희생은 가장 깊은 절망에서부터 우러나왔다.

 

1880년경 러시아의 허무주의가 당시 러시아의 젊은이들 가운데 가장 고귀한 집안 출신이자 또한 가장 용감한 젊은이들을 사로잡았던 것과 마찬가지로 독일과 이탈리아에서도 그것을 위해서라면 죽기라도 할 만한 진정한 가치도 없고 또 그것을 위해서 살아야만 하는 타당한 신조도 없는 세상과 타협하기를 거부했던 세대는 전후 세대의 모습을 최악으로가 아니라 최상으로 대변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허무주의와 마찬가지로 파시스트들은 희생의 자기 정당화를 종교적 열정과 진정한 확신, 완전한 이타심을 갖고 믿었다. 그러므로 도덕적 관점에서 볼 때 영웅적 인간관은 그것이 개인에게 삶의 목적과 의미를 제공하고 있는 것으로 여겨져 일견 타당한 것으로 보인다.

 

파시즘은 사회를 부정한다

 

그러나 영웅적 인간관은 사회에 대해 목적과 의미를 제공할 수 없다. 왜냐하면 영웅적 인간관은 생을 부정하기 때문이고 희생의 자기 정당화는 사회를 부정할 뿐만 아니라 사회를 파괴하기 때문이다. 무솔리니의 위험하게 살아라라는 슬로건도 개인에게 적용할 때는 괜찮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사회는 계속해서 유지되어야만 하는데, 그것은 또한 안전하게 유지되어야만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만약 개인이 자살을 하는 것으로 만족을 찾고 또한 성취감을 느낀다면, 사회는 전혀 의미를 가질 수 없게 된다. 결국 사회 실존의 유일한 합법적 형태로서 무질서 상태가 등장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바로 이런 내적 모순이 파시스트가 새로운 질서를 창조하려고 하는 시도를 좌절시킨다. 전체주의는 실업이라는 악마를 퇴치할 수 있고, 전쟁의 합리성을 개개인에게 (희생의 자기 정당화를 통해) 복원할 수 있다. 하지만 전체주의가 사회적으로 합리화를 완성하려면 (개인의 희생과 전쟁으로 인해 사회가 파괴되므로) 사회가 비합리적이고 또 의미 없다는 것을 증명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하다. 따라서 전체주의는 그것이 추구하는 기적을 수행할 수가 없다.

 

 

반유대주의의 원인

 

히틀러가 집권한 후 과연 유대인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해 대답을 시도한 수백 종이 넘는 저서들은 모두 핵심을 놓치고 있다. 유대인의 인종적·민족적·종교적 특성에 관한 가장 심원한 분석도 나치 독일에서 반유대주의가 발생해야만 하는 이유를 설명하지 못했다.

 

그것은 유대인들만이 갖고 있는 어떤 특성들과는 관계가 없고, 전적으로 나치즘의 내부에서 발생한 긴장 때문에 필요한 (즉 나치가 바라는) 유대인의 모습과 관련이 있다. 진정한 적은 유대인이 아니라, 유대인이라는 이름으로 박멸해야 하는 부르주아 질서인 것이다.

 

전체주의 파시즘이 목적이 있는 듯 보여질 수 있는, 그리고 파시즘 스스로 존재 이유를 정당화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파시즘이 만들어낸 악마들과의 성전을 치를 때뿐이다. 마찬가지의 논리가 반유대주의에 적용된다.

 

유대인과 비게르만이 박해당하고 또한 억압당하면 당할수록 더 심한 박해와 재산 몰수는 나치 체제의 자기주장과 자기 정당화를 위해 더욱더 필연적인 것으로 보여야만 한다. 유대인에 대한 박해가 건설적인 전체주의 이념의 창출로 이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은 유대인이 진정 악마이기 때문에 박해를 통해 유대인들의 힘이 줄어드는 것이 아니라 증가하는 증거로 간주되어야만 하는 것이다.

 

부르주아 정신을 악마의 화신으로 의인화하는 작업을 독일은 반유대주의를 수단으로 하여 달성한 데 비해, 이탈리아에서는 주로 프리메이슨에 대한 거부 운동으로 달성되었다.

 

그 이유는 이탈리아에서 프리메이슨은 사라지고 없었던 반면 부르주아 정신은 계속되고 있었으므로, 무솔리니는 인종차별 정책을 도입해야만 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평화의 개념은 나치 사회의 타당성을 위협하기 때문에, 나치는 평화라는 개념을 국제적인 로마 가톨릭교회라는 악마의 화신이 만들어낸 것이라고 덮어씌우지 않을 수 없었다.

 

이것은 다음과 같은 빈번한 질문에 대답한다. 독일 사람처럼 다른 인간에 대한 증오가 별로 크지 않은 사람이 어떻게 유대인에 대한 가차 없는 박해에 동참할 수 있었으며, 혹은 이탈리아 사람처럼 라틴 논리에 충만한 사람이 영국의 이든 수상에게 모든 잘못된 사태에 대해 개인적으로 책임을 덮어씌우는 정치적 반대 운동에 동참할 수 있는가 하는 질문 말이다.

 

 

새로운 사회

 

도덕적·사회적으로 우월한 인간이 필요하다

 

만약 서구 그 자체가 파시스트가 되어야만 전쟁에서 이길 수 있다면, 서구는 여전히 전체주의에 패배한 것이 되고 말 것이다. 그 외에도 (과거 전쟁의 역사를 보면) 그런 결정적인 전쟁에서 승리하는 사람은 비록 그가 전장에서는 취약하더라도 항상 도덕적·사회적으로 더 강한 사람이었다.

 

그리고 전체주의와 맞서기 위한 목적으로 서유럽 국가가 전체주의를 채택한다면 서유럽은 전체주의 그 자체를 목적으로 전체주의 파시즘에 집착하는 국가들보다 도덕적·사회적으로 더 취약하다.

 

경제인 개념을 초월한 새로운 인간 모델

 

어느 쪽이든 전체주의가 전쟁에서 승리한다면 유럽은 그 이전의 유럽 질서가 역시 완벽히 붕괴되었던 13세기와 16세기의 전체주의적 시대와 꼭 마찬가지로 장기간의 암흑과 절망의 시기를 참고 견뎌야만 할 것이다. 어쨌든 전체주의는 궁극적으로 (시간이 지나면) 저절로 극복될 것이고, 전체주의적 암흑시대로부터 궁극적으로 자유와 평등에 기초한 새로운 질서가 등장하게 될 것이다.

 

사회에서 자신들이 차지할 역할을 의식적으로 포기하고 자신들의 서재에 은둔했던 13세기 스콜라 철학자들의 체념과 비슷한 그런 체념으로부터 16세기 르네상스의 자유의 개념이 도출되었고, 지적 인간에 기초한 사회가 등장했다. 마찬가지로 (경제인 개념에 기초한) 부르주아 사회의 자유의 개념은 퀘이커파 성도들이 사회에 대해 의식적으로 체념하면서부터 성장한 것이다.

 

오늘날 우리는 동일한 현상을 관찰하고 있다. 또 다시 그것은 궁극적으로 (새로운 질서의) 재상으로 이어지게 할 것이다. 사회에 대해 스스로 체념하면서 경제인 개념의 한계에서 자유롭게 된 개인은 일반 개인들이 자유를 누리게 될 새로운 비경제적·사회적 실체를 창출하게 될 것이다.

 

3의 길 : 사회적 목적을 실현하는 자유평등 사회

 

그러나 이런 전망을 오늘날의 역사가들이 아득한 30년 전쟁(1618~1648)을 대하는 듯 그런 안일한 자세로 구경만 하고 있을 수는 없다. 우리는 다른 대안, 즉 제3의 길을 개발하지 않으면 안 된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기존의 경제인 사회를 토대로 그리고 그것들을 전제로 새로운 자유롭고 평등한 비경제인 사회(a new, free and equal noneconomic society on the foundation and from the premises of our existing economic society)를 개발해야 한다.

 

 만약 우리가 이런 임무를 실천하는 데 성공한다면, 우리는 동쪽(서유럽에서 본 동쪽이므로 독일을 의미함)으로부터의 공격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그 경우 전쟁은 단지 어떤 부정적인 가치에 대해서 싸우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인 가치를 위해 싸우는 것이 될 것이므로, 전쟁은 또 다시 합리적으로 보일 것이고 따라서 서구가 감당할 수 있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승리는 당연히 (적극적인 가치를 가진) 새로운 질서의 주창자에게 넘어갈 것이다.

 

개인의 존엄성과 자유가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그런 강력한 결정적인 힘을 가진 새로운 질서가 우리 (서유럽과 미국) 사회 내부에 숨어 있는지, 그리고 그 힘이 전쟁이라는 끔찍한 시련을 통해 발산될 것인지 우리는 알지 못한다. 그러나 적어도 우리는 그런 힘이 (존재하여 그것이) 발산되는 것을 막지 않는 쪽으로 대응책을 준비할 수는 있을 것이다.

 

서유럽 민주주의국가들은 최소한 현대 전쟁의 경직된 경제통제가 개인의 자유를 철저히 빼앗는 일이 없도록 노력할 수 있을 것이다. 비록 서유럽 민주주의국가들이 자본주의와 사회주의의 타당성과 합리성을 복구하기가 어려운 만큼이나 새로운 질서를 마음대로 창출하기가 어렵겠지만, (서유럽 민주주의국가들은) 개인의 자유에 어떤 의미를 다시 부여하는 방식을 통해, 경제인 사회에서 개인의 존엄성과 안전을 강화할 수는 있을 것이고 또한 강화해야만 한다.

 

공짜 점심은 없다

 

빈곤은 악이다. (그리고 빈곤이 아무리 악이라 해도) 빈곤은 자유와 해방의 완벽한 붕괴에 비하면 훨씬 정도가 덜한 악이다. 사회 정책들은 실제로 그리고 필연적으로 경제 발전을 방해한다.

 

 그러므로 잘못된 사회적 대책 그 자체뿐만 아니라 그런 대책은 경제적으로 유익한 것으로 증명된다는 자기기만은 경제적으로 감내할 수 있는 수준을 초월하여 불필요한 경제적 피해를 초래할 것이다. 방어할 수 있었고 또한 강화할 수 있었던 바로 그 자유가 그것 때문에 위태롭게 되었다.

 

그러나 필수적인 사회 정책들은 경제적으로 어느 정도 해롭다는 것을 인식한다면, 사회 정책들이 제공해줄 사회적 혜택이 그에 부수적인 경제적 희생과 비교하여 어느 정도인지 적절히 측정될 수 있을 것이다.

 

비록 우리가 그런 정책들을 형성하는 데 충분히 성공한다 해도, 그것들은 기껏 토대만 제공할 수 있을 뿐이다. 그것들 스스로 새로운 사회를 창조할 수는 없다. 새로운 사회는 (전쟁, 공황, 실업 등) 압력에 의해서만 공급될 수 있는 한층 더 근본적인 성격을 가진 힘(forces of a far more basic nature)에 의해서만 달성되어야만 한다.

 

 다음 10년간(1940~1950)은 유럽이 경제인의 붕괴로 빠져든 그 궁지로부터 자신을 끌어낼 수 있는 그런 힘을 찾을 수 있을지, 혹은 유럽이 자유롭고 평등한 인간의 개념에 기초한 새로운 적극적인 비경제적 사회질서를 찾기 전에 전체주의 파시즘에 점령되어 암흑 속에서 자신의 갈 길을 찾기 위해 방황해야만 할지 결정하게 될 것이다. 

Posted by kevin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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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경제토론 자유무역과 보호무역의 역사적 비교
  • 리어왕 리어왕님프로필이미지
  • 번호 517791 | 2009.01.20 IP 118.223.***.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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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에야(지난 20-30년간)  보호무역주의가 필연적으로 경제에 부정적인 결과를 가져온다는 도그마에 의문을 제기할 만큼의 충분한 거시 경제적 자료들이 모아졌다.

 

관세의 역사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변화들에 연관되어 있는 6가지의 주요한 면들을 살펴보겠다. 첫째는 영국의 1846년 이후의 무역 자유화인데, 이는 영국에게 자유 무역 이론의 확증을 의미했다. 다음으로 유럽의 자유 무역과 1870-2에서 1891-3년의 유럽의 대 공황이라는 어려운 문제를 다루겠다.

 

자유 무역 이론들에게는 이 문제가 어렵다, 왜냐하면 무역 정책이 가장 자유주의적 단계에 도달했을 때 공황이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세 번째는  유럽의 1892년 이후의 보호무역주의로의 회귀의 결과들을 다룬다. 이 회귀는 “역설적이게도” 유럽의 경제적 팽창과 일치했다. 네 번째는 “보호무역주의와 대외 무역의 팽창”이다. 5 번째와 6 번째는 비유럽 선진국가 특히 미국을 다루는데, 이것은 보호무역주의의 긍정적 결과들을 확증시켜 줄 것이다. 마지막으로 제3세계에 대한 강제적 자유주의가 가져오는 결과들을 다루겠다.: 저발전으로 이끄는 길이 되는 자유주의.


1846년 이후의 영국의 자유주의와 경제성장.

 

주요한 의문은 영국의 무역 자유화가 영국 자체의 무역과 경제성장에 긍정적 영향을 미쳤는가 하는 것이다. 수출과 GNP에 대한 연간 통계는 이 무역 정책의 주요한 변화가 대외 무역만이 아니라 경제 발전의 속도에도 가속도와 동반되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러나 이것이 무역 자유화의 결과인가?

수출 팽창은 1846년 이전 10-15 년 전에 벌써 엄청나게 빨랐고(연간 5%), 그 해 이후로 더 가속화 되었다. 1843/7에서 1857/61 사이에 영국의 수출 규모는 영간 6%이상이었다.

 

이 성장은 자료가 있는 시기(1697) 이후로 가장 최대이었다는 것을 강조할 가치가 있다.

 

경제 성장도 마찬가지로 이 기간에 예외적이었다. 1843/7에서 1857/61 사이에 GNP 성장률은 연 2.4%였다. 이 기간은 아일랜드 인구의 감소로 인구 성장률이 매우 낮았기 때문에(연 0.2%) 1인당 GNP 성장률은 2.2%였다, 그 당시로는 기록된 것 중 가장 높은 것이었다.

1800년에서 1945년 사이에서도 확실히 가장 높다. 아마도 산업혁명에서 1945년 사이에서도 그럴 것이다.

 

무역이 영국에게 극히 이로웠다는 것이 명백하다. 영국 산업은 매우 중요한 기술적 분야에서 선도를 유지하고 있었는데, 더 큰 시장을 발견했다. 그러나 이 시장은 본질적으로 유럽의 바깥에 있었다. 1839/41과 1859/61 사이에 유럽으로의 수출은 연 4.5% 증가했지만 , 다른 곳으로의 수출은 연 5.1% 증가했다. 이 제국 무역의 팽창은 유럽의 중요성을 축소시켰다. 1830년에 유럽으로의 수출은 영국 총 수출의 48%였지만 ,1860년엔 34%를 넘지 못했다.

 

마지막 %는 영국 수출과 다른 유럽 국가들의 수출의 근본적인 지리적 구조의 차이점을 밝혀준다. 1860년에 다가올 무렵에는 유럽대륙의 다른 유럽 구가들에 대한 수출은 전체의 82%나 되었다. 영국의 유럽으로의 수출의 상대적으로 작은 비율은 1850년대에 유럽 인들을 자유주의로 전환시키려는 시도를 설명해주고 그 자체는 유럽대륙의 보호무역주의에 의하여 설명된다.

 

그러므로 , 전 세계적으로 말하면, 최초의 자유 무역 실험은 긍정적인 것이었고, 이것은 1860년 이후에 대부분의 유럽 국가들의 정책에 중요한 영향을 주었다. 그러나 1846년경의 영국의 상황의 유일함을 잊어서는 안 된다.

 

영국은 산업 혁명의 발생지였을 뿐만이 아니라, 이 혁명은 영국에서 최고조에 달했는데 반해, 대부분의 다른 나라들은 반세기 정도 뒤쳐져 있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기술적 선도를 의미한다. 최후로 그러나 중요한 것으로, 이 선도는 장기간의 고 관세 장벽에 의하여 달성되었다.


자유 무역과 유럽 대공황

 

19세기에 유럽에서 자유 무역이 최고조에 달한 기간은 1866에서 1877년까지 12년간이다. 그 중간에(1870-73)유럽의 대공황(great depression)이라고 불리게 된 것이 시작되었다. 유럽 무역의 규모에 관한 한, 추세의 역전은 1873에 시작되었다. 부분적으로는 영국의 대외 무역의 급격한 팽창의 결과로, 유럽의 수출 규모는 1846-60 기간에 급속하게 성장했다.

 

 자유 무역의 최초의 10년간(1860-70)은 벌써 이 성장 추세의 눈에 띌 정도의 하락으로 특징지어 지는데, 그러나 유럽 대륙에는 거의 감속이 없었다.  그러나 1873에서 1893/4까지 유럽의 수출 규모는 단지  연간 약 2.3% 성장했는데, 그 전 십년들에는 연 5-6%였다. 유럽 대륙에게는 이 감속이 더욱 두드러진다.

 

이 심각한 무역 성장의 하락은 불황의 한 면일 뿐이다.  경제 성장의 경우에는 전환점은 그보다 약간 더 일찍 왔다.:1868-70에. 유럽의 1인당  GNP  성장률은 1850년대와 1860년대의 연간 1.6%에서 다음 20년간에는 0.6%로 떨어졌다. 다른 말로 하면, 이 불황 국면에서 유럽의 경제 성장은 1830-40(연 1%)보다 더 낮았다.

 

  자유 무역= 불황?  보호 무역= 경기 회복?

 

특기할 중요한 점은 불황이 자유주의가 피크일 때에 시작되었다는 것만이 아니라 유럽 대륙의 보호무역주의로의 회귀가 진짜로 효력을 나타내기 시작할 때인 1892-4년쯤에 불황이 끝났다는 것이다. 이것은 관세 정책이 경제 발전에 미치는 영향에 대한 중요한 의문을 제기한다. 어떻게 그리고 어느 정도로 자유 무역이 유럽 경제의 불황을 야기했는가? 그리고 어떻게 보호 무역이 경기회복으로 이끌었는가?

 

무역 정책의 역할에 대한 최초의 단서는 불황은 영국에서 덜 심했고 경제적 회복은 주로 보호 무역으로 돌아간 나라들에게 혜택을 주었다는 사실에서 발견될 수 있다. 1850-70과 비교해 볼 때 1870-90년대 동안에는 영국에서 1인당  GNP  성장률의 감소는 30%였다(연 1.6%에서 1.1%로)그리고 유럽 대륙은 80%였다(연 1.1%에서 0.2%로). 더구나 보호 무역 시기에 유럽 대륙은 약  1인당 연 1.5%로 성장한 반면에 , 영국에서는 성장률이 계속적으로 떨어졌는데 연 약 0.7%였다.

 

두 번째 단서는, 이것은 경제 발전에 미치는 무역 정책의 결과에 대해 훨씬 더 많은 것을 우리에게 말해 주는데, 일반적으로 유럽과 특수하게는  유럽 대륙에서의 주요 부문들의 진화의 분석에서 발견될 수 있다. 유럽 전체로서는  GNP  성장률의 감소는 대부분 농업 생산의 성장의 감소의 결과이다.

 

유럽 대륙에게는 1870/74에서 1888/92사이에 연 약 0.2%의 (농업)생산의 하락(drop)도 있었다. 그 전 수십 년들에는 연 3-4% 성장이었다. 유럽 대륙에서의 농업 위기는 대부분 해외 농산물의 유입에 의하여 완전히 설명될 수 있다. 그런데 그것은 다시 운송비의 감소와 1866과 1872년 사이에 일어난 곡물에 대한 보호 관세의 전면적 철폐의 결과이다.

 

농업에 관한 한 관세 “무장 해제”는 더욱 더 완전 했는데 이는 이에 관해서 자유 무역이론과 보호 무역 이론이 일치했기 때문이라는 것을 주목해야 한다. List는 농업에 대해서는 보호주의적 “학습”기간을 주장하지 않았다. 미국 곡물의 유입은 미국의 남북전쟁이 끝날 무렵 시작되었고 급속하게 유럽 전체의 생산에 비교해도 매우 중요하게 되었다. 농업  경제라고 묘사될 수 있는 프랑스에서조차 밀의 수입은 1851-60사이에 국내 생산의 0.6%였다가 1888/92년에는 19.0%로 올랐다. 벨기에서는 , 수입은 1850경에는 6%에서 1890에는 100%로 올랐다. ....

 

이 곡물의 유입은 특히 농부들에게 영향을 주었다, 왜냐하면 수입품의 낮은 가격은 곡물과 일반 농산물의  국내가의 하락으로 이끌었기 때문이다. 환금 작물 중 곡물이 차지하는 비중이 그것이 전체 농산물에서 차지하는 비중보다 훨씬 더 중요하다는 것을 주목해야 한다. 그 결과 유럽 대륙의 거의 모든 국가들의 농부의 생활수준은 정체되거나 떨어졌다.

 

농부들의 생활수준의 하락 또는 정체는 명백하게 농업 부문 내에서만이 아니라 그 당시 유럽 대륙에서 농업 부문이 전체 생산의 60%를 차지한다는 면에 비추어 보아 그 바깥에서도 중요한 결과들을 가져왔다. 이 부정적인 추세는 산업 제품과 건설 부문에 대한 전반적인 수요에 영향을 미쳤다.  유럽 나라들에 대한 그것의 결과는 1870년대와 1880년대에 미국이 유럽의 주요 곡물 공급자라는 사실에 의해 더 악화되었다.

 

미국의 보호 무역 정책들 때문에 미국이 더 곡물을 유럽으로 수출한다고 해서 그에 상응해서 유럽 제조품을 그 만큼 더 사지는 않았고 결국 유럽과 미국 사이에 무역 수지 불균형이 나타나게 되었다. 1870년경에 북미에 대한 유럽 대륙의 무역 적자는 그 지역으로부터의 수입의 5-6%였지만 , 1890년대에는 32%, 1900년경에는 59%까지 달했다.


유사한 진화 그러나 상이한 결과

 

유럽 대륙으로의 음식물 수입이 갖는 부정적인 효과와 25년전의 영국에서의 같은 정책이 갖는 긍정적인 효과와의 외관상의 모순은 그 정책이 채택될 때의 두 곳의 상이한 경제적 발전 단계에 의하여 본질적으로 설명될 수 있다. 영국에서는 1846년에 농업 노동 인구는 총 노동 인구의 약 22%밖에 안 되었고 제조업 노동인구는 32%였다. 1860/62년에 유럽 대륙의 총 노동 인구의 63%가 농업 부문에 있었고 제조업에는 18-20%정도였다. 유럽 대륙에서 산업화된 나라들도 노동인구의 52%가 농업에 종사했고 제조업 종사자는 단지 19-21%였다.

 

이러한 확연한 차이는 농업에서 산업으로의 노동의 전이는 유럽 대륙에서는 영국에서 보다 최소한 2배는 빠른 비율로 일어났고 대외 배출구가 영국의 선진적 단계 때문에 영국과 같은 역할을 할 수 없을 때에 일어났다는 시사해준다. 이것은 일어나지도 일어날 수고 없었다. 두 유형의 경제와 두 기간 사이에 또 다른 두 가지 구조적 차이가 나타난다. 1846년이 되어서는 영국은 유럽 대륙이 1860년경에 하던 것보다 더 높은 수준의 음식물 수입을 하고 있었다.

 

 이것은 1770-80에 시작된 매우 느린 과정의 결과라는 것을 명심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 과정은 그러므로 생산요소들(자본과 노동)이 농업에서 산업으로 점차적으로 이전하는 것을 허용했다. 둘째, 1846년경에는  비유럽 곡물이 대량으로 이용될 수가 없었고 더구나 높은 이송 비용이 그러한 일을 비경쟁적으로 만들었다. 그러므로 농산물에 대한 충격은 더욱 제한되어 있었다.


보호무역주의와 대외무역의 팽창

 

이 절의 제1차적인 목적은 자유무역 지지자들에게는 진짜 역설이 되는 사실들을 제시하는 것이다. 보호무역의 재 강화 기간은 무역의 더욱 급속한 팽창과 일치했을 뿐만이 아니라 , 더욱 역설적이게도, 유럽에서 가장 보호무역주의적인 국가들이 가장 급속한 무역 팽창을 경험했다.

 

비록 이것이 보호무역주의가 국제 무역을 발생시킨다는 증거로 취해질 수가 없다고 해도, 보호무역주의는 언제나 반드시 그것을 방해하지는 않는다는 것을 보여준다.

 

다른 한편, 무역 팽창은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단지 경제 성장을 달성하는 하나의 수단에 불과하다. 만일 동일한 수준의 재화와 서비스의 생산이 대외 무역으로 또는 그것 없이 이루어진다고 해도 효과적인 소비를 위해 사용될 수 있는 재화와 서비스의 양은 (다른 것들이 같다면) 자유 무역이 없을 때가 더 크다고 주장할 수 있다,

 

왜냐하면 이 경우에는 운송이 더 적고 또한 그 재화들을  분배하는데 필요한 서비스가 더 적기 때문이다.

 

표4.1에 제시된 자료들은 보호무역 기간들이 경제의 상이한 부문들에서만 아니라 무역에서도 얼마나 많이  회복을 촉진하지는 않았다 해도 최소한 동반했는가 하는  것을 보여준다.

보호무역 정책을 다시 채택한 후의 20년간 GNP 규모의 연간 증가율은 100%이상 증가했고

수출 규모는 35% 이상 증가했다(그전 20년과 비교하여).

 

모든 국가들에서(이태리를 제외하고) 보호무역 조치들의 도입은 정책의 변화이후 10년간 경제 성장에 두드러진 가속도를 가져왔고 그 조치가 언제 도입되었나에 관계없이 일어났다. 그 다음 10년간은 보호 무역이 더 강화되었는데, 통상적으로 경제 성장이 더 가속화 되었다. 모든 국가들에 있어, 1909-13은 더 높은 경제 성장에 의해 특징지어 진다.

 

다른 한편 , 실제적으로 무역 정책에 변화가 없었던 영국에서는,  처음에는 정체 기간이 있었고 그 후에 경제 성장률의 뚜렷한 하락이 있었다. 더욱이 유럽 대륙에서는 모든 국가들이 보호 무역을 강화했을 때 성장률이 피크에 달했다.

 

대외 무역에 관한 한, 자유 무역을 포기한 이후 최초의 10년간에는 팽창의 거의 보편적인 감속이 눈에 뜨인다. 그러나 두 번째의 10년간에는 거의 모든 보호무역 국가들에서 수출규모의 성장률이 보호 무역주의 채택 이전 10년간 보다 더 빨랐다. 더군다나, 이것은 중요하다, 이 20년 동안에 무역의 팽창은 보호 무역주의를 채택한 국가들에서가 자유 무역을 고수했던 영국에서 보다 더 빨랐다. ..

 

경제 성장에서와 마찬가지로, 무역 팽창은 모든 국가들이 보호무역을 증가했을 때 더 컸다. 이것은 경제 성장이 무역의 엔진이지 그 역이 사실이 아니라는 명제에 대한 부분적 증거가 된다.


 

 

비유럽 선진 국가들에서의 무역 정책과 경제 발전

 

여기에서는 미국에 집중하자. 19세기를 통틀어 그리고 사실상 1920년대 말까지 “보호무역주의의 모국이자 요새”는 세계에서 가장 빠른 속도의 경제 성장을 경험했다. 우리가 1829/31에서 1909/11에만 한정하면(1800-30사이의 믿을 수 없는 자료를 피하고 제1차 세계대전의 다기한 충격들을 제외하기 위하여) 1인당 GNP 연 성장률은 다음과 같다:

 

미국; 2.4%    서유럽;1.2% 유럽국가중 가장 빠르게 성장하는 국가들; 1.5-1.6%

총 GNP로 따지면 차이는 더 커진다. 왜냐하면 미국의 인구는 이 기간동안에 유럽의 인구보다 훨씬 더 빠르게 증가했기 때문이다.

 

분명히 미국의 성공은 전적으로 관세 정책 때문만은 아니다. 최소한 3개의 다른 요인들이 작용했다. 농업에서 인구비례 높은 토지 비율 . 산업을 위한 광범위한 원료의 사용가능성. 유럽에서의 막대한 규모의 노동과 자본의 유입.


미국의 성공담은 더 보호무역적일 때 더 컸다.

 

이 기간에 대한 현대의 의견에 관한 한, 아주 최근까지는 자유 무역의 도그마가 너무 강해서 1980년대 전에 출판된 논문 중에서 미국 산업에 미친 보호무역의 영향이 긍정적이라는 것을 보이는 논문을 하나도 발견하지 못했다. 그 도그마에 도전한 최초의 논문은 Mark Bils의 것인데(19세기 전반부를 다루었다), 그것의 주요 결론은 다음과 같다.


“나의 발견은 관세의 경제적 중요성에 대한 콘센서스 견해와 더 이상 상충될 수 없을 정도이다. 위의 계산은 1833년과 마찬가지로 보호 무역을 제거했더라면 면직 산업에 부가된 방대한 대부분의 가치들이 없어졌을 것이라는 것을 증명해 보인다.”


덜 보호무역적인 기간 즉 1846년과 1861년까지 무엇이 일어났는지 살펴보자. 여기에도 또한 구체적인 연구가 없다. 현대의 관찰자들에 의하면, 매우 온건한 보호무역과 온건한 자유주의의 중간의 정책들은 경제생활에 눈에 띌만한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

 

1846년의 관세 입법의 비판자들은 그것이 미국의 산업 과정을 미약하게 퇴보시켰다는 것 이상을 주장할 수 없다.  사실상, 그것의 효과는 어느 쪽으로든 작았을 것이다. 현제의 자료로는 더 이상 말할 수가 없다.1840년대와 1850년대의 자료는 지금도 믿을 수가 없고 1840년대 이전의 것들은

 

“통계적 암흑시대”에 속한다. 1인당 GNP 규모에 대한 자료들은 1820년에서 1840년까지 연 성장률이 대략 2.1%, 1840에서 1860까지가 1.7%라는 것을 보여준다. 경제 성장이 감속되었을 가능성이 있지만 , 이 기간 동안의 다른 국가들의 성장률(연 0.9%)과 연관해서 보면 연 1.7%라는 이 성장은 여전히 상당히 빠른 것이다.

 

가장 흥미 있는 기간은 유럽대륙을 그들이 가장 자유주의적 기간에 강타한 “대 불황”의 기간인 1870-92년이다. 이 기간 동안 미국은 보호 무역을 증가시키고 있었고 매우 빠른 성장의 국면을 거쳐 갔다. 정말로 이 기간은 미국의 전 경제사 중에서 가장 번영한 기간으로 간주될 수 있다. 1830년과 1870년 사이에 경제 성장으로 보아 최고의 20년은 1850-70인데,

 

1인당 GNP는 연 1.8% 증가했다. 1870년과 1890년 사이에, 그 연 성장률은 2.1%였다. 그 다음 최고의 20년은 1890-1910인다(연2.0%). 그러므로 미국의 경제 성장에서 최고의 20년은 미국의 무역 정책이 보호무역이고 반면 미국의 주요 경쟁자들이 자유주의적일 때 발생했다.

 

캐나다에서는 얘기가 약간 다르다. 캐나다는 1879년에 보호무역 정책을 채택했다. 1879년 전후 10년 또는 20년간을 비교하면 , 균형은 자유주의로 기운다. 그러나 30년간을 택하면 결과는 그 반대이다. 더구나, 1890=1910 기간은 캐나다의 최고의 그리고 세 번째로 최고의 10년들이 있다.

 

 더욱 중요한 것은 이 보호 무역 기간이 캐나다 산업의 정초로 이끌었다는 사실이다. 캐나다의 1인당 제조업 생산의 수준은 1860에는 선진국들의 40-45%였지만 1913년에는 82-7%로 증가했다. 똑 같은 것이 호주에도 적용된다. 거기에도 보호무역 관세가 산업화를 가져왔다.


제3세계에 대한 강제적 자유주의의 부정적 결과들

 

19세기의  제3세계의 강제적 경제 자유주의가  그들의 산업화의 지연을 설명하는 주요한 요소라는 것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19세기 초부터의 대량의 저렴한 제조품의 수입은 탈산업화 과정으로 이끌었다. 주요한 예를 하나 들면: 1813년에 동인도 회사의 무역 독점권이 폐지되었을 때, 영국 섬유의 인도로의 유입이 상당히 증가했다. 백만 야드의 면 의류가 1814년에 수입되었다.

 

1830년에는 5100만 ;1890년에는 20억5천만. 이 유입은 기술 혁신의 결과로서 영국 방적 공업의 실질적인 진보 때문임이  확실하다. 1830년에는 근대적 장비를 사용하는 영국 노동자의 생산성은 평균 방적사에 대해 인도나 다른 전통적인 노동자의 생산성에 비해 10-14배나 되었고 우량의 방적사에 대해서는 200-300배나 더 높았다. 그 당시에는 소득의 격차 따라서 봉급의 격차가 제한되어 있었다. 영국에서는 실질 1인당 GNP는 인도보다 2-3배 이상 높지 않았다. 당시의 지배적인 노동 조건의 관점에서 보면 임금 차는 더 작았을 것이다.

 

이것은 커다란 이윤과 높은 운송비용을 감안하더라도 그러한 생산성의 차이 때문에 인도에서의(다른 곳도 마찬가지로) 실의 최종 소비자 가격은 분명히 그 지방 생산 비용보다 훨씬 더 작았고 그 지방에서는 이미 임금 수준이 매우 낮았기 때문에 비용을 더 많이 줄일 수가 없었다. 그러므로 이 사실과 개방 시장 정책을 결합하면 상당량의 수입은 피할 수 없게 된다.

 

인도는 긴 리스트들 중의 단지 첫 번째 희생자다. 정치적으로 독립적인 제3세계 국가들 조차도 서구의 제품에 문을 열도록 강요당했고, 이 것 때문에 제조품의 유입이 있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1860년에는 영국, 프랑스, 미국에서 라틴 아메리카로의 면화재의 연간 수출양은 거주자 1인당 10.6평방미터였고 그 숫자는 중동에 대해서는 7.0평방미터였다.

 

이 통계는 이 지역들에서의 섬유 산업의 거의 완전한 몰락(disappearance)를 설명해준다. 철강 산업의 경우는 더 심했다. 이 부문에서 탈산업화 과정은 더 두드러졌다:


보호무역주의의 부정적인 결과들에 대한 것보다 더 지배적인 이론에 반하는 경우를 찾는 것은 어렵다. 최소한 19세기 세계 경제사에 관한한 그렇다.  모든 경우에 보호무역은 산업화와 경제 발전으로 이끌든지 또는 최소한 병행했다.

 

또한 자유주의의 4개의 예에서 3개는 부정적 또는 매우 부정적인 결과들을 가져왔다. 예외는 1846년 이후의 자유무역 기간의 영국인데, 그 때는 이 정책은 아마도 완전 관세 철폐이후의 20-30년을 특징지었던 경제 발전을 가속화 시키는데 중요한 요소였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산업혁명의 요람으로서 1846년에는 다른 선진국에 대한 상당한 우위를 점하고 있던 나라에 대한 것이다. 더구나, 그 당시에 영국은 1세기 반의 보호무역을 하고 난 뒤이다. 


 

Posted by kevin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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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번호 516239 | 2009.01.19 IP 118.223.***.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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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크라테스의 변명

 

아테네 시민 여러분, 나는 여러분이 나를 고발한 사람들에게서 어떤 느낌을 받았는지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마터면 그들 때문에 내가 나를 잊을 정도로 그들의 말은 그럴 듯했습니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한마디도 진실한 말은 하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그들의 거짓말 중에서도 한 가지 가장 놀라운 것은, 내가 무슨 능숙한 변론가나 되는 것처럼, 여러분은 나에게 속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는 말이었습니다. 내가 결코 능숙한 변론가가 아님을 밝힌다면 그들의 거짓말은 당장 드러나고 말텐데도, 그들은 그런 말을 하면서 부끄러운 줄도 몰랐습니다.

이것이야말로 그들의 가장 염치없는 점입니다. 하기야 그들이 진실을 말하는 사람을 말 잘하는 사람이라고 부른다면, 그것은 이야기가 다릅니다. 그들의 말이 그런 뜻이라면, 그들과는 훨씬 다르겠지만, 나도 변론가임을 스스로 인정할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말한 것처럼 그들은 한마디도 진정한 말을 하지 않았지만, 그와는 반대로 여러분은 나에게서 모든 진실을 들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테네 시민 여러분, 제우스 신께 맹세코, 여러분이 내게서 들을 말은 그들의 말처럼 선택된 말이나 일부러 꾸며 화려하게 늘어놓은 말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것은 머릿속에 떠오르는 대로 꾸밈없이 하는 말일 것입니다.

 

그것은, 내가 말하려는 것이 옳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그런 만큼 여러분 중 누구든지 그와는 다른 말을 내게서 기대하지 말기를 바랍니다. 왜냐하면 여러분, 내가 여러분 앞에 불려 나와서 버릇없는 아이들처러 핑계를 댄다는 것은, 아무래도 이 나이에는 어울리지 않는 일일 테니까요.


그런데 아테네 시민 여러분,

 

여러분에게 단단히 부탁해 두고 싶은 것이 한 가지 있습니다. 그것은 내가 평소에 다른 곳에서, 또는 시장에 있는 은행 앞에서 흔히 쓰는 말로 이야기하는 것을 여러분들은 자주 들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런 말로 변명하는 것을 듣더라도, 그것 때문에 놀라거나 소란을 피우지는 말아 달라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이런 사정이 있기 때문입니다.

 

즉, 내 나이 이미 70에 법정에 나서기는 이번이 처음입니다. 그러니 여기서 쓰는 말은 내게는 아주 생소한 말입니다. 이제 가령 내가 과연 딴 데서 온 사람이라고 한다면, 거기서 내가 써오던 말을 그대로 쓰고 그 말버릇으로 이야기한다 하더라도 여러분은 사정을 헤아려서 물론 나를 용서하실 것이고, 그와 마찬지로 내가 지금 여러분에게 이런 부탁을 한다 해도 아무튼 나에게는 정당한 일이라고 생각됩니다.

아마 서툰 말도 있겠고 그럴 듯한 말도 있겠지만 말버릇은 개의치 마시고, 다만 내가 옳은 말을 하는가 그렇지 않은가 만을 잘 살펴서 거기에 유의해 주기 바란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바로 재판관의 훌륭함이며, 변론가의 훌륭함은 진실을 말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2

따라서 우선 내가 당연히 변명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은, 아테네 시민 여러분, 처음으로 나에게 제기된 거짓 고발과 첫 고발인들에게, 그리고 그 후의 고발과 그 후의 고발인들에게 대한 것이라야 합니다. 왜냐하면 벌써 오래 전부터 여러 해 동안 나에 관해서 여러분들에게 전혀 터무니없는 고발을 하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그런데 내게는 1)아니토스일파도 두렵기는 하지만, 그보다도 오히려 그들이 더 두렵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더 두렵다는 것은, 여러분 중의 많은 사람들을 이미 어렸을 적부터 휘어잡고 설복시켜, 나에게 전혀 터무니없는 죄를 씌우려 했기 때문입니다. 즉, 소크라테스라는 지혜로운 사람이 있는데, 하늘의 일에 머리를 쓰고, 땅 밑의 모든 일을 탐구해서 약한 주장을 억지로 강하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아테네 시민 여러분, 그런 헛소문을 퍼뜨린 이 사람들이야말로 내가 두렵게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고발인들입니다. 왜냐하면 그런 소문을 듣는 사람들은 누구나, 이런 일을 탐구하는 사람들은 틀림없이 신들을 믿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더군다나 그 고발인들의 수는 많고, 그리고 이미 오래 전부터 나를 중상하는 소문을 퍼뜨려 왔습니다. 더욱이 그들이 여러분에게 그런 말을 했을 때는, 여러분 중의 더러는 어리고 또 더러는 젊어서 남의 말을 가장 곧이듣기 쉬운 나이였습니다.

말하자면 그들은 아무도 나를 변명해 주는 사람이 없는 결석재판 같은 데서 그런 고발을 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가장 이해할 수 없는 일은, 그들 중에 희극작가 한 사람이 있다는 것밖에는, 그들의 이름이나 그 어떤 것도 말할 수 없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질투하고 헐뜯기 위해서 여러분을 곧이듣게 하려던 사람들 <그중에는 자신도 믿고 남도 믿게 하려는 사람이 있었는데> 이 사람들이야말로 매우 다루기 힘든 자들입니다. 왜냐하면 그들 중의 누구 하나 여기 데려다가 따져 볼 수도 없고, 그것을 변명하자니 마치 자기 그림자와 싸우듯 아무도 대답하는 사람 없이 혼자 따지는 꼴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내가 말했듯이 내게 나타난 고발인은 두 부류가 있는데, 하나는 요즘에 나를 고발한 사람들이며, 다른 하나는 내가 지금 말하고 있는 지난번 사람들이라는 것을 여러분도 인정해 주시고, 그리고 먼저 이 사람들에게 변명하지 않으면 안 되겠다는 것을 생각해 주시기 바랍니다. 왜냐하면 여러분도 요즘 사람들의 고발보다 그전 사람들의 고발을 더 일찍, 그리고 훨씬 많이 들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건 그렇고, 이제부터는 변명을 해야겠습니다. 아테네 시민 여러분, 여러분이 오랫동안 품고 있었던 편견을 이렇게 짧은 시간에 제거해 버리도록 힘쓰겠습니다. 하기야 만약 그렇게 되는 것이 여러분에게도 나에게도 더욱 좋은 것이라면 그렇게 되기를, 그리고 내 변명이 얼마만큼이라도 보람이 있기를 바라는 바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어려울 것이고, 나는 이 일이 어떻게 되어 갈 것인가를 전혀 모르고 있는 것도 아닙니다. 아무튼 그 일은 신의 뜻에 맡기고 나는 법률에 복종해서 변명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3

우선 처음으로 돌아가서 나를 무고하여 그러한 악평이 생기게 했고, 2)멜레토스도 이 말을 믿고서 고소를 제기하도록 한 그 죄상이란 대체 무엇인가를 묻기로 합시다. 그렇습니다. 나를 무고한 사람들은 무슨 죄목으로 나를 무고했단 말입니까? 그래서 나는 그들을 마치 원고처럼 생각하고, 그 고소장을 읽어 보기로 하겠습니다.


[소크라테스라는 자는 땅 밑과 하늘의 일을 탐구하여, 약한 주장을 강하게 만드는 따위의 부질없는 짓을 하고, 또한 남에게도 그것과 같은 터무니없는 것을 가르치기 때문에 그는 죄를 범하고 있다.]


대강 이런 내용입니다. 사실 그것은 여러분 자신이 아리스토파네스의 희극 속에서 직접 보셨을 것입니다. 거기서는 소크라테스라는 사나이가 무대 위를 돌면서 공중을 날아다닌다고 허풍을 떤다든가, 그밖에 허다한 영문도 모를 군소리를 늘어놓고 있습니다.

 

 하지만, 나는 그런 것에 관해서는 크든 작든 간에 아무것도 모릅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런 일에 관한 지혜를 가진 사람이 있을 경우, 내가 그런 지식을 업신여기려고 그렇게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나는 멜레토스의 엄청난 송사에 질려 더 이상은 듣고 싶지가 않을 뿐입니다. 실은, 아테네 시민 여러분, 나는 이런 일에는 전혀 관심이 없습니다. 그래서 나는 여러분 중의 대부분을 그 증인으로 세우고, 그리고 언젠가 내 대화를 들은 적이 있는 여러분은 <여러분 중에는 그런 사람이 많을 테니>서로 터놓고 밝혀 낼 것을 요구합니다.

 

 자, 여러분 가운데 누군가 한 사람이라도 내가 이런 일에 관해서, 그것이 크건 작건 말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는지 서로 밝혀 내 주십시오. 그러면 여러분은 뭇 사람들이 내게 관해 말하는 그 밖의 것도 이것과 같은 것이라고 깨닫게 될 것입니다.


4

하지만 이런 것들은 전혀 터무니없는 일이고, 또 내가 사람들을 가르친다고 나서서 그 댓가로 돈을 요구한다고 여러분이 누구에게선가 들었다 해도, 그것 역시 사실이 아닙니다. 하기야 레온티노이 사람인 고르기아스, 케오스 사람인 프로디코스, 엘리스 사람인 히피아스3)처럼 인간을 가르칠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것도 훌륭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모두 어떤 나라에든지 가서 그곳의 젊은이들에게 <제 나라 사람 중에서 누구든 원하는 사람과 아무 댓가도 치르지 않고 사귈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제 나라 사람과 사귀는 일은 버려두고 자기들과 어울리도록 타일러서 그것에 대해서 돈을 치르고, 게다가 고맙게 여기도록까지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 밖에도 또 한 사람, 파로스에서 지혜있는 사람이 여기 와서 지금 이곳에 머물고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실은 지혜의 선생들에게 모든 사람 전부가 치른 것보다 더 많은 돈을 치른 사람, 즉 히포니코스의 아들인 칼리아스4)를 만났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나는 그에게 물었습니다. <그에게는 두 아들이 있었습니다.>


- 칼리아군

내가 말했습니다.



- 만약 자네들의 아들들이 송아지였다면, 그것에 알맞은 덕을 갖춘 훌륭한 감독자를 찾아서 그를 고용해야 하지 않겠나? 그리고 그는 말이나 농사에 능한 사람이라야 했을 걸세.

 

그런데 실은 자네 아들들이 사람이니만큼 그들을 위해서 자네는 누구를 감독자로 택할 셈인가? 인간으로서의, 그리고 국민으로서의 덕을 알고 있는 사람이란 누굴까? 자네에게는 아들이 있으니, 반드시 이런 것을 생각한 적이 있었으리라고 생각하네. 누군가 그런 사람이 있었던가, 아니면 없었던가? 라고 내가 물으니까,


- 있고말고.

하고 그는 대답했습니다.


- 그게 누군가?

하고 내가 물었습니다.


- 어디 사람이며, 얼마를 받고 가르치는가?

그러자 그는,


- 에우에노스일세, 소크라테스, 그는 파로스 사람인데 5므나5)로 가르치고 있지

라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에우에노스가 과연 그런 재주를 가지고 있고, 또 그런 적당한 값으로 가르치고 있다면, 그는 팔자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나도 그런 지식을 갖고 있었다면 제법 보람을 느끼고 우쭐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나는 그런 지식을 갖고 있지 못합니다. 이테네 시민 여러분.


5

그런데 여러분 중에는 아마 이렇게 따질 사람이 있을는지도 모릅니다.


- 소크라테스, 도대체 당신이 하는 일이 무엇이오? 당신에 관한 이 편견은 어디서 나온 것이오? 당신은 분명히 일반 사람들과 다른 부질없는 짓을 했었는데, 만약 당신이 많은 사람들과 뭔가 다른 짓을 하지 않았다면, 당신에 관해서 이런 소문이나 이야기가 퍼졌을 리는 없었을 것이오. 그러니 당신이 하고 있는 일이 무엇인지 우리에게 들려주시오. 우리는 굳이 당신에 관해서 지레짐작하고 싶지는 않으니까.


나는 그렇게 말하는 사람은 옳은 말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며, 따라서 나는 무엇이 이런 명성과 편견을 일게 했는지 여러분에게 밝혀 보도록 힘쓰겠습니다. 그러니 계속 들어 주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여러분 중에는 아마 내가 농담이나 하는 것처럼 생각하는 분도 있을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믿어 주십시오. 내가 말하려는 것은 전부가 진실이니까요.

왜냐하면 아테네 시민 여러분, 내가 그런 명성을 얻고 있는 것은 다만 나에게 일종의 지혜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그것은 어떤 지혜일까요? 아마 그것은 인간에게 속하는 지혜일 것입니다. 왜냐하면 내가 가지고 있는 지혜란, 아마 그런 지혜일지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방금 내가 말한 사람들은 뭔가 인간 이상의 지혜라도 가지고 있는 지혜로운 사람들인지도 모릅니다. 아니면 무엇이라고 말해야 할는지 나는 모르겠습니다. 왜냐하면 사실 나는 그런 것을 갖지 않았기 때문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그것을 갖고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거짓말을 하는 것이고, 나를 헐뜯기 위해서 그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아테네 시민 여러분, 비록 내가 무슨 큰소리나 치는 것처럼 여러분에게 생각되더라도 가로막지 말기 바랍니다. 왜냐하면 내가 이제부터 말하려는 것은 내 말이 아니라, 오히려 그 말은 충분히 믿을 만한 데서 나온다는 것을 여러분에게 분명히 밝혀 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즉, 내게 무슨 지혜가 있다면 그 지혜에 관해서, 그리고 그것이 어떤 지혜인가에 관해서 나는 델포이에 있는 신을 여러분 앞에 증인으로 내세울 것입니다. 여러분은 아마 카이레폰을 알고들 게실 겁니다. 그는 젊어서부터 내 친구이고, 또 대부분의 여러분에게도 친구이며, 한 때는 망명도 함께 했었고, 또 여러분과 함께 돌아오기도 했던 사람입니다.


그리고 카이레폰이 어떤 사람인가, 그가 무슨 일에든지 얼마나 깊이 파고드는 성질인가는 여러분도 알고 계실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언젠가 델포이의 신전에 가서, 감히 다음과 같은 신탁을 구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러니 내가 이제부터 말하려는 것에 대해서, 여러분은 방해하지 말기 바랍니다.>

 

즉, 그는 나보다 더 지혜있는 사람이 있는가 없는가를 물었더니, 거기에 있던 그 무녀가 더 지혜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대답했습니다. 이 일에 관해서는 여기 있는 아우가 여러분에게 증언할 것입니다. 카이레폰 자신은 이미 세상을 떠나고 없으니까요. 


6

그런데 여러분, 무엇 때문에 내가 이런 말을 하는지 아시겠습니까? 그것은, 즉 나에 관한 편견이 어디서 생겼는지 이제부터 여러분에게 알려 드리고 싶기 때문입니다. 그 신탁을 들었을 때, 나 스스로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 신께서는 도대체 무엇을 말씀하시려는 것이며, 그리고 무슨 수수께끼를 걸고 계시는 것일까? 왜냐하면 나는 큰일에서나 작은 일에서나 지혜로운 사람이 못 된다고 스스로 깨닫고 있기 때문이다. 신이 그런 나를 가장 지혜롭다고 한 말씀은 대체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거짓말을 했을 리는 없다. 거짓말이란 신에게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니까.


그래서 나는 신이 무엇을 말씀하시려는 것인지 오랫동안 궁금하게 여기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매우 꺼림칙한 마음으로 그 의미에 대해 물어 보기로 했습니다. 그것은 지혜가 있다는 명성을 듣고 있는 사람들 중의 한 명을 찾아가는 일이었는데, 다른 데도 아닌 그곳에서


- 저보다 이 사람이 더 지혜가 있습니다. 그런데도 당신께서는 제가 가장 지혜있는 사람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라고 신탁을 향해서 반박하는 말로 분명히 선언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그 사람 <굳이 이름을 들어서 말할 것까지는 없겠지만, 그는 정치가였는데 그와 문답을 하면서 살펴본 바로는 아테네 시민 여러분, 그에 관해서 나는 왠지 이런 느낌을 받았습니다.>을 지혜로운 사람이라고 굳게 믿고 있을 뿐만 아니라, 특히 그 자신이 누구보다도 가장 많이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실은 그렇지가 못하다고 나는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그 자신이 지혜가 있는 듯 믿고는 있지만, 실은 그렇지가 않다는 것을 밝히려고 애셨던 것입니다. 그러다보니 나는 그에게서도, 거기 있던 많은 사람들에게서도 미움을 사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나는 그곳을 떠나면서 이렇게 혼자 생각했습니다.


- 그 사람보다는 내가 더 지혜가 있다.

 

아마 그 사람도 나도, 아름다움이나 선한 것에 관해서는 아무것도 모를 것입니다. 그러나 그 사람은 모르면서도 아는 것처럼 생각하고 있는 반면에 나는 아무것도 모르기 때문에 그대로 모른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즉,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생각한다는 바로 그 조그만 점에서 그 사람보다는 내가 지혜가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 사람에게서 나는 그보다 더 지혜롭다고 이름난 또 한 사람에게도 갔었지만 역시 같은 생각을 갖게 되었고, 그리고 거기서도 역시 그 사람에게뿐 아니라 다른 많은 사람들에게서도 미움을 받게 되었던 것입니다.


아...

겸손함이란 이런 거군요. 저는 참 어렵습니다.

이런 말 읽을줄만 알지 행동에 옮기기란,,, 너무 어렵습니다...


7

그 후 오늘날까지 곳곳을 다 찾아다녀 보았습니다. 남의 미움을 사고 있다는 것을 알고는 괴롭기도 하고 걱정도 되었지만, 그러면서도 신의 일은 가장 소중히 여기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래서 그 신탁의 뜻이 무엇인가를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또다시 찾아다녀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개에 맹세코, 아테네 시민 여러분 <여러분에게는 진실을 말해야 하니까>나는 장담하거니와, 다음과 같은 일을 겪었던 것입니다. 즉 신의 명령에 따라 살펴보니 가장 유명한 사람들의 대부분이 오히려 가장 사려가 부족하고, 그와 반대로 가장 미천하다고 생각되는 사람들이 그 점에서는 오히려 훌륭하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내게 대한 신탁은 결국 뒤집힐 수 없는 것이 되었지만, 나는 갈수록 태산 같은 나의 고생스러웠던 편력(여러 각지를 돌아다님)에 관해서 여러분에게 말씀드리겠습니다. 즉 이번에야말로 내게 지혜가 없다는 증거를 당장에 잡을 것이라고 벼르고 정치가, 비극작가, 디티람보스라는 작가, 그리고 그밖의 많은 작가들을 찾아갔습니다.


그래서 가장 힘을 들였다고 생각되는 그들의 작품을 들었고, 또 그것이 무엇을 말하려는 것인지 캐물었습니다. 그것은 동시에 그들에게서 무엇인가를 배우고 싶기도 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여러분에게 사실대로 말하기가 부끄럽습니다. 그래도 말하지 않을 수가 없군요. 그것은 그 자리에 있었던 사람들의 대부분이 그 작가 자신들보다 그 작품에 관해서 훨씬 더 설명을 잘할 수 있었으리라는 점입니다.


그래서 나는 이 작가들에 관해서도, 작가의 지혜로 작품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신의 계시에 의해 마치 예언자들처럼 일종의 타고난 바탕이나 신적인 힘으로 만든다는 것을 짧은 시간에 알게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그럴 듯한 말을 많이 하기는 하지만, 자기가 말하는 것의 참뜻에 관해서는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내가 보기에는 분명히 작가들도 거의 그와 비슷한 처지에 놓여 있었습니다. 그와 동시에 그들이 작가로서 일하고 있다 해서, 실제로는 그렇지도 못하면서, 다른 일에서도 가장 지혜가 있는 사람이라 믿고 있음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나는 내가 정치가들보다 훌륭하다는 점과 똑같은 이유에서, 이들보다도 내가 훌륭하다고 생각하면서 거기를 떠났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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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마지막으로 손재주가 있는 사람들을 찾아갔습니다. 왜냐하면 나 자신은 거의 아무것도 모른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지만, 그와 반대로 그들은 훌륭한 것을 많이 알고 있다는 점을 꼭 찾아낼 수가 있으리라고 믿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나는 그점에서는 속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내가 모르는 것을 알고 있었고, 따라서 그 방면에 있어서는 나보다 지혜로왔습니다.


그러나 아테네 시민 여러분, 내가 보기에는 우리l의 그 선량한 기능공들까지도 작가들과 똑같은 잘못을 저지르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그들은 기술에 능하다고 해서, 그밖의 다른 중대한 일에 관해서도 가장 지혜로운 사람이라고 믿고 있었습니다. 게다가 이런 편견이 그나마 그들의 지혤ㄹ 가리고 있는 듯이 보였습니다. 그래서 나는 신탁을 위해 스스로 물어 보았습니다.


- 도대체 어느 편을 택해야 하는가? 나는 그들이 가지고 있는 지혜는 조금도 가지고 있지 못하고, 그들의 무식도 그대로 나 자신의 무식이 되고 있지 못하니, 나의 지금의 상태 그대로 있어야 할 것인가, 아니면 그들이 가지고 있는 두 가지를 다 가져야 할 것인가?


그리고 나는 나 자신과 신탁에 대해서 지금의 상태대로 있는 편이 나에게는 좋을 것이라는 결론을 내렸던 것입니다.


9

아테네 시민 여러분, 이렇게 따지다 보니 내게는 숱한 마음이 생기게 되고, 게다가 그것은 매우 귀찮고 극성스런 것이었습니다. 그 결과 그들에게서 많은 악평이 생기고, 또 내가 지혜있는 사람이라는 평판만 퍼지게 된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자리에 있는 사람들은 언제든지 내가 무슨 일로 남을 몰아세울 때마다, 내게는 지혜가 있는 것처럼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여러분, 실은 오직 신만이 참으로 지혜로운 자이고, 따라서 신은 그 신탁에서 인간의 지혜 따위는 거의 값어치가 없거나 전혀 보잘것없다는 것을 말씀하려고 했는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그것은 신이 여기 있는 이 소크라테스를 두고 말씀하시는 것 같지만, 실은 내 이름은 덤으로 쓰고 있는 데 지나지 않는 것이 분명합니다. 그것은 마치 나를 한 본보기로 들어,


- 인간들아, 소크라테스처럼 자기의 지혜는 진정 아무 값어치도 없다고 깨달은 그 사람이야말로 너희들 가운데 가장 지혜있는 사람이니라


하고 말씀하는 것같이 들렸습니다. 그래서 나는 지금도 아직 돌아다니면서, 여기 시민이건 다른 나라 시민이건 나에게 지혜롭다고 생각되는 사람이 있으면 신의 명령에 따라, 그 사람을 찾아서 관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가 나에게 그렇게 생각되지 않을 경우엔 신을 도와서 그가 지혜있는 사람이 아님을 밝혀 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이런 일에 분주하기 때문에 나라일도 집안 살림살이도 돌볼 겨를이 없어, 나는 매우 가난하게 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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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밖에 또 젊은이들이 <가장 한가하고, 또 매우 부유한 집의>스스로 나를 따라다니면서, 내가 사람들과 묻고 따지는 것에 자뭇 흥미를 갖고 , 그들도 가끔 나를 본받아서 다른 사람들에게 묻고 따지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그들은, 제딴에는 무엇인가 아는 것처럼 생각하고 있으면서도 실은 조금밖에 모르거나, 또는 아무것도 모르고 있는 사람들이 숱하게 많다는 것을 알아내게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그들에게 검토되는 사람들은 자기 자신에게 화풀이를 하지는 않고 오히려 내게 화를 내어, 소크라테스라는 매우 괘씸한 자가 있는데, 그가 젊은이들을 타락시키고 있다고 말하게 된 것입니다.


더군다나 무엇을 하고 무엇을 가르쳐서 그러느냐고 물으면 그들은 대답이 막히고, 자기들이 궁지에 빠진 것을 감추기 위하여 아무것도 모르면서 학문을 하는 모든 사람들에 대해서 낡아빠진 비난을 퍼붓는 것이었습니다.


즉, [공중이나 땅 밑의 일]이라든가, [신들을 믿지 않는다]든가, 또는 [약한 이론을 강하게 한다]는 따위의 말을 하는 것이지요. 하지만 그것은 그들이 진실을, 즉 아는 척하지만 사실은 아무것도 모른다는 사실이 드러나게 된 것을 말하고 싶지가 않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명예심이 강한데다가 한데 뭉쳐서 그럴 듯하게 내게 관해서 말하고 다니기 때문에, 오래 전부터 오늘날까지 격심한 험구로 여러분의 귀를 가득 채워 온 것입니다.


이 바람에 멜레토스가 나를 공격했고, 아니토스와 리콘도 공격했습니다. 멜레토스는 작가를 대신해서, 아니토스는 기능공과 정치가를 대신해서, 그리고 리콘은 변론가를 대신해서 나를 괴롭혔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처음에도 말한 바와 같이, 이렇게까지 뿌리 깊은 편견을 이렇게 짧은 시간에 내가 여러분에게서 뽑아 버릴 수 있다면, 그것은 오히려 이상한 일일 것입니다.


아테네 시민 여러분, 이것이 진실이며, 나는 여러분에게 숨김없이, 그리고 속임없이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그 까닭으로 인해 미움을 받고 있다는 것도 나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야말로 내가 진상을 말하고 있고, 또 내게 대한 악평도 지금 말한 바와 같은 것이고, 그 원인도 내가 말한 바와 같다는 증거가 되기도 합니다. 이제라도, 또는 훗날이라도 여러분이 그것을 조사해 본다면, 지금 내가 말한 것들이 사실임을 알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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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만하면 처음의 고발인들의 고발 내용에 관해서는 여러분에게 충분히 변명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면 다음에는 선량한 애국자라고 자칭하는 멜레토스를 비롯하여, 그후의 고발인들에 대해서 변명하기로 하겠습니다.


자, 그러면 그들을 다른 고발인으로 보고, 다시 한번 그들의 고소장을 살펴보겠습니다. 그것은 대강 이런 내용입니다.


- 소크라테스는 죄인이다. 그는 젊은이들을 타락시키고, 나라에서 인정하는 신들을 믿지 않고 따로 새로운 신령 따위를 믿고 있다.


이것이 그 고발입니다. 이제 이 고발 내용을 하나씩 따져 보기로 하겠습니다. 그들의 주장에 의하면 내가 젊은이들을 타락시키는 죄를 범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아테네 시민 여러분, 그러나 나는, 도리어 멜레토스야말로 죄인이라고 주장합니다.


왜냐하면 그는 지금까지 전혀 마음을 쓰지 않았던 일에 관해서 사뭇 성실하고 걱정을 하는 척하면서, 경솔하게도 사람들을 이 송사에 끌어들여 엄숙한 일을 장난삼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나는 이것이 사실이란 것을 여러분에게도 밝혀 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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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 멜레토스, 이리 나와서 말하게. 어떤가, 자네가 가장 대단하게 여기는 점은 젊은이들이 될 수 있는 대로 선량해지는 것이 아니겠나?


-그렇습니다.


- 자 그렇다면 이 사람들에게 말하게. 누가 젊은이들을 선량하게 만드는가? 그 일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면, 분명히 자네는 알고 있을 테니까. 왜 그런고 하니, 자네는 그들을 타락시키는 사람을 찾아내기나 했다는 듯이, 나를 고발해서 이 사람들 앞에 끌어냈으니 말일세.


자, 그렇다면 말하게나, 선량하게 만드는 것이 무엇인지. 그것을 이분들에게 말려주게 - 그것보게, 멜레토스. 자네는 입을 다물고 말을 못 하지 않는가? 그리고 그건 부끄러운 일이며, 내가 말한 것, 즉 자네는 여기에 조금도 마음을 쓰지 않았다는 것의 충분한 증명이 된다고 생각하지는 않는가? 어쨌든 말해 보게, 이 사람아. 그들을 선량하게 이끌어 주는 것이란 무엇인가?


-법률입니다.


- 그러나 나는 그것을 묻고 있는 것이 아니네. 여보게, 나는 사람을 묻고 있는 것일세. 우선, 바로 그 법률이라는 것을 알고 있는 사람이 누구인가?


-그건, 소크라테스 님, 저기 있는 재판관들입니다.


- 무슨 소리를 하는 건가, 멜레토스? 여기 있는 사람들이 젊은이들을 가르칠 수 있고, 더욱 선량하게 만들 수 있단 말인가?


-그렇고말고요.


- 그들 모두가 그렇다는 건가, 아니면 그들 중의 더러는 그렇고 더러는 그렇지 않다는 말인가?


-모두가 그렇습니다.


- 이건 헤라에 맹세코 훌륭한 말일세. 그러고 보면 선량하게 이끌어 주는 사람은 어지간히 많기도 하군. 그렇다면 어떤가? 여기 있는 방청인들도 더욱 선량하게 이끌어 주는 사람인가, 아닌가?


-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 그럼, 1)의정원 사람들은 어떤가?


-의정원 사람들도 그렇습니다.


- 그러나 멜레토스, 2)국민의회 사람들, 즉 그 위원들이 설마 젊은이들을 타락시키는 일이야 없겠지? 아니, 그들도 모두 선량하게 이끌어 주겠지?


-그들도 그렇습니다.


- 그렇다면 아테네 시민 전부가 그들을 훌륭하고 선량하게 만드는데, 나만이 그들을 타락시킨다는 말이로군. 그런 말이겠지?


-바로 그것이 전적으로 내가 말하고자 하는 점입니다.


- 자네는 내가 지극히 불행한 사람이라는 것을 들춰낸 셈일세. 그러면 대답해 주게. 자네는 말(馬)에 관해서도 그렇다고 생각하는가? 모든 사람들이 말을 잘 길들이는데, 누군가 한 사람만이 나쁘게 만드는가? 또는 그와 반대로, 말을 잘 길들일 수 있는 것은 한 사람뿐이거나 아니면 소수의 마술가들 뿐이고, 대다수의 사람들은 말과 함께 있거나 말을 부리면 도리어 나쁘게 만든다는 말인가?


어떤가, 멜레토스, 말이나 그밖에 다른 짐승의 경우에도 그렇지 않은가? 자네나 아니토스가 반대를 하건 찬성을 하건 그건 더 말할 필요도 없네. 왜냐하면 만약 젊은이들에 관해서 단 한 사람만이 그들을 타락시키고, 그밖의 사람들은 모두 다 그들을 이롭게 한다면, 그것은 그들에게는 얼마나 다행스런 일이겠나.


그러나 멜레토스, 자네가 젊은이들의 일에는 단 한 번도 걱정을 해 본 적이 없다는 것이 충분히 밝혀졌네. 즉 나를 여기다 끌어낸 일에 관해서 자넨 아무 관심도 갖지 않았다는, 자네 자신의 무관심을 이제는 분명하게 드러내고 말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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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런데 제우스 신께 맹세코, 또 한 가지 우리에게 말해 주게, 멜레토스. 함께 살기에는 좋은 국민과 나쁜 국민 중 어느 편이 더 나을까? 자, 여보게, 대답해 보게, 내가 묻고 있는 것은 그다지 어려운 질문도 아니니. 나쁜 사람은 늘 이웃에게 나쁜 짓을 하지만, 좋은 사람은 뭔가 좋은 일을 이웃에게 하는 것이 아니겠나?


-그렇고말고요.


- 그렇다면 자기와 사귀는 사람들에게서 이익을 얻기보다는 해를 입기 바라는 사람이 있을까? 여보게, 대답하게나, 마침 법률도 자네에게 대답하기를 명령하고 있으니, 도대체 해를 입기를 바라는 사람이 있을까?


-물론 없습니다.


- 자, 그렇다면 자네는 내가 젊은이들을 타락시키고 더욱 나쁘게 한다고 해서 나를 여기다 끌어냈는데, 내가 일부러 그랬단 말인가, 아니면 일부러 그러진 않았단 말인가?


-물론 없습니다.


- 자, 그렇다면 자네는 내가 젊은이들을 타락시키고 더욱 나쁘게 한다고 해서 나를 여기다 끌어냈는데, 내가 일부러 그랬단 말인가, 아니면 일부러 그러진 않았단 말인가?


-일부러 그랬습니다.


- 그렇다면 멜레토스, 대체 어떻게 된 일인가? 자네는 젊은 나이로 늙고 나이 먹은 나보다 그렇게까지 훨씬 지혜로우니. 나쁜 사람은 자기와 가장 가까운 사람에게 늘 어떤 해를 입히고, 선량한 사람은 뭣인가 좋은 일을 한다는 것을 자네는 알고 있네.

 

 그렇다면 내가 나와 함께 있는 사람 중의 누군가를 나쁘게 만든다면, 나 자신도 그에게서 해를 입을 위험성이 있다는 것조차 모를 만큼 내가 엄청나게 무지해서, 그 결과 내가 일부러 그런 큰 앙화를 만들어 내려 한다고 자네는 주장하지만, 과연 그럴까?


자네의 말은 믿을 수가 없어, 멜레토스. 그리고 이 세상 어느 누구도 자네의 말을 믿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네. 오히려 나는 젊은이들을 타락시키고 있지 않거나, 타락시키고 있다 해도 일부러 그러지는 않았다는 것이 되고, 따라서 자네는 그 어느 것에서도 거짓말을 하고 있는 셈일세.

 

그런데 만약 내가 일부러 타락시키고 있는 것이 아니라면, 그런 본의 아닌 잘못 때문에 나를 이런 자리에 끌어낼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네는 나를 개인적으로 만나서 가르쳐 주는 편이 옳았을 것이네. 그것을 내게 가르쳐 주었더라면 일부러 하는 일이 아닌 이상 나도 그만두었을 것이 분명하니까. 그런데 자네는 나름 만나 가르쳐 주기가 싫어서 피했고, 그 대신 가르침이 아니라 처벌을 받아야 할 사람이나 불려오도록 정해진 이런 자리에 나를 끌어다 놓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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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러나 어쨌든, 아테네 시민 여러분,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멜레토스가 이런 일에는 크건 작건 한 번도 마음을 쓰지 않았다는 것이 이제는 분명해졌으니, 그만해 둡시다. 그렇긴 하지만 우리에게 말해 주어야 할 것이 있는데, 멜레토스. 내가 어떤 방법으로 젊은이들을 타락시켰다고 자네는 주장하나? 그야 물론 자네의 고소장을 보면, 내가 그들에게 나라에서 믿는 신들을 믿지 말고 다른 새로운 신령 따위를 믿으라고 가르쳤다는 것이겠지? 자네의 말은, 내가 그런 것을 가르쳐서 그들을 타락시킨다는 것이 아닌가?


-바로 그것이야말로 전적으로 내가 말하려는 것입니다.


- 그렇다면 멜레토스, 우리가 방금 이야기하고 있는 바로 그 신들께 맹세코, 좀 더 분명하게 나와 이 자리의 여러 사람들에게 말해 주게. 왜냐하면 나로서는 자네가 말하는 것이 무슨 뜻인지 모르는 점이 있기 때문일세.

 

그것은, 즉 어떤 신들이 있다는 것을 믿으라고 나도 가르치고 있고, 따라서 나 자신도 어떤 신들이 있다는 것을 믿고 있으니 내가 철저히 신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고, 그 점에서는 나는 죄를 저지른 것이 아니네. 다만 나라에서 믿는 신들을 믿지 않고 다른 신들을 믿고 있다는 바로 그것이 자네가 나를 고발하는 죄이고, 그렇지 않으면 나는 도대체 신들을 믿지 않고, 또 남들에게도 그렇게 가르친다고 자네는 주장하는군.


-그렇습니다. 내가 말하려는 것은 바로 그런 점입니다. 당신은 전혀 신들을 믿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 놀라운 일이로군. 멜레토스, 자네는 무엇 때문에 그런 말을 하지? 그러면 다른 모든 사람이 믿듯이, 해와 달이 신이라는 것을 나는 믿지 않는단 말인가?


-제우스 신께 맹세코 그렇습니다. 재판관 여러분, 그는 해를 돌이라고, 달을 흙이라고 주장합니다.


- 이봐, 멜레토스, 자네는 아낙사고라스를 고발하고 있는 셈이군. 자네는 여기 있는 사람들을 그렇게까지 업신여기고, 이 사람들이 클라조메나이 사람인 아낙사고라스의 책이 이런 말들로 가득 차 있다는 것을 모를 만큼 무식하다고 생각하는가?

 

게다가 젊은이들이 내게서 배우는 것은 어쩌다가 오케스트라에 들러서 고작 1드라크메만 내면 살 수 있는 것인데도, 소크라테스가 만약 그것을 제 것인 척한다면, 더군다나 그것이 해괴한 학설일 경우에는 그를 비웃겠지? 어쨌든 제우스 신께 맹세코, 자네는 나를 그렇게 생각하는가? 어떤 신의 존재도 내가 믿지 않는다는 것인가?


-그렇고말고요. 제우시 신께 맹세코, 당신은 전혀 신을 믿지 않습니다.


- 자네 말은 믿지 못하겠는걸. 멜레토스, 내 생각으로는 아마 자네 자신에게도 믿어지지 않을 걸세. 왜냐하면 이 사람은 내가 보기에는, 아테네 시민 여러분, 매우 건방지고 버릇없는 사람 같고, 바로 이 건방지고 버릇없고 젊은 혈기로 이 고소장을 제출한 것 같기 때문입니다. 그건 이 사람이 수수께끼 같은 것으로 사람을 시험하고 있는 듯싶기 때문입니다.


즉, [지혜로운 사람인 소크라테스는 내가 농담으로 앞뒤가 맞지 않는 말을 할 때, 과연 그것을 알아챌까? 또는 내가 그와 그밖에 다른 청중까지도 속일 수 있을까?] 하는 셈이겠지요. 내가 보기에 이 사람은, 고소장에서 스스로 모순에 빠진 말을 하고 있습니다. 그건 마치 [소크라테스는 신들을 믿지 않으면서, 신들을 믿기 때문에 죄인이다]라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하지만 이건 농담으로나 할 말입니다. 


[참고사항]

1. 의정원 - 아테네 10개의 마을 중에서 각각 50명씩 뽑힌 사람들로 구성되고, 각 부족은 추첨순서에 따라 의사(議事)의 당번이 된다. 국민의회보다 권한이 컸다.


2. 정기적으로 소집되는 입법기관으로, 실권이 없다가 3)솔론의 개혁을 거쳐 차차 유력해졌다.


3. 솔론의 개혁 - 재산 소유 정도에 따라 평민들에게 참정권 부여(=금권정)


4. 아낙사고라스 - 기원전 500-518년까지의 자연철학자, 페리클레스의 손님으로 아테네에서 30년간 있었다.


5. 페리클레스

- 페르시아 전쟁 후 델로스 동맹 맹주. 당시 민주 정치와 문화의 황금시대를 꽃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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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여러분, 그의 그 말이 어째서 내게 그렇게 생각되었는지 나와 함께 살펴 주시기 바랍니다.

 

- 그러나 멜레토스, 자네는 우리에게 대답해 주게.

그리고 여러분께서도 처음에 부탁드린 것을 잊지 마시고, 내가 평소의 버릇대로 말하더라도 소란스럽게 방해하는 일이 없도록 해주시기 바랍니다.

 

- 자 멜레토스, 도대체 이 세상에 사람에게 관계되는 일은 믿으면서 사람이 있다는 것은 믿지 않는 사람이 있을까?

여러분, 그에게 대답을 시키십시오. 그리고 그가 이러쿵저러쿵 계속 떠들어 대도록 그냥 두어서는 안 됩니다.

 

- 이 세상에 말(馬)이 있다는 것을 믿지 않으면서, 말에 관계되는 일은 믿는 사람이 있을까? 또, 피리 부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믿지 않으면서 피리 부는 사람에게 관계되는 일이 있다는 것은 믿는 사람이 있을까?


이 사람아, 그렇게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네. 자네가 대답하기 싫다면, 자네를 위해서도 여기 있는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도 내가 그것을 말하겠네. 그러나 다음의 질문에는 대답해 주게. 즉, 신령에 관계되는 일은 믿으면서, 신령이 있다는 것은 믿지 않는 사람이 있을까?


-없습니다.


- 참 고마운 말일세, 자네가 이 사람들에게 눌려서 억지로라도 겨우 대답을 했으니. 그런데 내가 새것이건 오래된 것이건 그건 어떻든 간에, 신령이 하는 일을 믿고 그 믿음을 가르친다고 자네는 주장하네만,

 

그렇다면 자네 말에 따르면 어쨌든 신령이 하는 일을 믿고 있고, 그것을 자네는 고소장에서도 서약하고 있네. 그러나 만약 내가 신령이 하는 일을 믿는다면, 신령이 있다는 것을 믿는다는 점도 결코 부정할 수는 없는 일일세. 그렇지 않은가?

 

그렇고말고. 자네가 대답을 안 하는 것을 긍정의 뜻으로 받아들이겠네. 그런데 신령이라는 것을 우리는 신들, 또는 신들의 자손이라고 믿고 있지 않은가? 그런가, 안 그런가?


-분명 그렇습니다.


- 그러면 자네가 주장하듯이 내가 신령들을 믿고 있고, 또 그 신령들이 일종의 신들이라면,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자네는 수수께끼를 갖고 농담을 하는 셈이 될 걸세. 즉, 내가 신들은 믿지 않으면서 신령들은 믿고 있는 한, 결국 나는 또다시 신들을 믿는다는 것이 자네의 주장이 되는 걸세.

 

그러나 또 한편, 만약 신령이 신들과 님프나, 또는 전설상의 다른 여신과의 사이에서 태어난 서자라고 한다면, 신들의 자손이 있다는 것을 믿으면서 신들이 있다는 것은 믿지 않는 사람이 이 세상에 있을까?


그것은 마치 말과 나귀 사이에서 태어난 노새가 있다는 것은 믿으면서, 말과 나귀가 있다는 것은 믿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로 이치에 어긋난 것이겠지.

 

그러니 멜레토스, 자네가 이런 고소장을 제출한 것은 틀림없이 우리를 시험해 보려는 것이거나, 아니면 나를 무슨 죄명으로 고소하는 것이 정당할는지 몰라 당황해서 저지른 결과라고 밖에는 생각되지 않네. 자네가 조금이라도 분별 있는 어느 사람에 대해서, 신령에 관계되는 것과 신에 관계되는 것은 믿을 수 있지만, 같은 사람이 신령도 신들도 영웅신도 믿지 않을 수 있다고 설득시키는 것은 절대로 불가능한 일일세.


저는 이 부분에서 진실이란 대전제가 참이어야만 결론도 참으로 이끌어 낼 수 있다는 흔히 제가 아는 지식을 지금 깨달았습니다. 이제껏 난 뭘 배운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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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그러면 아테네 시민 여러분, 내가 멜레토스의 고소장에서 말하는 바와 같은 죄를 저지른 사람이 아니라는 것은 더 이상 변명하지 않아도 되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앞에서도 말한 바와 같이, 나에 대한 숱한 미움이 여러 사람들 사이에서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은 여러분도 잘 아시리라 믿습니다. 그리고 나에게 죄를 씌운다면, 그 씌우는 것은 멜레토스도 아니토스도 아니고 바로 이것,

 

많은 사람들의 중상과 시기인 것입니다.


그것은 이미 많은 선량한 사람들에게 죄를 씌워 왔고, 아마 앞으로도 죄를 씌우게 되리라고 생각됩니다. 그것이 내게서 마지막이 되는 일은 아마 결코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마 이렇게 말하는 사람도 있을는지 모릅니다.


- 부끄럽지도 않은가, 소크라테스? 지금 그대가 죽음의 위험을 무릅쓰는 그런 일로 나날을 보내고 있다니 하고 말입니다.


그러면 나는 당연히 이렇게 대답할 것입니다.


- 자네의 말은 옳지 않아, 이 사람아. 자네가 만약 조금이라도 무슨 쓸모가 있는 사람은 생명의 위험을 고려해야 할 것이고, 그가 일을 할 경우에는 그 행위가 관연 옳은가 그른가, 또는 선한 사람이 하는 일인가 악한 사람이 하는 일인가만을 생각해서는 안 된다면 말일세.

 

 왜냐하면 자네의 논법에 따르면 트로이 성 밖에서 죽은 모든 영웅신들, 특히 테티스의 아들까지도 다 보잘것없는 사람이 될 테니 말일세. 헥토르를 죽일 마음으로 불타고 있는 그에게 여신인 그의 어머니가 타일렀는데도 욕을 당하는 일에다 비하면 이런 위험 따위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일세. 그 여신의 말은, 내 생각으로는 대충 이랬을 걸세.

 

- 내 아들아, 네가 죽은 친구 파트로클로스의 복수를 위해 헥토르를 죽이면 너도 죽게 된다. 헥토르에 이어서 당장 죽는다는 것이 너의 타고난 운명이니까.


그러나 그는 이런 말을 듣고서도 죽음이나 위험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비겁하게 살면서 친구의 복수도 못 하는 것을 오히려 훨씬 더 두려워하면서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 옳지 못한 짓을 한 자에게 벌을 줄 수만 있다면, 당장 죽어도 여한이 없습니다. 제가 살아남아서 땅 위의 짐이 되어, 뱃머리가 굽은 배 옆에서 남의 웃음거리가 되고 싶지는 않으니까요.

- 그대는 설마, 그때 그가 죽음이나 위험을 걱정했다고 생각하지는 않겠지?


아테네 시민 여러분, 그건 사실이 다음과 같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어디 있든지 그곳이 스스로 가장 좋은 곳이라고 믿고서 거기에 있거나, 또는 윗사람이 정해 준 곳이거나 위험을 무릅쓰고라도 거기 머물러야 하며, 죽임이나 그밖에 다른 것은 조금도 염두에 두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보다도 우선 부끄러움을 알아야 합니다.


[참고사항]

1. 테티스 - 그리스 신화 중 바다의 여신

2. 헥토르 - 테티스의 아들 아킬레스와 결전하다가 죽은 인물


그리스.로마 신화를 펼쳐들다가 너무 방대한 분량이라 생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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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테네 시민 여러분, 여러분들께서 뽑아 낸 내 지휘관의 명령으로 배치된 곳에서는 포테이다이아에서든, 암피폴리스에서든, 또는 델리온에서든 다른 많은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이것을 굳게 지키며 죽음의 위험을 무릅썼던 나였습니다.


그러데 내가 믿고 해석하는 바로는, 이제 만약 신께서 나 자신도 남도 검토하여, 지혜를 사랑하면서 살아가야 한다고 명령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죽음이나 그밖의 위험이 두려워서 맡은 곳을 떠난다면 그것이야말로 엄청난 잘못을 저지르는 일이겠지요.


그런 때야 말로 내가 신이 있다는 것을 믿지 않는다는 정당한 이유를 가지고 나를 법정으로 끌어낼 수 있을 것입니다. 나는 신탁을 믿지 않고, 죽음을 두려워하고, 또한 지혜가 없으면서도 지혜가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어찌되었든 죽음을 두려워하는 것은, 여러분, 지혜가 없으면서 지혜가 있는 듯 생각하는 일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모르면서도 안다고 생각하는 일이니까요. 왜냐하면 죽음이란 사람에게 있어 가장 좋은 것인지 아닌지 아무도 모르면서, 마치 그것이 가장 나쁜 것임을 잘 알고 있기나 한 것처럼 두려워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것이야말로 가장 비난받을 만한 무식, 즉 모르는 것도 아는 척하는 무식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그런데 여러분, 나는 이런 점에서도 아마 다른 많은 사람들과는 다를 것이고, 따라서 만약 내가 어떤 점에서 다른 사람들보다 지혜가 있다고 말할 수 있다면, 그것은 나는 저승의 일에 관해서는 잘 모르기 때문에 그대로 모른다고 생각하고 있다는 점을 들 것입니다.


그러나 옳지 못한 일을 행하는 것, 그리고 신에게든 사람에게든 훨씬 선량한 자에게 따르지 않는 것은 악하고 부끄러운 일이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나는 악하다고 알고 있는 그 악 대신에 선일는지도 모르는 것을 결코 두려워하거나 피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여러분은 기억하겠지만, 아니토스는

- 여러분이 애당초 그를 이 법정에 끌어내지 않았었거나, 일단 끌어냈으면 그를 사형에 처하거나 했어야 했는데 그가 이제 와서 풀려 나간다면, 여러분의 자제들은 곧 소크라테스의 가르침을 실행하여 모두들 아주 타락하고 말 것입니다.


라고 주장했습니다. 따라서 비록 여러분이 이제 아니토스의 말을 받아들이지 않고 나를 놓아 준다 하더라도, 여기에 관해서 여러분은 나에게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 소크라테스, 이번에는 아니토스의 말을 듣지 않고 당신을 놓아 주겠소. 그런데 거기에는 이런 조건이 있소. 이제 앞으로 다시는 그런 따지는 생활을 하지 않고, 지혜를 사랑하지도 않는다는 것이오. 만약 또다시 그런 짓을 하다가 잡히면, 그때는 살아남지 못할 줄 아시오.


만약 여러분이 지금 내가 말한 바와 같은 조건으로 나를 놓아 준다 하더라도, 나는 이렇게 대답할 것입니다.


- 아테네 시민 여러분, 나는 여러분에게 깊은 애정을 가지고 있지만 여러분을 따르기보다는 오히려 신을 따를 것이고, 또 목숨이 다할 때까지, 그리고 힘 닿는 데까지 지혜를 사랑할 것이며, 내가 언제 누구를 만나든지 여러분을 타이르고 설득할 것이며, 내가 늘 하는 다음과 같은 말로 가르치는 것을 결코 중단하지 않을 것입니다.


- 이 훌륭한 사람아, 자네는 지혜와 세력에서 그토록 이름 높은 위대한 나라인 이 아테네의 국민이면서 가능하다면 재물이나 많이 차지하고 싶어 하고, 명예나 지위를 얻기에만 마음을 기울이고 있을 뿐 사려라든가 진리라든가 또는 자기의 정신을 훌륭하게 하기에는 마음도 쓰지 않고 걱정도 하지 않는 것을 부끄럽게 생각하지는 않는가? 라고.


그리고 만약 여러분 중에 이것과는 의견을 달리해서, 가지는 그것에 마음을 쓰고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다면, 나는 그 사람을 그냥 놓아 보내지는 않을 것입니다. 나도 그 자리를 뜨지 않고서 그에게 묻고, 따지고, 또 시험하여, 그가 만약 덕을 가지고 있지 못하면서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한 사실이 드러난다면, 가장 귀한 것을 가장 소홀히 생각하고 오히려 가장 보잘 것 없는 것을 귀히 여긴다고 그를 나무랄 것입니다.


나는 노인이건 젊은이건, 딴 나라 사람이건 내 나라 사람이건 만나는 사람마다 그렇게 할 것이고, 더욱이 핏줄이나 나와 가장 가까운 이 나라 사람들에게는 더 말할 것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내가 그렇게 하도록 신께서 명령하시기 때문인데 이 점을 잘 알아 두기 바라고, 또한 당신들을 위해서는 신에 대한 이 봉사보다 더욱 크고 선한 일은 아직 이 나라에 한 번도 없었다고 나는 믿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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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해하지 말기 바랍니다. 아테네 시민 여러분, 아무쪼록 내가 여러분에게 부탁한 것을 지켜서, 소란피우지 말고 조용히 내가 하는 말을 들어 주기 바랍니다. 내 생각으로는, 내 말을 들으면 여러분에게도 도움이 되리라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실은 좀 더 말할 것이 있는데, 아마 그것을 들으면 여러분은 소리를 지르겠지만, 결코 그렇게 하시지 말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이 반드시 알아 두어야 할 것은, 여러분이 만약 나를 사형에 처하면, 나는 이제부터 말하는 바와 같은 사람이기 때문에, 그것은 나보다도 오히려 여러분들 자신을 해롭게 하는 일이 된다는 점입니다.


왜냐하면, 멜레토스도 아니토스도 결코 나를 해롭게 하지는 못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그럴 수 있는 사람이 못 되니까요. 왜냐하면 훌륭한 사람이 그만 못한 사람에게서 해를 입는 일은 허락되지 않는다고 나는 믿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기야 그가 나를 사형에 처하거나 추방하거나, 혹은 시민권을 빼앗거나 할 수도 있겠지요. 그리고 아마 그도 남들처럼 그런 것이 매우 악한 일이라고 생각하겠지요.

그렇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고, 오히려 나에게는 그가 지금 하고 있는 짓, 즉 사람을 옳지 못한 방법으로 죽이려는 일이 더욱 악하게 생각될 것입니다.


그러니 아테네 시민 여러분, 내가 나 자신을 위해서 변명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나는 여러분들을 위해서, 여러분이 나를 범함으로써 신이 여러분에게 주신 선물에 관해서 잘못을 저지르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한 변명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만약 나를 죽인다면 다시는 나 같은 사람을 찾아낼 수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닌게 아니라 -좀 우습게 들릴는지도 모르지만- 나라는 사람은 신이 이 나라에 붙여 놓은 것인데, 이 나라는 마치 덩치가 크고 혈통이 좋은 말과 같이 크고 둔하기 때문에, 깨어 있으려면 무엇인가 따끔한 등에 같은 것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어디든지 따라가서 여러분들과 마주앉아,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을 깨우치기 위해서 온종일 그침없이 타이르고 나무라도록 하려고 신께서 나를 이 나라에 그 등에처럼 붙여 놓은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그러므로 다시는 나와 같은 사람을 찾아 낼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니 여러분, 내 말을 알아듣는다면 나를 아껴 두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아마 선잠을 깬 사람처럼 화를 내고, 아니토스의 말을 믿고서 나를 몰아세워 경솔하게 죽일는지도 모릅니다. 그렇게 되면, 신께서 여러분들을 위해서 누군가 다른 사람을 보내 주시지 않는 한, 여러분들은 남은 생애를 늘 졸면서 보내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내가 바로 신께서 이 나라에 보낸 사람이라는 것은 다음의 사실로 보아서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나는 나 자신의 모든 것을 버리고, 여러 해 동안 집안일을 돌보지 않고서 내버려 둔 채 아무에게나 사사로이 다가가서 마치 아버지나 형처럼, 정신을 훌륭히 하는 데에 마음을 쓰도록 타일렀습니다.


이렇게 언제나 여러분들을 위해 일을 하는 것은, 평범한 인간의 힘으로는 가능한 일 같지가 않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만약 그런 일에서 무엇인가 얻는 것이라도 있고 내 훈계의 댓가라도 받았다고 한다면, 의당 그런 일을 하여야 마땅하겠지요.


하지만 지금 여러분도 보시다시피 나의 고소인들은 다른 모든 일에서는 그렇게도 염치없이 고소를 하면서도, 이 문제에 대해서만은 내가 지금까지 어느 누구에게서 댓가를 받았다거나 요구했다고 증인이라도 내세울 만큼 그렇게까지 염치없지는 않았던 것 같습니다. 그것은 내가 지금 진실을 말하고 있다는 충분한 증거를 제시할 수가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즉, 그것은 다름 아닌 바로 나의 가난입니다. 


19

내가 바삐 돌아다니면서 사사로이 충고를 하고 부질없는 참견을 하지만, 공식석상에 나타나서 나라에 대해서는 충고를 하지 않는 것을 아마 이상하게 생각할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 원인은 이미 여러분이 여러 번 여기저기서 내가 말하는 것을 자주 들은 적이 있는 바로 그것, 즉 나에게 자주 나타나는 일종의 신의 계시라든가 신령스러운 것인데, 그것은 멜레토스도 고소장에다 익살스럽게 적어 놓고 있습니다.


그것은 나에게는 어려서부터 시작된 일로서, 일종의 목소리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것이 나타날 때는 늘 무엇이건 내가 하려는 것을 막으려는 때이며, 결코 무엇을 하라고 권하지는 않습니다. 바로 그것이 내가 정치에 관여하기를 반대하고 있는 이유이고, 그 반대 또한 매우 훌륭하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아테네 시민 여러분, 내가 일찍이 어지러운 정치에 관여하려고 했더라면 틀림없이 벌써 몸을 망치고, 여러분이나 나 자신에게 아무 이로운 일도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내가 진실을 말하더라도 노여워하지 말기 바랍니다.


여러분들에게도 또 다른 많은 사람들에게도 외곬으로 반대해서, 이 나라에서 일어나고 있는 부정과 불법적인 일을 막으려는 사람은 목숨을 오래 부지하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또한 진정 정의를 위해서 싸우려는 사람은, 그가 잠시라도 목숨을 부지하고자 한다면 반드시 사사로이 살아가야 하며, 공적인 사람으로서 처신을 해서는 안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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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여기에 관한 유력한 증거, 말이 아니라 여러분께서 더욱 존중하는 것, 즉 사실을 보여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그러니 내게 일어난 애기를 들어 주시기 바랍니다. 그것은 내가 결코 어느 누구에게도 죽음이 두려워 정의를 어기면서까지 굽히지는 않을 것이지만, 굽히지 않으면 죽게 되리라는 것도 여러분께서 잘 알아주었으면 하는 것입니다.


내가 이제부터 말하려는 것은 법정에서 흔히 듣는 속된 것이긴 하지만, 그래도 그것은 사실입니다.


아테네 시민 여러분, 나는 이 나라에는 지금까지 어떤 공직에도 있었던 일이 없지만, 의정원의 한 사람이 되었던 일은 있습니다. 마침 우리 안티오키스 부족이 의사를 담당할 차례가 되었을 때 여러분은, 10명의 장군들은 그 해전이 끝난 후 파도에 휩쓸린 사람들을 구해 내지 못했다 해서 동시에 재판할 것을 의결했었습니다.


그러나 그후 여러분이 모두 인정했듯이 의원 중에서 오직 나 한 사람만이 여러분에게 반대하여, 국법을 어기는 일을 해서는 안 된다고 반대표를 던졌던 것입니다.


그때 의원들은 나를 당장에라도 고발․구속하려 들었고, 여러분도 그렇게 하라고 소리쳤습니다. 그러나 나는 구속이나 죽음이 두려워서 그릇된 결정을 내리고 있는 여러분과 한패가 되기보다는, 오히려 법률과 정의의 편에 서서 모든 위험을 무릅써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이것은 이 나라가 아직 민주제도 하에 있었을 때의 일입니다.


그러나 과두정치가 행해진 다음에는 이번에 그 [30인의 위원]이 또다시 나와 다른 네 사람을 그들의 토로스로 불러들여, 살라미스 사람인 레온을 죽이기 위해서 살라미스로부터 데려오라고 명령을 내렸습니다. 그들은 될 수 있는 대로 많은 사람을 자기들과 같은 죄로 몰아넣기 위해서, 다른 여러 사람들에게도 그런 명령을 많이 내렸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때도 나는 죽음이라는 말이 그다지 거친 표현이 아니라면 조금도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으며, 결코 부정불의한 일을 하지 않기 위해 나의 온 마음을 기울이고 있다는 것을, 말이 아니라 행동으로 다시 한 번 보여 주었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정권이 강력하긴 했지만, 나에게 부정한 일을 하도록 위협하지는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들이 토로스를 물러나온 다음, 다른 네 사람은 살라미스로 가서 레온을 데려왔지만, 나는 집으로 돌아와 버렸습니다. 그래서 만약 그 정권이 곧 무너지지 않았더라면, 나는 그 일로 인해 아마 죽임을 당했을지도 모릅니다. 이 일에 관해서도 여러분에게 많은 증인을 세울 수 있습니다. 


21

그런데 내가 공직에 있다고 치고, 거기서 선량한 사람답게 일을 하여 옳은 사람을 돕고, 또한 당연한 일이긴 하지만 그런 일을 가장 소중하게 여겼다면, 내가 그러고서도 이렇게 오랫동안 살아남을 수 있었으리라고 여러분은 생각하십니까?


어림도 없는 일입니다. 아테네 시민 여러분, 다른 어떤 사람도 그렇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나는 평생을 통해서 지금과 같은 사람이라는 것이 밝혀질 것이고, 사생활에서도 마찬가지일 것이지만 나는 지금까지 어느 누구에게도, 또는 나를 모함하는 사람들이 내 제자라고 말하는 이들에게도 정의를 어기면서까지 굽힌 일은 결코 없었습니다. 게다가 나는 단 한 번도 어느 누구의 스승인 적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누군가 나 자신이 일삼고 있는 것에 대해 듣고 싶어 한다면 그가 젊은이건 노인이건 누구에게도 그것을 거절한 적이 없었고, 또 돈을 받으면 대답을 하고 안 받으면 대답하지 않은 적도 없으며, 부자이건 가난한 사람이건 누구의 질문에도 나 자신을 내맡길 뿐만 아니라, 내가 질문을 하고 또 원하는 사람이 있으면 그것에 대답하게 하고, 무엇이든 내가 말하려는 것에 관해서 귀를 기울이도록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 중에 누가 잘되건 못되건, 그것을 내 탓으로 돌리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나는 어느 누구에게도 학문을 가르치겠다고 약속한 적이 없고, 가르친 적도 없으니까요. 그런데 만약 어느 누군가가, 다른 사람이 배우거나 듣거나 하지 못했던 무엇인가를 내게서 사사로이 배웠다든가 들었다고 말한다 해도, 그 말은 사실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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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도대체 어째서 사람들은 오랜 시간을 나하고 지내기를 좋아할까요?

여러분은 이미 그 까닭을 들었습니다. 아테네 시민 여러분, 나는 여러분에게 사실을 남김없이 말했으니까요. 즉 그들은 스스로 지혜롭다고 생각하면서도 사실은 그렇지 못한 사람이 검토되는 이야기가 재미있기 때문입니다.


아닌게 아니라 그것은 재미가 있는 것이 당연하지요. 그런데 나로 말하면 신탁이나 꿈을 통해서, 또 그밖에 신의 섭리로 인간에게 무엇이든 하라고 명령하는 모든 전달방법을 통해서, 신으로부터 그렇게 하라는 명령을 받고 있다고 나는 주장합니다.


아테네 시민 여러분, 사실이기도 하려니와, 따져 보기도 쉬운 일입니다. 그것은 내가 과연 어떤 젊은이들을 타락시키고 있거나 또는 이미 다른 사람들을 타락시켰다면, 그들 중에는 장성한 다음에, 자기가 젊었을 때 내게서 무슨 나쁜 권유를 받았다는 것을 깨닫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 사람은 지금 여기 나와서, 나를 고소해서 보복해야 할 것입니다.


또한 자기는 원치 않더라도 그들의 집안의 누군가가, 즉 아버지나 형제나 그밖에 다른 가까운 친척들 중 어떤 사람이 내게서 무슨 화를 입었다면, 이제는 모든 사실을 털어놓고 복수를 해야 할 것으로 압니다. 과연 여기 그런 사람들이 많이 보입니다.

 

우선 나와 동갑이며 같은 동네에 살고 있는 크리토불로스의 아버지인 저 크리톤, 아이스키네스의 아버지이고 스페토스 구의 사람인 리사니아스, 그리고 저쪽에는 안티폰이 있습니다. 그는 에피게네스의 아버지이며, 케피소스 구의 사람입니다. 그밖에도 앞서 말한 방법으로 나와 문답을 즐겼던 사람들의 형제가 저쪽에 보입니다.


테오조티테스의 아들이며 테오도토스의 형제간인 티코스트라토스-테오도토스는 이미 죽었으니까. 그가 이 사람에게 부탁해서 고소를 못 하게 했을 리는 없습니다.- 그리고 또 여기에 데모도코스의 아들이며 테아게스와 형제인 파랄리오스, 또 아데이만토스가 있습니다. 그는 아리스톤의 아들이며, 그와 형제가 되는 저기 있는 플라톤, 그리고 여기 있눈 아폴로도로스, 또 그와 형제간인 아이안토도로스도 와 있습니다.


이밖에도 나는 여러분에게 많은 사람을 들 수 있는데, 멜레토스는 그의 변론 가운데서 이들 중의 누군가를 증인으로 내세워야 옳았을 것입니다. 만약 그때 잊었다면, 지금이라도 그들을 내세워야 합니다. -내가 자리를 비켜 줄 터이니-무엇인가 그런 증거가 있거든, 그가 말하도록 하기 바랍니다.


그러나 여러분 이와 전혀 반대되는 것을 발견할 것입니다. 여러분, 멜레토스나 아니토스가 주장한 바와 같이, 그들을 타락시키고 그 친척들에게 해를 끼치는 나는, 실은 모두를 도우려고 온 것입니다. 해를 입은 사람들 자신에게는 나를 도울 만한 그 나름의 이유가 있을는지는 모릅니다. 그러나 해를 입지도 않고 이미 나이도 든 그들의 친척들이 나를 도우려고 한다면 거기에는, 나는 진실을 말하고 멜레토스는 거짓을 말하고 이TEk는 srjt을 잘 안다는, 옳고 바른 이유밖에는 다른 또 무슨 이유가 있겠습니까?


23

자, 여러분, 그건 그렇다고 합시다. 내가 변명할 수 있는 것은 이 정도이고, 설령 더 말한다 해도 아마 이와 같을 것입니다. 하기야 여러분 중에는 스스로 한 일이 생각나서 아마 기분이 상한 사람도 있겠지요. 그는 이보다 작은 송사에 걸려들었어도 숱한 눈물을 흘리면서 재판관들에게 애걸복걸하고, 조금이라도 더 동정을 얻기 위해 자기의 애들, 친척, 친구들을 많이 끌어들였을 겁니다.

 

 그러나 나는 이렇게 크나큰 위험을 당하고 있으면서도, 조금도 그런 짓은 하려 들지 않습니다. 그러다보니 아마 이런 일이 생각나서 자신에 대해 울화가 치밀어 바로 그 일로 인해 화를 내고, 홧김에 유죄투표를 할 사람도 있을는지 모릅니다.


만약 여러분 중에 과연 그렇게 마음먹은 사람이 있다면 -그런 사람이 있다고 믿지는 않지만, 만약에 있다면- 그에게는 이렇게 말해도 좋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 여보시오, 나에게도 가족이 몇 있습니다. 호메로스의 말에도 있듯이 [나무나 돌에서 태어난 것이 아니고] 나도 사람에게서 태어났으니, 가족도 있고 아들도 있습니다. 아테네 시민 여러분, 나에게는 아들이 세 명 있는데, 한 애는 이미 장성했지만, 두 애는 아직 어립니다. 그러나 어느 한 애라도 여기 데려다가 여러분에게 무죄가 되기 위한 토표를 애걸할 생각은 없습니다.- 라고. 그러면 어째서 나는 그 어느 한 가지도 하려고 하지 않을까요?


그것은 내가 고집이 세서 그런 것도 아니고, 아테네 시민 여러분을 업신여겨서 그런 것도 아닙니다. 내가 죽음 앞에서 태연한지 그렇지 않은지는 그만두고라도 체통이라는 것을 생각한단면, 정말이건 거짓말이건 내가 그런 명성을 가지고 있다면 이 나이에 그런 짓을 한다는 것은 나나 여러분이나, 또 나라 전체를 위해서나 절대로 옳다고 생각되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여러분 중에 지혜나 용기나 또는 그밖에 어떤 덕성에서든지 남보다 뛰어났다고 생각되는 사람들이 그런 몰골이라면, 그건 창피한 일일 겁니다. 나는 이렇다 하는 인물이라고 생각되는 사람이, 막상 재판을 받게 될 때는 여러분이 사형에만 처하지 않는다면 영영 죽지 않을 것처럼, 사형이라는 것을 무슨 큰일이나 되는 듯이 생각해서 비굴하게 구는 것을 여러 번 보았습니다.


내가 보기에는 이런 사람들은 이 나라를 욕되게 하는 사람들이며, 그리고 외국인들이 보기에도 우리 아테네 사람 중에 훌륭한 덕성을 지녀서 국민들이 나라의 중요한 벼슬이나 그밖의 영광스런 자리에 그들을 뽑아 놓았다 해도, 부녀자나 조금도 다름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아테네 시민 여러분, 다소라도 명성을 가지고 있는 것이라면 그런 짓을 해서는 안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도 만약에 우리가 그렇게 한다면 그대로 내버려 둬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그런 불쌍한 연극을 해서 이 나라를 웃음거리로 만드는 사람은, 태연하게 있는 사람 보다 훨씬 무거운 벌로 다스린다는 것을 똑똑히 보여 주지 않으면 안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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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테네 시민 여러분, 여러분이 내게 유죄투표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내가 이 결과를 억울하게 느끼지 않는 데에는 내 나름대로 여러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더욱이 결과가 이렇게 되리라고 짐작 못 했던 것은 아니지만, 오히려 더한층 이상스러운 것은 여기 나타난 양편의 표수입니다. 왜냐하면 나는 이렇게 표수의 차가 적을 줄은 몰랐으며, 더 큰 차가 있으리라고 예상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제 만약 30표만이라도 반대편으로 갔더라면, 나느 san죄가 되어을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멜레토스에 대해서만은 지금도 전적으로 무죄가 되고 있다고 생각하며, 무죄일 뿐만 아니라 어쨌든 누구에게나 분명한 일이지만, 만약 아니토스와 리콘이 나를 고발하러 여기에 나타나지 않았더라면, 나는 무죄가 되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멜레토스에 대해서만은 지금도 전적으로 무죄가 되고 있다고 생각하며, 무죄일 뿐만 아니라 어쨌든 누구에게나 분명한 일이지만, 만약 아니토스와 리콘이 나를 고발하러 여기에 나타나지 않았더라면, 그는 표수의 5분의 1도 얻지 못했을 것이기 때문에 1천 드라크메의 벌금을 물어야 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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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그런데 이 사람은 내게 대해서 사형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좋습니다. 아테네 시민 여러분 ,그 대신 나로서는 여기에 대해서 무슨 형을 제의해야 합니까? 물론 내게 맞는 형량이라야 하겠지요.


그러면 그건 무엇이겠습니까? 내가 평생을 가만히 있지 않았다고 해서, 그리고 내가 흔히들 마음을 쓰고 있는 돈벌이라든가, 살림이라든가, 근대의 지휘라든가, 정치활동이라든가,

 

그밖의 모든 벼슬자리라든가, 나라에서 생기고 있는 파벌이나 당파에 무심했다고 해서, 말하자면 이런 일들에 관여하면서 목숨을 부지하기에는 내가 진정 너무나 선량하다고 스스로 생각하고 있다고 해서 내가 무슨 형을 받고 무슨 댓가를 치러야 마땅하단 말입니까?


나는 여러분에게나 나 자신에게나 아무 도움도 안 된다고 생각된 곳에는 절대로 가지를 않았고, 각 사람에게 개인적으로 가장 성한 일을 할 수 있다고 생각된 곳에만 갔었던 것입니다.

 

 즉, 나는 여러분들이 무엇이든 자기에게 소해 있는 것들에 마음을 쓰기에 앞서 우선 자기 자신에게 마음을 써서 될 수 있는 한 선량하고 사려 깊은 사람이 있도록, 그리고 나라에 속해 있는 것에 마음을 쓰기에 앞서 먼저 나라 자체에 마음을 쓰도록, 또한 그밖의 다른 것에도 이와 같이 마음을 쓰도록 여러분 중의 각 사람을 설득시켜 보려고 마음먹었던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goTEjs 나는 대체 무엇을 받아야 마땅하단 말입니까?

내가 참으로 합당한 판결을 받아야 한다면, 아테네 시민 여러분, 그것은 무엇인가 좋은 것이라야 합니다. 게다가 그것은 내게 알맞은, 그런 좋은 것이라야 합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을 훈계하기 위해 시간적 여유를 필요로 하는, 한 사람의 가난한 선행자에게 알맞은 것은 무엇입니까? 그런 사람에게는, 아테네 시민 여러분, 영빈관에서 음식을 대접하는 일이 가장 알맞을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그것은 여러분중의 누군가가 올림픽 경기에서 승마로, 또는 두 필이나 네 필의 마차 경기에서 우승했을 때에 받는 것보다 훨씬 더 합당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는 여러분으로 하여금 행복한 듯이 여기게 해줄 뿐이지만 나는 실제로 여러분을 행복하게 해주며, 게다가 그에게는 음식의 대접이 필요없지만 나에게는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내가 만약 정당히 받아야 할 것에 따라서 적합한 대우를 받아야 한다면, 나는 영빈관에서 접대를 받아야 마땅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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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말하면, 아마 여러분들은 앞서 내가 동정을 받기 위한 탄원에 관해서 말했을 때와 마찬가지로 고집을 부려서 그런 말을 하고 있는 듯이 생각하실 겁니다. 그러나 그런 것은 아닙니다. 아테네 시민 여러분, 실은 이런 뜻입니다. 나는 어떤 사람에게도 결코 공의로 나쁜 일을 한 적은 없다고 확신하고 있으나, 단지 여러분에게 그렇게 확신시키지 못하고 있을 뿐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서로 이야기를 나눈 시간이 너무나 짧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내 생각으로는, 다른 나라에서처럼 사형에 관한 재판은 하루가 아니라 여러 날에 걸쳐서 해야 한다는 법률이 있었더라면, 아마 여러분에게 확신시킬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이렇게 짧은 시간에 그렇게 크나큰 중상을 제거하기란 쉽지 않은 일입니다.


그러나 나는 아무에게도 옳지 못한 짓을 하지 않았다고 믿고 있기 때문에, 나 자신이 어떤 피해를 입으리라고는 생각하지도 않습니다. 내가 무엇 때문에 그러한 피해를 받아야만 합니까? 도대체 무엇이 두려워서 그렇게 해야 한단 말입니까? 나 스스로가 그것이 좋은지 나쁜지 모른다고 말하면서도, 내게 대한 멜레토스의 구형을 당하기가 두려워서일까요?

 

그런 것 대신에 무엇인가 나쁘다고 생각되는 것을 스스로 택해서, 그것을 구형해 달라고 제의해야 할까요? 구류는 어떨까요? 그렇다면 나는 어째서 그때그때의 관리, 즉 열 한 사람의 관리의 노예가 되어서 살아가야 합니까? 오히려 벌금형을 제의하고, 그것을 치를 때까지 구금되어 있어야 할까요?


그러나 지금은 방금 내가 말한 것과 같은 일입니다. 나에게는 치를 돈이 없으니까요. 그러면 나라 밖으로 추방하는 형벌은 어떻겠습니까? 아마 여러분들은 그렇게 구형할는지도 모르지요.

 

 그러나 여러분들은 나와 같은 국민인데도, 아테네 시민 여러분, 내가 늘 하는 일과 말을 참을 수가 없어서, 지금 여러분이 거기서 벗어나려고 하는 것을 모를 만큼 내게 사리를 분간하는 힘이 없다면, 나는 삶에 대한 애착이 너무나 강하다고 할 것입니다. 그런데 다른 나라 사람이라면 그것을 쉽사리 참아 줄까요? 그건 어림도 없는 일입니다.


아테네 시민 여러분, 내가 이 나이에 추방당한 신세가 되어 이 나라 저 나라로 떠돌아다니면서 쫓기는 생활을 한다면, 그건 내게는 멋진 생활이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내가 여기서도 가는 곳마다 젊은 사람들이 그랬듯이 모든 나라 젊은이들이 내 말에 귀를 기울여 줄 것을 나는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내가 만약 그들을 쫓아 버린다면, 이번에는 그들 편에서 어른들을 설복시켜 나를 쫓아낼 것입니다. 그러나 내가 그들을 쫓아 버리지 않는다면, 그들의 아버지나 가족들이 그 젊은이들을 위해서 나를 쫓아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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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아마 이렇게 말할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 우리에게서 떠나거든, 소크라테스, 제발 입 좀 다물고 조용히 살아갈수 없겠느냐?

고. 그런데 바로 여기에 당신들 중의 어떤 사람을 설복시키기에 가장 어려운 점이 있습니다. 내가 만약 그것은 신을 거역하는 일이라서 조용히 있을 수가 없다고 말한다해도, 여러분들은 곧이듣지 않고 농담이나 하고 있다고 생각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덕이나 그밖의 것들에 관해서 날마다 이야기하는 것이 사람에게는 최대의 선이며, 그런 것들에 관해서 내가 문답하면서 나와 남들에게 따지고 있느 srjt을 여러분이 듣고 있는데, 이와 반대로 따져 보지 않는 생활이란 사람으로서 사는 보람이 없는 것이라고 내가 말한다 해도, 여러분은 더욱더 그 말을 곧이듣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내가 말한바와 같습니다.


여러분, 다만 여러분을 그렇게 믿도록 하기가 쉽지 않은 것 뿐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나로서는 내가 무슨 해로운 일을 당할 만하다고 생각하는 일에는 조금도 익숙하지가 않습니다. 그런데 내게 만약 돈이 있다면, 치를 수 있을 만한 벌금형을 제의했을지도 모릅니다. 내가 그것 때문에 해를 입는 일은 없을 테니까요.

 

그러나 지금은 그렇지가 않습니다. 내겐 그런 돈이 없기 때문입니다. 하기야 여러분이 내가 낼 수 있을 만큼만 벌금을 매기면 몰라도. 아마 은 1므나 정도라면 낼 수 있겠지요.

 

그러므로 나는 그만한 벌금을 제의하겠습니다.


그런데 아테네 시민 여러분, 여기 있는 플라톤과 크리톤과 크리토불로스와 아폴로도로스는 30므나를 제의하라고 내게 권하면서, 자기들이 그 보증인이 되겠다고 합니다. 그래서 나는 그만한 벌금을 제의합니다. 여기 이 사람들이 여러분들에 대해서, 그만한 은화의 믿을 만한 보증인이 될 것입니다.



29

길지도 않은 시간 때문에, 아테네 시민 여러분은 이 나라를 욕하고 싶어하는 사람들에게서 지혜로운 사람 소크라테스를 죽였다는 악명과 책망을 듣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욕하고 싶어하는 사람들은, 비록 실제로는 그렇지가 않다 하더라도 나를 지혜로운 사람이라고 말할 것이니까요-


만약 여러분이 조금만 더 기다렸다면 저절로 여러분이 바라는 대로 되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여러분도 잘 알고 있다시피, 나는 이미 오래 살았기 때문에 죽을 날도 날도 멀지 않았습니다. 물론 여러분 전부에게 이렇게 말하는 것은 아니고, 내게 사형투표를 한 사람들에게만 하는 말입니다. 그 사람들에게는 또 한마디 할말이 있습니다.


아테네 시민 여러분, 무죄가 되기 위해서는 무슨 짓 무슨 말이든지 해야 한다고 내가 생각했었더라면 아마 여러분은 여러분을 설복시킬 만한 그런 말이 모자라서 유죄가 되었다고 생각하겠지요.

 

그러나 그것은 당치도 않은 말씀입니다. 다만 무엇인가 모자라서 유죄가 되긴 하겠지만, 그것은 말이 모자라서가 아니라 후안과 무치와, 그리고 여러분의 비위에 맞도록 말할 생각이 모자랐기 때문입니다.


나는 눈물을 흘리거나 울부짖거나 하지도 않으며, 또한 그밖에 여러 가지 나답지 않다고 내가 주장하는 그런 일, 그리고 여러분이 다른 사람들에게서 흔히 들어오던 그런 일들은 행하지도 않고 말하지도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앞서도 나는 위험에 처했다고 해서 어떤 천한 짓을 해도 좋다고 생각하지는 않았고, 지금도 그렇게 변명한 것을 뉘우치지는 않으며, 오히려 나느 달리 변명하고서 살기보다는 이렇게 변명하고서 차라리 죽는 편이 훨씬 낫다고 생각됩니다. 그것은 법정에서나 싸움터에서나 무슨 짓을 해서든지 죽음을 면하려고 꾀를 부리는 것은, 나는 물론 누구든지 해서는 안 될 일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사실 싸움터에서도 무기를 버리고, 또 뒤쫓는 적에게 애걸해서 쉽게 죽음을 면하는 일이 많은 것은 분명합니다. 그래서 어떤 위험 속에서도, 무슨 짓이든 무슨 말이든 할 생각만 있다면, 죽음을 면하는 길은 그밖에도 얼마든지 있습니다. 여러분, 죽음을 면하기란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그보다는 오히려 비굴함을 면하기가 훨씬 더 어렵습니다. 그것은 죽음보다 더 빨리 달리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번에도 나는 느리고 늙어서 더욱 느린 죽음에 잡혔고, 나를 고발한 사람들은 영리하고 빠르기 때문에 더욱 빠른 것, 즉 악에 잡히고 만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나는 여러분으로부터 사형선고를 받고 이 자리에서 물러나려고 하지만, 여러분은 진리로부터 악과 부정의 선고를 받고 물러나는 것입니다. 나도 이 판결에 따르고, 여러분들도 역시 그 판결에 따라야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아마 그럴 수 밖에 없었겠고, 그래도 좋다고 나는 생각합니다.



30

그러면 다음에는 나에게 유죄투표를 한 여러분, 나는 여러분에게 예언해 두고 싶습니다. 왜냐하면 이제는 나도 사람이 가장 잘 예언하는 바로 그 계제, 즉 죽을 계제에 와 있기 때문입니다. 나에게 사형의 판결을 내린 여러분, 나는 말하거니와, 나를 죽인 바로 다음에는 여러분은 내게 내린 사형보다, 제우스 신께 맹세코, 훨씬 더 괴로운 벌을 받게 될 것입니다.


왜그런고 하니, 여러분은 지금 여러분의 생활을 따지는 일에서 벗어나고 싶어서 이렇게 하겠지만, 그러나 그 결과는 전혀 반대가 될 것이라고 나는 확신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에게 따지려 드는 사람은 더욱 많아질 것이며, 여러분은 잘 모를테지만 지금까지는 내가 그들을 막아 왔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젊기 때문에 더욱 사나와져서, 여러분은 괴로움을 당하게 될 것입니다. 만약 여러분이 사람을 죽임으로 해서 여러분의 생활이 옳지 못하다는 남의 책망을 막을 수 있으리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훌륭한 생각이 못 됩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벗어난다는 것은 결코 가능한 일도 아니려니와 훌륭하지도 못하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가장 훌륭하고 가장 쉬운 길은, 남을 억누르기보다는 될 수 잇Sms 데까지 스스로 선하도록 힘쓰게 하는 일입니다. 내게 사형을 투표한 여러분에게는 이 정도 예언하고 여러분과 이만 작별하렵니다.



31

그러나 담당직원들에게는 아직 볼일이 남아 있고, 나도 죽을 자리에 가기 전에 여기서 일어난 하나하나의 일들에 관해서, 내게 무죄투표를 해준 사람들과 얘기를 나누고 싶습니다. 어쨌든 여러분, 그 동안만 함께 있어 주시기를 바랍니다.


허락된 시간 동안에 서로 터놓고 이야기를 나누는 것은 아무 지장도 없으니까요. 왜냐하면 나는 여러분을 친구로 여기므로 지금 내게 일어난 일이 도대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밝혀 주고 싶기 때문입니다.


재판관 여러분 -여러분이야말로 우리가 재판관이라고 부르기에 가장 합당한 분들이니까요-나에게 있어 참으로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그것은 내가 평소에 흔히 듣는 그 신령스럽고 예언적인 알림이라는 것이 지금까지의 내 일생을 통해서 매우 자주 들려왔으며, 내가 하려는 일이 옮지 못할 경우에는, 극히 작은 일이라 할지라도 반대를 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뭔가 여러분도 직접 보아서 아는 바와 같은 일이 나에게 일어났으며, 이것이야말로 사람들이 가장 큰 재앙이라고 생각할는지도 모르는 일이고, 또 흔히 그렇게들 믿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내가 오늘 아침에 집에서 나올 때도, 여기 와서 이 법정으로 들어서려고 했을 때도, 또 변론에서 내가 무엇인가를 말하려고 했을 때에도 신은 결코 행동에 반대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다른 경우에는, 한창 얘기하고 있는 도중에도 내 말을 중간에 자주 가로막고는 했었습니다. 그러나 이번의 이일에 관해서만은, 행동에서나 말에서나 결코 반대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그 까닭을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내가 생각하고 있는 것을 여러분에게 말하겠습니다. 이번에 나에게 일어난 일은 아마 좋은 것인 듯싶고, 그리고 죽는 것을 나쁜 일이라고 생각한다면 그 모든 생각은 결코 옳지 않습니다.


그 큰 증거는 내게 일어난 일입니다. 내가 이제부터 뭔가 나에게 일을 하려고 하지 않았더라면, 늘 있는 그 예감이 반대하지 않았을 리가 없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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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그것이 좋은 것이라는 희망을 가질 만하다는 것을 달리 한번 생각해 보기로 합시다. 죽음이란, 다음의 둘 중 하나입니다. 즉, 아무것도 아닌 없는 것이라서 죽은 사람은 전혀 감각도 없거나, 또는 전해 내려오는 말처럼 영혼이 여기서 다른 곳으로 마치 자리를 바꿔서 옮아 사는 일 같은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만약 아무 감각도 없어서 꿈 한번 꾸지도 않는 잠 같은 것이라면, 죽음은 놀랄 만한 이득일는지도 모릅니다. 왜냐하면 만약 사람이 꿈도 꾸지 않을 만큼 깊이 잠들었던 밤을 골라내서,

 

 그 한 밤과 그의 일생 중의 다른 모든 밤낮과 비교해 보고 깊이 생각한 다음 평생에 몇 낮 몇 밤을 그 한 밤보다 더욱 좋게, 더욱 즐겁게 지냈는지 말해야 한다면, 그런 밤낮은 보통 사람뿐만 아니라 대왕 자신조차도 다른 밤낮과 비교해서 겨우 손꼽을 정도밖에는 찾아내지 못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죽음이 과연 이런 것이라면, 나는 그것을 이득이라고 말합니다. 그 시간 전체는, 이렇게 본다면 하룻밤보다 더 길지 않게 생각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다른 편, 죽음이라는 것이 이곳에서 다른 곳으로 옮아 사는 것이고, 따라서 죽은 사람은 다 그곳으로 간다는 말이 사실이라면, 재판관 여러분, 이 보다 더 좋은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아닌게 아니라 이승에서 스스로 재판관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에게서 벗어나, 저승에서 재판을 하고 있다는 참다운 재판관들 미노스, 라다만티스, 아이아코스, 트립톨레모스, 그리고 그밖에 그들의 일생에서 정의로왔던 영웅신들을 찾아낸다면, 그렇게 옮아 사는 것이 과연 보잘것없는 일일까요?


또는 오르페우스나 무사이오스나 헤시오도스나 호메로스를 만나기 위해서라면 아무리 큰 대가라도 치르려는 사람이 여러분 중에 있을 것이 아닙니까?


과연 그 말이 사실이라면, 나는 몇 번을 죽어도 좋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나 자신에게도 그곳에서 지내는 일은 멋진 일일테니까요. 즉, 팔라메데스라든가, 텔라몬의 아들인 아이아스라든가, 그밖에도 옳지 못한 재판으로 죽은 옛사람들을 만나서 내가 겪은 것과 그들이 겪은 것을 비교해 본다면, 생각건대 그것은 즐겁지 않은 일도 아닐 것입니다.

 

 더욱이 가장 큰 즐거움은, 이승사람들을 그렇게 했듯이 저승사람들도 그들 중의 누가 지혜롭고, 누가 지혜로운 척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은지 묻고 따져 보면서 지내는 일입니다.


재판관 여러분, 저 트로이에 대군을 거느리고 간 사람이라든가, 오딧세우스라든가, 시쉬포스라든가, 또는 그밖에도 수많은 남녀의 이름을 들 수 있겠지만, 그런 사람들을 따져 볼 수 있다면, 그렇게 하기 위해서 사람들은 굉장히 큰 대가를 치러야 할 것입니다. 그곳에서 그들과 문답하고 가까이하고, 따져 보는 것은 무한한 행복이 아닐까요. 어쨌든 그곳 사람들은 그것 때문에 죽이는 일이란 결코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곳 사람들은 다른 점에서도 이곳 사람들보다 행복하지만, 사람들의 말이 과연 옳다면, 특히 앞으로의 삶은 이미 죽음이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재판관 여러분, 여러분도 죽음에 대해서 좋은 희망을 품어야 하고, 또 이 한 가지만은 참된 일로서 가슴에 새겨두어야 합니다. 즉, 선량한 사람에게는 살아서도 죽어서도 나쁜 일은 일어나지 않고, 또한 심들께서도 그의 어떤 일에든 무심하시지 않다는 것입니다.

 

지금 내게 일어난 일도 까닭이 없는 것은 아니고, 오히려 지금 죽음으로써 성가신 일을 면하는 편이 나로서는 분명히 더욱 좋은 일입니다. 그래서 신의 계시도 결코 나를 막지 않았고, 또한 나로서는 나를 유죄라고 투표한 사람들이나 고발인들에게 격분할 마음도 없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런 생각에서 유죄투표를 하거나 고발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들은 책망을 들어 마땅합니다. 그런데 한 가지만 그들에게 부탁할 것이 있습니다. 만약 여러분들 생각에,

 

내 자식들이 장성해서 덕성보다도 재산이나 그밖의 것에 더 마음을 쓰는 듯하거든, 내가 여러분을 괴롭힌 것과 똑같이 그애들을 괴롭혀서 보복을 해주기 바랍니다. 또 그애들이 만약 아무것도 아니면서 마치 무엇이나 되는 것처럼 생각하거든, 내가 여러분을 나무랐듯이,

 

- 마음을 써야 할 데에 마음을 쓰지 않고 또 아무 값어치도 없으면서 무엇이나 되는 것처럼 생각하고 있다

 

고 그들을 꾸짖어 주기 바랍니다. 여러분이 그렇게 해준다면, 나도 내 자식들도 여러분에게서 정당한 대접을 받은 셈이 될 것입니다.


하지만 이미 떠날 때가 되었군요. 나는 죽이 위해서, 여러분은 살기 위해서. 그러나 우리들 중에 어느 편이 더욱 좋은 일을 만날는지, 그건 신 외에는 아무도 모릅니다.


1] 대왕

페르시아 왕을 말한다. 그리스에서는 세속적 행복의 대표적 인물이라고 생각되고 있었다.

 

2] 미노스, 라다만티스, 아이아코스, 트립톨레모스

미노스는 크레타 섬의 왕, 라다만티스는 그의 아우, 아이아코스는 아이기나 섬의 입법자, 트립톨레모스는 농사일의 반신으로서 모두 생전에 현명하고 경건한 생활을 했으며, 저승에서는 죽은 자의 재판관이 되었다 한다.


 


[참고]

1. 크리톤

소크라테스에게 헌신적이었던 친구. [크리톤]에 보면 그는 소크라테스에게 도망갈 것을 권했고, [파이돈]에 보면 소크라테스의 임종시 그의 눈을 감겨 주었으며, [에우테데모스]에 보면 소크라테스의 대화의 상대로 등장한다.


2. 아이스키네스

역시 소크라테스의 헌신적인 측근으로, 소크라테스의 임종을 지켜본 사람 중의 하나이다.


3. 데모도코스

역시 소크라테스의 임종을 지켜본 사람이다.


4. 플라톤

[테아게스]에 보면, 데모도코스는 소크라테스보다 나이가 많고, 극정의 최고위층에 있었던 걸로 되어 있다.


5. 아폴로도로스

소크라테스의 측근의 한 사람으로, 그의 열렬한 숭배자이다. [향연]에서는 얘기를 전해 주는 사람으로 등장하고, [파이돈]을 보면 소크라테스의 임종을 지키며 매우 애통해 했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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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kevin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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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번호 514372 | 2009.01.18 IP 118.223.***.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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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kevin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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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경제토론 프랑스 혁명과정에서 상-퀼로트(민중 세력)의 역할
  • 리어왕 리어왕님프로필이미지
  • 번호 514929 | 2009.01.18 IP 118.223.***.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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Ⅰ. 서론

 

1789년 프랑스 대혁명은 다양한 계급의 제 혁명을 포괄하는 하나의 복잡한 대사건이었다. 오늘날 프랑스 대혁명은 궁극적으로 부르주아 혁명으로 평가되는데 그것은 혁명적 부르주아지가 혁명을 주도하였으며 이후의 세기에서 부르주아지의 전반적 성장을 위한 길을 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프랑스 혁명에서의 부르주아지의 역할을 평가함에 있어, 이들의 권력 획득을 가능하게 하였던 비부르주아적인 요소들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1789년 영주제적 제 권리의 폐지 선언을 낳았던 농민층의 봉기와 더불어, 도시민중을 대표하는 상-퀼로트의 도움이 없었다면 부르주아지는 귀족계급 타도에 결코 성공하지 못했을 것이다.

 

상-퀼로트는 혁명초기부터 열성적으로 혁명에 참여하고 있었으며 또한 혁명적 부르주아지의 확고한 지지 세력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혁명의 진행 과정을 통해 획득된 정치적 경험과 구단위의 다양한 기본조직들을 통해 혁명적 사상들을 접하게 됨에 따라 상-퀼로트는 점차 자체내의 고유한 성향을 발전시키게 되었고 상-퀼로트 투사들을 배출하게 되었다. 이와 같은 상황은 혁명의 실천방법을 둘러싸고 상-퀼로트와 자꼬뱅의 충돌을 가져오는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프랑스 혁명에서의 민중이 혁명하 서술의 장에 등장한 것은 19세기 중반 J.미슐레를 통해서 였으며 민중에 대한 연구는 20세기에 들어와 더욱 본격화되었다. 그 중 조레스로부터 시작하여 A.마띠에, A.소불 등으로 그 맥이 이어지는 이른바 정통주의적 해석은 "위로부터의" 연구경향이 아닌 "밑으로 부터의" 연구를 진행시켰다. 이들과는 달리 D.게렝은 마르크스주의 경향하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정통중의 사가와는 아주 판이한 연구시각을 가진다는 점에서 독특하다.

 

또 이 밖에 상-퀼로트 운동을 프랑스 혁명에서의 이탈로 보는 수정주의적 흐름도 있다. 이 수정주의적 경향은 앞서 언급한 정통주의 사가들이 프랑스 혁명의 사회·경제적 측면에 치중하여 다소 소홀히 하였던 정치사적인 측면과 혁명과정에서 드러난 부르조아지 내부의 갈등이라는 측면에 주의를 돌리게 했다는 점에서 그 의의를 찾을 수 있다.

 

 그러나 이들은 서구의 제 혁명들과 구분되는 프랑스혁명의 독특한 측면과 전형적인 부르주아 혁명으로서의 프랑스 혁명의 성공을 가능하게 하였던 보조적인 제 요소들을 무시했다는 비판을 면할 수 없다. 수정주의자들에게 민중의식은 발전하지 않는 것이었고 민중운동은 자체내의 목표를 가지지 못하고 단지 사회적 위기에 의해 가속화된 우연적인 사건에 불과한 것이었다.

 

그러므로 수정주의적 연구시각에 근거한다면 혁명정부의 수립과정에서 보여지는 상-퀼로트와 자꼬뱅 부르주아지 사이의 정치적 대립을 설명할 수 없게 된다. 따라서 본 논문에서는 프랑스 혁명에 대한 다양한 연구시각 중 정통주의적 해석에 근거하여 논의를 전개시키고자 한다.

 

프랑스 혁명은 시민계급에 의한 단일혁명관(單一革命觀)을 부정하고 프랑스 혁명을 부르조아지내의 다양한 복합적 혁명이며, 소불과 뤼데는 도시내의 하층민의 상퀼로트에 관심을 가지고, 이들이 혁명이 발전되어 가면서 점차적으로 부르조아지내에서 계급분화를 거쳐 혁명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따라서 프랑스 혁명에 있어서 상퀼로트에 대한 성격과 위치 등을 파악하는 것이 혁명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둘 수 있다.

 

따라서 본 논문에서는 혁명의 전개과정 중에서 가장 중요한 시기인 구제도(舊制度) 말기인 1787년부터 테르미도르반동에 의해 로베스피에르의 혁명정부(革命政府)가 몰락한 시기인 1794년까지 기간 동안에 전개된 상퀼로트운동에 대하여 사회·경제적측면에서 고찰하고자 한다.

 

Ⅱ. 구제도 말기 상퀼로트의 불만과 저항


 

프랑스 대혁명은 대표적인 시민 혁명으로서 그 깊은 원인은 혁명 전의 프랑스 사회, 즉 구제도의 모순에 있었다. 귀족적·봉건적 성격의 정치·경제·사회적 불평등이 만연된 절대주의(絶對主義) 체제와 특히 신분제도의 모순이 심했다.

 

신분제는 소수의 특권층인 제 1신분 성직자[10만, 전국토의 1/10 소유, 영주로서 봉건지대(封建地代)를 받고 모든 농산물에 1/10세 증수]와 제 2신분 귀족[40만, 혈통귀족(血統貴族)인 대검귀족(帶劍貴族; Nobless d' epee)은 전국토의 1/5의 넓은 토지를 소유하고 농민으로부터 지대를 받거나

 

정부나 군대의 요직에 앉아 연금을 받고, 부유한 부르조아지 출신으로 관직을 매입하여 귀족이 된 법복귀족(法服貴族; Nobless de la robe) 도 점차 혈통 귀족과 거의 같은 사회적 지위를 누림]이 모든 특권을 향유하였으며, 막대한 토지를 소유하고, 교회·군대·정부 요직 차지, 면세 특혜를 누렸으며

 

제 3신분 [①농민은 총인구의 3/4로서 자본가적인 농업 경영가·자영농(라부레르)·소작농·절반소작농(折半小作農; metayer)·영세농·농업노동자 등으로 구성되었으며 봉건적 공납 및 과중한 세금(지세인 타세 같은 간접세에 그 수입의 절반을 빼앗겼다. 정부는 7세 인상은 1년에 일정량 이상의 소금을 사도록 강요하였는데, 정부염은 실제 시세의 10배였다.

 

염세(鹽稅) 때문에 매년 30,000명 이상이 투옥되고 500명 이상이 처형되었다. 염세를 관리가 징수하지 않고 개인이나 회사에 청부를 주어 징수하여 업자들의 횡포가 심하였다)에 시달렸다. ②시민계급(부르주아)은 금융업자·상공업자·법률가·의사·문필가 등 자유업 종사자 였으며, ③소시민층(쁘띠 부르주아)은 소상인·수공업자·생활궁핍자]은 이에 불만을 가지고 구제도의 모순을 타파하고 그들에게 적합한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려 하였다.

 

계몽사상의 영향을 받아 성장한 시민 계급은 계몽 사상으로 무장하여 그들이 소유한 교육·부·재능·야망에 어울리는 사회적 대우를 요구(국가 행정의 비효율성을 비판하고 문벌보다 능력과 업적에 의한 출세의 원칙을 바라고 있었다)하여 봉건적 요소와 전체 정치를 타파하려 하였다. 시예스의 "제 3신분이란 무엇인가"라는 팜플렛에 잘 표현되어 있다.

 

또 루이 14세 이래 악화된 재정은 루이 15세 때 더욱 누적되고 루이 16세(Lois ⅩⅥ, 재위 1774-1792)의 미국 독립 전쟁 원조로 결정적 위기를 맞아 1774년 중농주의 경제학자 튀르고(Turgot 1727-1781)를 등용하여 사태를 타개하려고 시도, 튀르고는 면세 특권 계급에 과세하고 왕실 경비를 삭감하려다 왕비 및 귀족들의 반대로 1781까지 재무장관을 지냈는데,

 

1781년「재정 현황 보고서(Compte rendu)」를 발표하여 반동 귀족에 밀려나고, 1781년 다시 알렉상드르 칼론(Alexandre de Calonne, 1734-1802)의 개혁[모든 토지 소유자로부터 현물세(現物稅)를 징수하려고, 왕실에 가까운 귀족과 성직자 대표들로 명사회(名士會; Assembly of Notables)를 구성하여 협력을 얻으려다 실패]이 있었으나 법복귀족의 아성인 고등법원을 중심으로 한 귀족들의 반대로 실패, 3부회 소집 당시에는 네케르가 다시 등용되었다.

 

법복 귀족들은 왕실의 재정 위기를 이용하여 과거에 상실했던 정치 권력을 회복하고 절대 왕정을 제약하여 귀족 정치를 실현하려고 1302년에 창설되고 1614년 이래 소집되지 않고 있던 삼부회 소집을 요구하였다.

 

또한 미국 독립 혁명의 성공은 프랑스 시민 계급에게 용기와 자극을 주었다.

 

한편, 18세기 프랑스의 물가와 소득의 동향은 1733년부터 1817년까지 거의 1세기 동안 전반적으로 상승하였는데, 경제학자(經濟學者) 시미앙(F. Simiand)에 의하면 1758년까지 완만했던 물가상승률(物價上昇率)은 1758년부터 1770년 사이에 급상승하였고 그 뒤 잠시 안정되었다가 대혁명 전후에 다시 급상승하였다.

 

 1726-1741년의 시기를 지수 100으로하여 24개의 식료품(食料品) 혹은 상품(商品)을 토대로 계산한 1771-1789년의 장기간 평균상승률(平均上昇率)이 45%였고, 1785-1789년 사이에는 이것이 65%로 높아졌다. 물가상승률은 생산률에 따라 상당한 차이가 있었는데, 공산품보다는 식료품이 육류보다는 곡물이 훨씬 심했다.

 

이러한 점은 본질적으로 농업적인 상태에 머물러 있는 경제의 특징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당시 곡물을 민중의 가계 속에서 엄청난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으며, 인구는 급속히 증가하고 외국으로부터의 곡물수입이 금지된 반면에, 곡물생산량은 거의 늘지 못했다.

 

또한, 1785년부터 1789년까지의 물가상승률에 대한 시미앙의 조사에 의하면 밀은 66%, 호밀은 71%, 육류는 67% 올랐고 땔나무는 가장 높은 상승률을 보여 91%였다. 포도주의 경우는 14% 밖에 오르지 않았으나, 많은 포도재배업자들이 곡물을 생산하지 않은 까닭에 빵을 사 먹지 않을 수 없었던 만큼 포도재배의 수익성 감소는 더욱 심각한 것이었다.

 

주기적(週期的) 가격변동(價格變動)(1726-1741, 1742-1757, 1758-1770, 1771-1789)과 계절적 가격변동이 중첩되면서 물가상승을 더욱 자극했다. 1789년에 밀값 상승률이 127%, 호밀의 상승률이 16%에 이르는 주기 최대치를 나타냈다.

 

계절적 변동은 곡물의 경우 풍년이 든 기간에는 거의 느낄 수 없었던 것이 흉년이 드는 해에는 극심했으며 그리하여 가을철에서 그 이듬해 수확기까지 물가상승률이 50-100% 혹은 그 이상이 되었다. 1789년 물가의 계절적(季節的) 상승기(上昇期)는 우연히도 수확기인 7월 상반과 일치되어 밀값이 150%, 호밀이 165% 상승하였는데, 7월 14일의 민중봉기는 18세기 전체에 걸쳐 가격이 최고점에 도달한 시기였다.

 

물가의 상승과 더불어 군주제를 동요시키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은 왕실의 재정문제(財政問題)였다. 혁명 직전의 재정적인 상황을 알려 주는 군주제 "최초이자 최후의 예산안"인 1788년의 국고회계보고서를 살펴보면 지출이 6역 2천 9백만 리브르였고, 수입은 5억 3백만 리브르에 불과해 적자는 지출의 20%에 해당하였다.

 

 전체예산 가운데 가장 큰 항목을 차지한 것은 부채로서, 이것에 대한 지출은 전체예산의 50%를 넘는 3억 1천 8백만 리브르였다. 이와 같이 왕실재정을 파괴하는 부채는 프랑스의 미국 독립 전쟁의 참가로 더욱 증가하였다.

 

미국 독립 전쟁에 20억 리브르에 해당하는 비용이 사용되어, 그 결과 1789년의 부채는 50억 리브르에 달했고, 당시 통화량은 25억 리브르였다. 부채가 루이 16세의 재위기간인 15년 사이에 3배로 증가하였다. 이러한 왕실의 부채와 재정적자(財政赤字)는 세금인상을 유발하였고, 이것은 민중에게 더욱 큰 부담이 되었다.

 

물가상승과 재정파탄으로 경제적 위기에 직면한 프랑스는 인구증가로 인해 그 위기가 가중되어 악화일로에 이르게 되었다. 18세기, 특히, 1740년 이후 현저해진 프랑스의 인구증가는 두드러졌다. 17세기말 프랑스의 총인구는 1천 9백만이었고, 대혁명 전야에는 2천 5백만으로 추정되었다. 인구증가가 6백만으로 지역적 차이를 고려하더라도 증가율은 30-40%였다.

 

 같은 시기에 영국은 9백만을 넘지 못했다. 당시 프랑스는 높은 출산률을 유지하였고, 그 비율은 40%에 달했다. 그러나 특권계급(特權階級)의 가계에서는 출생률이 현저히 감소했다. 매년 상당한 차이를 보이던 사망률은 1778년에는 33%까지 낮추어졌다. 평균수명도 대혁명 전야에는 29세로 높아졌다.

 

이것은 무엇보다도 영양실조, 기근, 그리고 전염병에 의한 대위기가 사라진 데에서 비롯하였다. 이와 같은 인구증가는 18세기 후반의 중요한 특권이었다. 도시와 민중계급(民衆階級)에서는 현저한 인구증가가 일어났는데, 이러한 인구증가에 의해 농산물에 대한 수요가 증대되고, 이것은 물가상승의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이러한 경제적 위기의 시기에 식료문제(食料問題)나 임금문제(賃金問題)로 사회적 소요가 일어났는데, 주로 밀과 빵을 사려는 도시나 그 근교의 영세소비자들에 의해서였다. 도시의 임금노동자들은 임금과 노동시간 때문에 스트라이크를 일으키곤 했고, 특히 구제도 말기에는 생계비 부족으로 인한 생활의 어려움으로 스트라이크는 더욱 빈발해졌다.

 

농촌의 경우 구제도 말기의 프랑스는 경작방법이 뒤떨어지긴 했으나 대체로 자급자족할 수 있는 정도의 수확을 거두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상주의자(重商主義者)들에 의한 1787년의 곡식매매에 대한 자유판매정책으로 말미암아 막대한 양의 곡식이 외국으로 유출되어 국내의 예비용 저장곡식이 감소되었다. 이 정책으로 북부지방의 중요한 생산물인 밀의 값이 2배이상 올랐고, 1788년에는 우박을 동반한 폭풍으로 곡식생산이 감소되어 곡물가격과 빵값이 12수에서 12월에는 13, 14수로 인상되어 7월 바스티유감옥 습격사건 때까지 계속적으로 높은 수준을 유지하였다.

 

 이와 같이 곡식과 빵값의 인상은 도시의 영세소비자들에게 생활의 곤란을 받게 했고 이들의 구매력을 현저히 감소시켰다. 또한 국내산업은 1786년 영국과의 통상조약과 1787년 이후 다른 유럽국가에 대한 수출감소(輸出減少)로 심한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

 

이러한 사회적·경제적 위기를 벗어나기 위한 유일하고도 근본적인 대책은 조세의 평등이었다. 구제도 말기에 물가가 65% 상승 한데 비하여 같은 기간에 귀족이나 특권계급이 토지재산에서 얻은 수입은 98%나 증가하였다. 마침내 이들로부터 세금을 거두어 들여 왕실의 재정적자를 메꾸기 위해 1787년 2월 국왕 루이 16세는 명사회(名士會; Assembee des Notables)를 소집하였다.

 

재상 깔론느는 인지세를 확장하고 토지소유자(土地所有者)들에 대해 토지세를 부과하려는 개혁안을 제출하였으나 명사회의 귀족들은 자신들의 특권에 대한 침해로 간주하여 동의를 거부하였다.

 

 결국 5월 25일 명사회는 해산되고 귀족혁명(貴族革命)(Revolution aristocratique)이 뒤따르게 되었는데 이를 가르켜 샤토브리앙(Chateaubriand)은 "귀족이 혁명을 시작하고 평민이 이를 성취하였다"고 말했다. 귀족들은 과세의 결정권은 3부회만 있다고 주장하고 국가의 재정문제(財政問題)를 취급하기 위해서 3부회를 소집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국왕과의 교섭이 지연되어 정치적 소란이 일어나자, 이에 자극받은 민중이 여러 지역에서 산발적으로 폭동을 일으켰다. 1788년 6월 11일에는 디종(Dijon)과 뚤르즈(Toulouse)에서 19일에는 뽀(pau)에서 폭동이 발생하였다. 같은 달 렌느(Rennes)에서는 귀족과 국왕의 군대가 충돌하였다.

 

혁명의 서막을 이루는 가장 유명한 사건은 1788년 6월 도피네(Dauphine)지방에서 발생한 그레노블(Grenoble) 민중소요(民衆騷擾)였다. 이곳은 지방의회(地方議會)가 설치되고 사법개혁에 의해 민심의 동요가 극에 달했던 지역으로, 특징적인 사실은 프랑스 내에서 가장 산업화된 지역이라는 점이다.

 

6월 7일 고등법원의 추방소식을 접한 민중은 도시의 성문을 점령하고, 그 위에 올라가서 도로순찰대에 투석을 하는 등 폭동을 일으켰다. 비록 이 사건이 직접적으로 중요한 결과를 가져오지는 못했지만 그것은 도피네에 있어서 진정한 혁명적 봉기의 서막이었다.

 

그해 9월에는 생 - 마르셀(Saint - Marcel)과 생-제르맹(Saint - Germain)의 직공과 도제 그리고 소시민(Petit Bourgeoisie)이 합세하여 폭동을 일으켰다. 당시 파리의 경시청에 남아있는 기록을 살펴보면 이 폭동으로 체포된 사람들은 대부분 파리의 수공업자, 소상점주인, 직공들과 여러 형태의 임금노동자였다.

 

 폭도들의 직업은 50여 종류로 나누어지는데, 그 중 24종(種)은 직공, 도제, 임금노동자이고 16종(種)은 소상인과 상점주인이었다. 폭도들은 대부분 파리중심지역과 북부지역의 거주민이었다. 이 폭동에 가담한 상퀼로트는 아직 뚜렷한 정치적 이상은 갖지 못한 채 계속되는 경제적 빈곤과 귀족혁명에 의한 정치적 동요에 답한 것이지만 3부회 소집이라는 사회적 요구가 그 배경이 되었다.

 

당시 도시의 민중은 제 3신분(Le Tiere)이라는 총칭의 다양한 그룹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구분이 쉽지 않지만, 대체로 다음과 같은 사회적 성분으로 이루어졌다. 상퀼로트, 즉 민중의 주요 핵심은 수공업자, 소상점주인, 소상인들로서 이들은 소규모(小規模) 작업장이나 상점을 가지고 있었고 상품생산(商品生産)과 거래의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었다.

 

이들은 비교적 부유한 중산계급(中産階級)과 밀접한 유대관계를 맺고 있었기 때문에 부르조아지의 정치이념(政治理念)이나 이상을 쉽게 접할 수 있었고, 특히 수공업자는 함께 생활하던 직공이나 도제들에게 직접적인 영향력을 미칠 수 있었다. 직공과 도제외에 공장에 고용된 임금노동자들도 상퀼로트의 한 계층을 이룬다.

 

이 노동자들은 직공이나 도제보다 행동이 자유스러웠고 노동자계층내(勞動者階層內)의 여러 형태로 상승이 수월한 편이었으나 도시의 노동자인구의 증가로 생계비나 임금수준이 불균형을 이루어 경제적 곤란을 겪고 있었고 과중한 노동시간으로 사회적 불만이 커 가고 있었다.

 

이 시기의 상퀼로트의 경제적 부담을 연구한 라브루스(E. Labrousse)의 조사에 의하면 상퀼로트는 빵을 사기 위해서 그들 수입(收入)의 50%를 소비(消費)해야만 했고, 채소나 포도주에 16%, 의류에 15%, 연료에 5%를 지출하여야 했다. 곡류가격은 1789년에 최고점(最高點)에 달해 밀값이 127-150%, 호밀값이 136-1655로 크게 인상되었고 이에 빵값도 크게 상승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빵값 인상과 함께 민중의 생활을 어렵게 한 것은 낮은 임금이었다.

 

당시 도시의 노동자들의 임금은 일당 20-25수로, 1726-1741년 사이의 임금에 비해 225 인상된 것이지만, 48-65%에 이르는 물품가격(物品價格) 인상률(引上率)에 비해 훨씬 떨어지는 비율이었다. 농촌에서는 계속되는 흉작으로 생활에 타격을 받아 도시로 모여들었는데 결과적으로 노동자 인구는 증가되고 그에 따르는 직장 공급은 쉽지 않은 상태여서 낮은 임금의 일자리도 구하기 어려워 실업자(失業者)의 수만 증가하게 되었다.

 

1789년 1월 산업보고서에 의한 실업자의 수(數)는 아망(Amems) 46,000명(名), 리용(Lyons)의 25,000명(名), 루앙(Rouen)의 10,000명(名), 활라쓰(Falasse)의 8,000명(名), 까르까손느(Carcassone)의 30,000명(名)으로 나타났고, 파리와 그 근교지역(近郊地域)의 실업자는 80,000명(名)이나 되었다.

 

 이와같은 실업상태와 높은 빵값의 인상으로 인한 굶주림은 상퀼로트 폭동의 원인이 되었다. 이들이 가지고 있는 불만은 부르조와지와 반드시 일치하지는 않았지만, 상퀼로트가 일상 생활에서 당하는 경제적 어려움은 모두 귀족계급의 탓으로 돌려졌기 때문에 3부회에서 귀족계급(貴族階級)에 대항하는 부르조아지에게 지지를 보낼 수 있었다.

 

위에서 설명한 심각한 경제적 위기를 배경으로하여 1789년 4월 28일에 생 - 앙뜨완느(Saint - Antoine) 교외지역에서 레베이용폭동(Revolte Reveillion)이 일어났다. 이것은 혁명의 첫 번째 거대한 민중폭동(民衆暴動)으로 불리워지는 한편, 구제도의 마지막 폭동이었다.

 

이 폭동은 생 -앙뜨완느지역에 350명의 직공을 가진 공장주인인 벽지제조업자 레베이용(Reveillion)과 초석제조업자인 앙리오(Henriot)가 선거연설(選擧演說)에서 그들의 노동자들이 한 달에 15수의 임금이면 넉넉히 살 수 있다는 민중의 빈곤(貧困)에 대한 파렴치한 발언을 함으로써 임금노동자들의 반감을 사게되어 일어난 것이다.

 

4월 27일에 3,000명(名) 이상의 노동자시위가 있었으며, 생자크(Saint - Jarques)의 책방주인인 아르디(Hardy)의 저널(Journal)지(誌)에 의하면 28일에는 두 제조업자의 집이 이들에 의해서 약탈당했고, 다음 날에는 공장노동자, 가내수공업의 직공들이 합세를 하여, 폭동은 더욱 고조되어 확산되어지자 프랑스 수비대(Gardes Francaise)가 투입되고 이에 폭도들이 저항을 하여 수 백명의 사망자가 발생하였다.

 

폭도들이 수비대의 진압에 저항을 하면서, "자유.... 우리는 움직이지 않을 것이다." "제 3계급 만세!" 라고 외친 구호에서 알수 있듯이 당시 혁명적 부르조아지의 혁명사상(革命思想)이 이미 이들 하층민에까지 스며들어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었다.

 

이 폭동을 비난하는 사람들은 폭도들이 대부분 주거부정의 부랑자로 구성되었거나 돈으로 매수된 사람이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타당치 못한 것으로 폭동이 사회적·경제적 곤란을 고려하지 못한 주장이다. 레베이용폭동은 그 동안 계속되어 온 빵값의 인상과 낮은 임금으로 인한 임금노동자의 누적된 사회적 불만이 터진 사건으로 당시 노동자층 3/4이 높은 생활비로 인해 많은 빚을 지고 있었다는 사실로도 이들의 불만을 짐작할 수 있다.

 

 한 팜플렛 제작자는 이 폭동의 동기를 빵부족 탓이라 하였고, 아르디의 저널지에는 레베이용과 앙리오의 집을 파괴한 폭도들이 빵값의 인하를 요구하였고, 두 공장주의 집외에 부서진 가옥은 빵가게 뿐이었다는 기록을 보아 부랑자나 매수된 사람들의 폭동이 아니라 굶주림에 의한 민중의 폭동임을 알 수 있다. 이 레베이용폭동은 상퀼로트 중 임금노동자가 하나의 사회적 그룹으로서 대두된 사건이기도 하였다.

 

마침내 1789년 5월 베르사이유에서 3부회가 소집되었고, 이제까지 국왕과 귀족사이의 투쟁을 예의주시하고 있던 부르주아지가 혁명에 뛰어들게 됨으로써 진정한 의미의 혁명이 시작된 것이다. 3부회의 소집을 계기로 하여 대표선출과 투표방법의 문제에서 귀족과 부르조아지간에 갈등과 대립이 표면화되기 시작하였고, 고등법원(高等法院)의 귀족들은 3부회가 "각 계급의 동일한 대표수와 서로 다른 투표방법(投票方法)"을 갖는다고 주장하여 3부회에서 특권계급(特權階級)의 지배권(支配權)을 확보하고, 그들의 특권을 보호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혁명적 부르조아지가 대다수였던 3부회의 제 3계급은 2배로 대표수를 증원할 것과 투표방법에서도 귀족계급이 주장하는 신분별표결(Par Ordre)에 반대하여 머리수표결(Par tete)을 주장함으로써 실질적인 부르조아지 혁명(Revolution Bourgeoisie)의 막이 오르게 되었다.

 

Ⅲ. 부르조아지 혁명과정에서 상퀼로트의 원조와 요구

 

 

부르봉 왕가의 파산이 다가오는 가운데 1614년 이래 소집되지 않고 있던 삼부회가 과세 동의를 위해 소집되었으나 표결방법 문제로 결렬되었다. 1, 2신분은 부별투표(部別投票)를 주장하였으나 제 3신분은 하급 성직자나 진보적 귀족들의 지지를 기대하고 신분과는 관계없이 참석한 모든 대표마다 1표를 행사하는 두별투표(頭別投票)를 요구하였다.

 

 이에 미라보(Mirabeau, 1749-1791), 시예스[Emmanuel Joseph Sieyes, 1748-1836, 성직자 생활을 하다 혁명 전야에 《제 3신분이란 무엇인가?》를 저작하여 귀족의 특권을 공격하며 부르조아지 체제의 이론을 내세움] 등 제 3신분 대표들은 그들만이 「프랑스 국민의 진정한 대표」라고 선언하고, '정구장의 서약(1789. 6. 20)'으로 뜻을 모아 헌법을 제정하고 국민의회(國民議會)를 구성하였다.

 

그러자 국왕은 승려와 대부분의 귀족대표들에게 국민의회에 합류할 것을 촉구하는 서한을 보내는 동시에 제 3계급을 굴복시키기 위해 무력을 사용하기로 결심하고 있었다. 사실 국왕은 특권계급에게 국민의회에 합류할 것을 촉구한 바로 그 전날에 이미 파리와 베르사이유 근방에 있던 2만 명의 군대를 소집하도록 명령을 내렸다.

 

5월 이후부터 베르사이유에서 일어나고 있던 일들을 주목하고 있던 민중은 국왕의 군대 소집 명령으로 불안이 가중되었고 이로 인해 파리에서 발전하고 있던 폭동적인 분위기가 자극되었다. 이 때부터 국민의회를 지지하는 한편, 파리에서 발전하는 혁명적 기운을 지켜보던 자유주의적 귀족과 혁명적 부르주아지들이 혁명의 지도세력으로 민중을 선동하는 역할을 맡기 시작했다.

 

식량위기로 불안한 상태에 있던 파리 민중들은 카미유 데물렝(Camille Desmoulins, 1760-1794)의 선동에 따라 자치위원회를 구성하여 시 행정을 접수하고 민병대(民兵隊, 후에 국민 방위군)를 조직하여 전제 정치의 상징인 정치범을 수용하는 감옥이라고 알려진 바스티유(Bastille)감옥을 습격하였다(1789. 7.14).

 

이 두 그룹이 혁명초기(革命初期)에 뚜렷한 역할을 담당했다. 국왕의 무력탄압 의도가 드러났을 때, 一部의 상층부르조아지가 저항운동(抵抗運動)을 조직화하는데 기여했다. 그들은 자신들의 정치적 목적을 위해 파리의 상퀼로트를 동원했던 것이다. 바로 이들이 혁명의 전기간을 통해 수많은 蜂起의 주역들이었으며, 노동자, 직인들이 그들의 뒤를 따르고 있었다.

 

한편, 3부회의 소집은 민중사이에 대희망(La grand esperance)을 불러일으켰다. 이 당시에 프랑스를 여행했던 영(A. young)이 한 농부의 아내를 만났을 때, 그녀는 "무엇인가 새로운 일이 빈곤한 사람들을 위해 생길 것이다. 그것은 누가 어떻게 해 줄 것인지는 잘 모르지만 어쨌든 현재보다는 더 나은 생활을 할 수 있게 될 것이다" 라고 희망을 말했다.

 

 그런데 특권계급(特權階級)이 그러한 개혁을 반대하여, 그들의 특권을 완강하게 고집하여 이와같은 희망이 그들에 의해 깨어질 것이라는 특권계급(特權階級)의 음모(陰謀)(La Complot aritsoratique)에 대한 두려움이 동시에 일어났다. 또한 제 3계급의 타도를 위해 귀족들이 주거부정의 부랑자들을 모아 군대를 조직하고 외국세력을 끌어들이려 한다고 믿게 되었다. 자연스럽게 민중은 특권계급이 공격하기 전에 먼저 그들을 섬멸해야 겠다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

 

3부회(部會) 소집(召集)이후 경제적 위기는 악화(惡化)되고 그러한 상태하에서 민중동원이 가능하였다. 1786년 영국과의 통상조약으로 공업생산(工業生産)에 이어 농업위기(農業危機)가 가중됨으로써 생계비앙등과 실업상태가 악화되었다.

 

또한, 1788년의 흉작(凶作)과 불경기로 인해 구매력(購買力)이 감소되었다. 1789년 파리의 노동자는 일당 30-40수를 받았고, 7월에 빵값은 파운드당 4수였으며, 지방에서는 8수까지 올랐다. 당시 수준으로 빵값은 파운드당 2수가 적당한 수준이었음에 비추어 볼 때 파리에서는 2배, 지방에서는 4배를 유지하고 있었다.

 

 높은 물가와 함께 민중의 불만은 세금에 의해 더욱 깊어갔다. 소비상품세와 함께 정부허가(政府許可)로 파리를 둘러싼 성벽의 관문(barrierse)에서 받던 입시세(入市稅)는 상점주인·포도주상인·영세소비자들의 증오의 대상이 되었다. 54개의 관문중에서 40개 이상이 민중폭동(民衆暴動)에 의해 파괴되었다.

 

이 폭동(暴動)은 팔레로얄의 지시에 의해 매우 조직적인 형태를 띄었고 수많은 문서, 세금서류, 장부들이 불태워졌다. 이 폭동을 일으킨 파리의 민중은 6월 30일에는 아베이(Abbaye) 감옥에 갇힌 11명의 프랑스 수비대를 풀어 주었는데 이들은 6월 22, 23일 밤에 베르사이유에서 벌어졌던 민중들이 일으킨 시위에서 발포명령을 거부한 죄로 감옥에 갇혀 있었다.

 

7월 8일에는 샹드마르스(Champ de Mars)에 있던 수비대에게 혁명책자를 판 신문배달부가 체포되었고 11일 밤에는 무장시민과 프랑스 수비대와 지방의 빈민들이 무기를 구하기 위해 파리 북방에 있는 생 - 라자르(Saint - Lazare) 수도원을 습격하는 등, 파리 각처에서 무기를 찾기 위해 민중의 폭동이 발생하였다.

 

이로 인해 화약 무기제조업장의 상점이 곳곳에서 약탈을 당했다. 훗날 파리 총포제조업자들이 국민의회(國民議會)에 제출한 총(總) 손실액보고가 115, 118 리브르에 달하는 것을 보아도 이 폭동이 얼마나 격렬했는가를 알 수 있다.

 

7월 12일 파리에 알려진 네케르(Necker)의 파면(罷免)소식은 민중으로 하여금 무기상점을 약탈하도록 자극하였고, 무장을 더욱 재촉하게 하였다. 이런 소란상태에 놀란 파리의 선거인(選擧人)은 13일 상임위원회(Permanent Comite)를 세워 무분별한 무장을 막고, 시민의 공공안정을 위한 부르조아지 민병대(milice Bourgeoisie)를 조직할 것을 결정했다.

 

 14일 민중은 전면무장을 요구하며, 무기를 구할 목적으로 폐병원(廢兵院)(Hotel de Invalides)에 침입해 10문의 포와 28,000정의 소총을 탈취한 뒤 바스티유감옥을 습격했다. 이 곳은 전에는 국사범을 가두었던 절대왕정(絶對王政)의 상징으로서 민중의 증오(憎惡)의 대상이었다. 바스티유감옥 습격으로 인해 그 곳의 수비병과 유혈충돌(流血衝突)을 벌인 민중은 98명의 사망자와 73명의 부상자를 내고 바스티유감옥을 함락시켰다.

 

7월 14일 사건의 소식은 삽시간에 프랑스 전역으로 번져갔다. 지방 도시들은 파리를 본따서 시정을 개혁하였다. 주로 부르조아지로 구성된 시정 상설 위원회와 국민방위대가 조직되어 행정과 치안을 맡았다. 특히 4대째 귀족 신분이 계속된 자만 장교로 임명한다는 1781년의 반동법에 크게 불만을 품고 있었던 부르주아지는 재빨리 군 지휘관을 바꾸어 왕군을 혁명군으로 만들어 놓았다.

 

파리와 지방 도시들의 반란은 농촌에도 번져갔다. 농촌은 지난 봄에 삼부회의 대표들을 뽑느라고 부산한 가운데 일시 흥분하였으나, 대표들을 왕에게 보낸 뒤에는 새로운 변화를 조용히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지방에 따라서는 3월 이래의 농민 폭동이 아직 산발적으로 계속된 곳도 있었다. 특히 고가의 폭등이 빈농에게 주는 고통과 불만은 날로 켜져가기만 하였다.

 

거기에다가 그들의 대표자들이 베르사이유로 떠나간 지도 벌써 두 달이 넘었건만 속 시원한 소식이 없었다. 희망은 실망으로, 기대는 좌절로 변해가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7월 14일의 파리 사건이 전해진 것이었다. 농민도 무기로 쓸 수 있는 것은 무엇이든 손에 들고 자기들의 바스티유 감옥인 영주의 성곽을 습격하여 토지 문서를 비롯한 영주의 봉건권 문서들을 볼살랐다.

 

만일 귀족이 이에 저항하면 피로써 보복하였다. 농민 반란은 일부 지역에서만 일어난 것이 아니라 걷잡을 수 없는 속도로 전국 곳곳으로 번져갔다. 농민도 파리의 폭도와 꼭 마찬가지로 잔인하였다. 그들도 바뵈프의 말을 빌린다면 개화되지 못한 야만인이었다. 그리고 농민을 야만인 상태로 방치해두었던 대가를 이제 영주들이 치르게 되었다.

 

농민은 영주들의 모든 특권과 억압에 폭력으로 항거하고 나섰다. 그리고 도둑의 무리가 약탈을 자행한다는 소문이 떠돌자 사람들은 스스로의 생명과 재산을 지키기 위하여 스스로 무장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농민은 영주들의 모든 특권과 억압에 폭력으로 항거하고 나섰다. 그리고 도둑의 무리가 약탈을 자행한다는 소문이 떠돌자 사람들은 스스로의 생명과 재산을 지키기 위하여 스스로 무장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국가의 공권력은 마비되었고 폭력과 공포가 전국적인 규모로 번져갔다.

 

 이른바 대공포(La grande peur)가 전국을 휩쓸었다. 이 대공포는 귀족 계급에 대한 농민의 증오와 단결을 부추겼고 반봉건적인 농민 폭동을 격화시킨 동시에 혁명을 지키기 위한 국민의 무장을 촉진시켰다. 프랑스의 농민 반란은 그저 불만을 터뜨리는 폭동에 그치지 않고 광범한 사회 운동으로 발전하였다. 영주제에 대한 농민의 자연발생적 반항과 그들의 혁명 참가는 세계 역사상 유례가 없는 사건이었다.

 

이러한 지방도시(地方都市)와 농촌(農村)에서의 폭동(暴動)은 8월 4일 밤 마침내 특권계급(特權階級)으로 하여금 봉건제도(封建制度)의 전면적인 폐지(廢止)를 입법화하였다.

 

이 법률안(法律案)은 ①과세의 평등 ②봉건적 부가세의 되사기 ③부역, 기타 인신적 예속의 봉건적 권리와 면세특권(免稅特權)이 법적으로 포기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리고 8월 26일에는 혁명의 일반적인 원칙으로서 17개 조항에 이르는 '인간과 시민의 권리선언(La Declation des droits de l'homme et du citoyen)'을 선포(宣布)하였다.

 

이는 구제도의 완전한 폐지인 동시에 부르조아지의 이상을 나타내는 것으로 새로운 사회질서(社會秩序)에 그 기초를 두고 있었다.

 

그러나, 1789년 8월 4일 의회에서 그날 밤의 결정과 권리선언을 통한 프랑스재건작업은 국왕이 다시 베르사이유에 군대를 소집하여 저항을 시작함으로써 새로운 곤경에 빠지게 되었다. 이에 구제도세력(舊制度勢力)과 충돌이 불가피하다고 느낀 애국파, 의회의 좌익세력, 파리의 혁명적(革命的) 언론인(言論人)들과 각 지구의 투사들은 이들을 뿌리뽑기 위해 파리 상퀼로트에 의한 민중봉기(民衆蜂起)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부르주아지의 선동과 후원으로 다시 행동을 하게 된 상퀼로트는 불만을 가지고 있었다. 바스티유감옥 습격 이후 경제의 안전상태는 너무 짧았고, 상퀼로트가 피 흘려 얻은 것이라고는 부르조아지에 의한 입헌군주제(立憲君主制) 성립이라는 정치적인 이상의 실현 뿐이었다.

 

그들은 정치적인 관심보다 우선 경제적 곤란에서 벗어날 수 있는 간접세의 폐지나 양곡매매의 엄격한 통제정책을 바랬던 것이다. 이와같은 배경하에서 10월 폭동이 일어날 수 있었다. 부르주아지가 귀족계급(貴族階級)의 음모를 분쇄하기 위해 혁명을 이끌고 간 반면에 상퀼로트는 부르조아지와 공통의 목표를 함께 하면서도 경제적 문제에 또 다른 관심을 집중하였다.

 

10월 폭동 발생전, 바스티유감옥 습격이후 잠시동안 안정적인 경제상태가 지나가고 8월 이후부터는 빵값의 상승과 기근으로 여러곳에서 폭동이 일어났다. 8월 2일에는 생-드니(Saint - Denis)의 부시장인 인위적으로 곡물기근을 유발(誘發)시켰고, 그리고 곡물가격의 인하를 거부하였다고 하여 소상인, 수공업자, 임금노동자등 성난 민중에 의해 살해당하는 사건이 발생하였고, 8일에는 시청 앞에서 상퀼로트에 의한 대규모 시위가 있었다.

 

그런데 이 시위로 인해 4파운드의 빵값이 12수로 인하되었는데, 7월의 14수에 비해 주목할 만한 성과를 얻었다. 이는 두 가지 의미를 시사하는 것으로, 하나는 2-7월 사이에 빵값으로 수입의 80%를 소비하던 노동자가 같은 양을 67%의 지출만으로 살 수 있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레베이용 폭동(暴動) 때보다 2배의 임금을 받는 목수나 직공들이 수입의 40%만을 소비하면 된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러나 계속된 가뭄과 밀 수확의 감소로 곡식이 부족하게 되자 굶주림으로 인한 폭동이 다시 시작되었고, 이 때부터 부녀자들이 폭동에 직접 참가하게 되었다. 또한, 망명귀족(Emigre)의 국외로의 재산도피(財産逃避)는 경제를 악화시키어 실업자를 날로 증가시켰다. 더우기 18,000명(名)의 실업자를 수용했던 몽마르트(Montmarte)의 광혜원(廣惠院)(Ateliers de Charite)이 폐쇄되어 경제적 위기는 더욱 고조되었고, 노동자를 포함한 상퀼로트는 임금인상(賃金引上)과 직업을 요구하는 시위를 벌였다.

 

이와같은 경제적 위기에 처해 있던 파리의 민중은 10월 1일 베르사이유 궁전의 연회에서 귀족출신(貴族出身)의 한 장교가 행한 삼색기 모독사건으로 크게 자극을 받았고, 5일에는 6-7,000명(名)의 부녀자들이 바스티유감옥의 정복자중 한 사람인 마이야르(Maillard)의 지휘로 국왕이 있는 베르사이유로 행진을 하였다.

 

 이들의 첫째 목적(目的)은 빵이었고, 둘째 목적(目的)은 반혁명적인 장교의 처벌이었다. 같은 날 오후 라파예트의 지휘아래 2만 명의 민중이 베르사이유로 출발하였다. 한편 이들보다 먼저 도착한 부녀자들은 베르사이유 궁전 앞에 모여 국왕은 이들의 요구를 승락하였다.

 

10월의 민중폭동(民衆暴動)은 상퀼로트가 기대했던 풍부한 빵의 공급은 곧 실현되지 않아 이들의 불만은 여전히 높았지만 부르조아지는 많은 정치적 이점을 얻었고, 정치상황은 변화되었다. 즉, 8월 이후 계속 저항을 하였던 왕당파는 패배하여 국외로 망명을 한 반면에, 의회내의 부르조아지는 입헌군주제(立憲君主制)를 세울 수 있게 되었다.

 

7월과 10월의 민중봉기(民衆蜂起)로 인해 반혁명의 시도는 분쇄되고 부르조아지는 확고한 승리를 얻었다. 두 번의 상퀼로트의 도움으로 부르조아지 혁명을 성공할 수 있었던 이들은 상퀼로트가 정치와 행정에 관여하는 것을 두려워하여 특권계급(特權階級)과의 투쟁에서 절대적으로 필요했던 민중봉기의 에너지를 제거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상퀼로트는 귀족계급에 대한 투쟁의식은 부르조아지와 동일하였지만, 정치적 실현만으로 만족할 수 없었고, 상퀼로트에게 보다 중요한 것은 빵문제였다.

 

1789년에 발생한 여러 민중봉기는 정치문제(政治問題)와 경제적(經濟的) 위기(危機)가 결부되어, 4·5월을 시작하여 7월에 그 절정(絶項)을 막고 10월에 또다시 절정을 이른 후에는 가라앉지 않았단 사회적 운동이었다.


. 군주제의 몰락과 혁명주도층의 계급분화

 

혁명적(革命的) 부르조아지의 선동(煽動)과 심각한 경제적 위기로 일어났던 1789년의 상퀼로트폭동은 특권계급(特權階級)과의 투쟁에서 부르조아지에게 승리를 가져다주었고, 입헌군주제(立憲君主制)를 세울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

 

상퀼로트는 비록 경제적 혜택을 얻지는 못했지만, 그 동안 혁명적 부르조아들의 선동과 지도에 의해 행동하던 그들이 점차적으로 정치적 성숙단계에 들어감에 따라 스스로의 사회적·경제적 요구를 주장하게 되었다. 이는 필연적으로 상퀼로트를 지지하는 세력과 반대하는 세력사이에의 충돌 즉, 부르조아지내의 계급분화를 가져오게 하였다. 이러한 현상은 1791년 샹드마르스사건으로부터 1792년의 군주제 몰락시기까지의 여러 민중봉기(民衆蜂起)에서 나타나고 있다.

 

10월폭동 이후 부르조아지와 민중은 국왕을 파리로 데려옴으로써 철저한 감시하에 둘 수 있었고, 제헌의회(制憲議會)는 그 이후 거의 1년 동안 프랑스의 재건사업을 위해 전력질주한 시기였다.

 

제헌의회(制憲議會)가 당면한 주요과제는 재정문제(財政問題)였다. 혁명초기에는 재정문제가 왕에게 압력을 가할 수 있는 훌륭한 수단이 되었으나, 이제는 상황이 바뀌게 되었다. 혁명의 혼란 속에서 도시와 농촌의 소요는 국고에 치명적인 결과를 가져왔다.

 

다급한 의회는 1789년 11월 4억 리브르에 달하는 교회재산(敎會財産)을 몰수하여 매각처분하는 개혁을 단행하여 파산 직전의 국가의 재정문제를 해결하려고 하였다. 이것은 교회재산을 담보로 현금상환이 아니라, 부동산으로 상환되는 년리 5%의 국채인 아시냐(L' assignat)지폐를 발행한 것이었다.

 

국민의회는 1789년 11월 교회 재산의 몰수를 결정하고 그것을 담보로 하여 아 씨냐(Assignat)라는 지페를 발행하였으며 교회의 재산을 매각하였다. 매각된 교회의 토지는 주로 부유한 농민과 부르주아들에게 돌아갔다. 전 토지의 1/10에 가까운 교회 토지의 매각은 그 수익자인 부르주아와 농민들을 새로운 체제에 굳건하게 결합시키는 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발행고가 증가함에 따라 그 가치가 하락하여 인플레이션(Inflation) 등 경제위기의 중요한 원인이 되었고, 교회재산의 매각은 빈농이나 토지없는 농민에게 아무런 혜택을 주지 못하였고 오히려 부유한 토지없는 농민에게 아무런 혜택을 주지 못하였고 오히려 부유한 부르조아지 자영농(自營農)이 그 대부분을 구입함으로써 개혁은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또한, 의회는 10월 폭동 이후 선거법을 개정하여 "최소한 3일분의 노임에 해당하는 직접세를 납부할 수 있는 능동적 시민(Citoy - en actif)"에 한하여 참정권을 주는 등 사회적 안정을 모색하려 했으나 효과가 별로 없었다. 오히려 입헌군주제를 성립시키려는 상층부르조아지의 의도와는 달리 공화주의사상(共和主義思想)이 민중들 사이에 널리 뿌리를 내리기 시작했다.

 

1790년 이후 파리에서는 공제연합단체(Union Fraternalle) 등 새로운 정치클럽이 조직되어 파리 민중의 정치교육을 도왔다. 재산소유자(財産所有者)에게만 부여된 선거참정권에서 제한되고, 국민방위군에서 제외되었던 수동적 시민들이 이들 단체에 적극 참가하여 그들 스스로의 사회적 요구를 주장하는 정치압력단체로 발전하여 재산소유 부르조아지에 대한 새로운 도전 세력이 되었다.

 

한편, 1790년 7월 14일에 프랑스 국민이 혁명적 대의에 결속되어 있음을 과시하기 위해 샹드마르스 광장에서 '연맹제(La Federation nationale)'가 행해졌는데 이것은 프랑스 통합과 국민적 합의의 절정을 이루는 것으로 많은 사람들은 혁명이 이제는 거의 완성되었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8월에 일어난 낭시(Nancy)사건으로 프랑스의 재건작업과 그 정책은 결정적으로 실패하고 말았다. 이 사건은 장교들이 병사들의 연대회계감사권에 대한 주장을 거부함으로써 낭시수비대가 소요를 일으켰는데, 당시 메쯔(Metz)지역 사령관인 부이에는 주모자들과 샤또비외(Chateauvieux) 연대의 스위스출신 병사이며 쟈코뱅 클럽회원인 40명을 체포·처형하는 등 소요를 무자비하게 진압하였다.

 

 국민방위군 사령관인 라파예트는 그의 사촌인, 부이에의 입장을 두둔함으로써 하루 아침에 그의 인기는 땅에 떨어지게 되었고, 그 결과 국왕을 보호하고 타협과 화해정책(和解政策)으로 프랑스를 재건하려던 라파예트의 계획은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1791년 봄이 시작되면서 사회적(社會的) 동요(動搖)가 재연되었다. 2월 28일 공화주의파(共和主義派) 중에서 과격하였던 쟈코뱅(Jacobin)파의 꼬르들리에클럽(Club des Cordeliers)의 지도아래 당시 국왕이 마음대로 개인의 구금을 명할 수 있었던 봉인편지에 대한 저항으로 생-앙뜨완느의 10,000명의 노동자가 시위(示威)를 벌였다.

 

또한 실업자는 계속 증가하여 새로운 질서의 끊임없는 위협으로 간주되었고, 실업자와 세무당국 사이에 충돌이 빈번했다. 6월 중순에 제헌의회에 의해 광혜원이 폐쇄되자 실업상태의 노동자들이 대규모 시위를 벌였고, 여기에서도 꼬르들리에 클럽이 지도적인 역할을 담당했다.

 

광혜원 폐쇄에 대한 의회의 결정을 재고할 것을 촉구하는 청원서가 의회에 보내졌는데 첫 번째 청원은 꼬르들이에 클럽에서 의회의 결정을 연기하도록 요구한 것이고, 두번째 것은 바스티유감옥정복자의 이름으로 데믈랭(Dermolins)이 기초한 것으로 시민의 권리 유지와 광혜원의 유지에 대한 주장이었고, 세번째 것은 노동자는 어떠한 수단으로든 빵을 얻어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국민의회의 가장 중요한 과업의 하나는 새로운 헌법의 제정이었고, 따라서 국민의회를 제헌의회라고도 부른다. 제헌의회가 최종적으로 제정한 '91년 헌법'은 새로운 정체로 권력분립의 원칙에 입각한 단원제의 입헌군주제를 채택하였다.

 

그러나 중요한 사실은 시민을 재산있는 능동적 시민과 가난한 수동적 시민으로 구분하고 전자에게만 참정권을 부여한 점이다. 그 결과 91년의 헌법이 마련한 새로운 체제는 철저한 유산계급의 지배체제였다.

 

과연 이러한 유산계급의 지배체제가 그대로 지속될 것인 가도 문제였지만, 루이 16세는 1791년 6월 가족과 더불어 국외로 도망가려다 바렌느에서 발각되어 파리로 다시 연행됨으로써 왕권의 위신을 실추시키고 군주제의 지속에 커다란 암영을 던졌다.

 

모든 혁명에서 혁명이 일단 성공하면 정치적 변혁으로써 만족하는 보수파와, 그 정치적 변혁을 사회적 혁명의 첫걸음으로밖에 생각하지 않는 과격파와의 대립과 충돌이 일어난다. 거기서 혁명 세력이 분열하여 보수파는 혁명에 의하여 타도된 낡은 세력과 힘을 합하여 과격파에 대항한다.

 

 이것은 혁명 세력 우파의 보수화 현상이다. 프랑스 혁명에서도 이 현상이 왕의 도망 사건을 계기로 하여 명백히 나타났다. 바르나브의 15일의 연설은 혁명은 이제 정치 혁명으로 끝났다는 우파의 생각을 명확히 표명한 것이었다. 그것은 왕정을 폐지하고 공화국을 수립하려는 좌파의 과격한 사회혁명적인 태도에 단호히 맞선 것이었다.

 

여기서 혁명파의 자코뱅 클럽이 둘로 깨어졌다. 의회에서 바르나브와 행동을 같이한 라메트 일파는 16일 자코뱅 클럽에서 분리하여 라파예트 일파와 함께 이른바 푀양이라는 클럽을 따로 만들었다. 이제 자코뱅 클럽은 로베스피에로와 페티옹 등과 같은 과격파만의 클럽이 되었다.

 

이들은 17일 샹 드 마르스에 모여 조국의 제단에서 공화정을 요구하는 진정서에 서명하였다. 의회는 질서 유지를 이유로 파리 시장에게 샹 드 마르스 집회 장소의 해산을 명하였다. 오후 7시 계엄령을 선포하고 무장한 국민방위대가 집회장소로 침입하여 사전 경고도 없이 무차별 사격을 가하였다.

 

약 50명이 그 자리에서 쓰러졌고 많은 사람들이 체포되었다. 수백 명의 민주주의자가 재판에 회부되고, 민주주의적인 신문들이 폐간되고, 코르드리에 클럽이 폐쇄되었다. 권력은 푀양 클럽의 수중으로 옮겨졌다. 의회를 좌우하는 힘은 이른바 삼두파 - 라메트, 바르나브, 뒤포르 - 의 손아귀에 들어갔다.

 

그러나 자코뱅 파와 파리 민중은 샹 드 마르스의 학살을 결코 용서하지도 않았고 또 결코 잊지도 않았다. 이들은 1년 뒤에 철저히 보복했고 자기들의 주장을 관철하여 공화국을 세우고야 말 것이다. 역사가들 가운데는 왕정 몰락의 근본 원인을 왕의 도망 사건과 샹 드 마르스 학살사건에서 찾는 사람도 있다.

 

사실 왕의 도망 사건이 있기 전에는 국민 거의 전부가 왕의 본심을 의심하지 않았고, 왕에 대한 고래의 신앙둁과 개혁에의 신뢰를 버리지 않았다. 따라서 왕정의 폐지나 공화정의 수립은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러나 이제는 상황이 전혀 달라졌다. 혁명에 소극적이었던 민중도 왕과 왕의 지지세력에 반기를 들기 시작하였다. 공화국과 민주주의를 자기들의 이익에 일치시키기 시작한 것이다.

 

민심이 이렇게 돌변하고 있을 때 민중의 마음을 더욱 돌아서게 한 일들이 일어났다. 그것은 91년 8월 25일의 필니츠선언과 9월 3일에 발포된 헌법의 반민주성이다. 오스트리아 황제 레오폴트 2세와 프러시아 왕 프리드리히 빌헬름이 필니츠에서 공동으로 성명을 발표하였다.

 

 이 성명은 루이 16세의 왕위를 위협하는 혁명에 반대한다는 뜻을 천명하면서 프랑스에 대한 무력 행사에 유럽 각국 군주들이 협력해 줄 것을 호소하는 한편 프랑스 왕은 자기들의 군사 행동을 거부하지 않기를 바란다고 하였다.

 

 당사자들은 이 성명을 프랑스 혁명 정부에 대한 하나의 협박 정도로 가볍게 생각한 면도 없지 않은 모양인, 그것이 프랑스 국민에게 준 심리적 영향은 막대한 것이었다. 왕의 도망 사건과 샹 드 마르스 학살 사건의 기억이 생생히 남아 있는 프랑스 국민과 파리시민이 어떤 기분으로 필니츠의 성명을 받아들였겠는가를 이해하기는 과히 어려운 일이 아니다.

 

이 샹드마르스 사건에서 주목할 점은 당시의 빵값이 안정된 상태였다는 것을 생각할때, 높은 빵값이나 기근에 의한 굶주림이 주요 동기가 되었던 다른 상퀼로트운동과는 달리 정치적(政治的) 성격이 강했다는 점이 특색이다.

 

이 사건 후에도 입헌주의파(立憲主義派)는 여전히 혁명의 주도세력이었고, 이는 당시의 헌법개정을 통해 여실히 드러나는데 1791년 9월의 헌법개정은 재산에 의한 제한 선거제적 특성을 강화한 것으로, 선거인이 되기 위해서는 150일 혹은 400일분의 노동량에 상당하는 재산을 소유해야만 했고, 오직 능동적 시민만이 국민방위군의 구성원이 될 수 있었다.

 

 이렇듯 새로운 정치체제는 재산자격(財産資格)에 의한 철저한 부르조아지계급의 지배체제였다. 10월 1일 입법의회(Assemblee Legislative)가 처음 개회되었을 때 대다수의 입헌주의파였다.

 

바렌느 사건은 국내에 끼친 영향 못지 않게 국외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국왕과 망명귀족의 끊임없는 반혁명음모(反革命的 陰謀)는 1791년 8월 27일 오스트리아의 황제 레오폴드 2세(Leopold Ⅱ)와 프리드리히 빌헬름에 의한 '필니츠 선언'(Declaration de pilnitz)으로 절정을 이루었는데,

 

이 선언은 프랑스의 왕정복고가 모든 유럽군주의 공통된 관심사이고, 이를 위해 유럽국가들이 프랑스내정에 간섭하겠다는 것을 선포한 것이다. 이와같이 유럽 국가의 위협과 반혁명 세력에 의해 혁명이 위태롭게 되자 국민감정은 크게 방해되었고, 의회내에서도 새로운 좌익으로서 지롱드파(Les Girondins)가 조직되어 망명귀족(亡命貴族)과 반혁명세력을 원조하는 외국군주에 대해 강경한 조치를 취할 것을 요구했다.

 

의회는 이 같은 요구를 받아들여 1792년 4월 오스트리아와 전쟁을 선포하였으며 공화주의파와 파리시민은 열광적인 후원을 하였다.

 

그러나, 프랑스군대의 연속적인 패배와 인플레의 영향, 그리고 국왕과 귀족들이 혁명을 분쇄하기 위해 외국군대를 끌어들였다는 확신에 의해 혁명세력은 더욱 자극을 받았다. 이러한 복합적 요소로 1972년 봄과 여름에 끊임없는 민중운동이 일어났고, 8월 군주제의 전복과 9월 파리감옥에서 벌어진 학살로 그 정점을 이루었다.

 

민중운동(民衆運動)의 주요 동기였던 인플레의 원인은 전처럼 곡물기근 때문이 아닐, 전쟁이전부터 가치가 하락되어 아시냐의 계속된 발행때문이었다. 전쟁으로 국가재정의 위기를 해결하기 위해 아시냐의 급속한 발행으로 인한 그 가치의 하락은 런던에서의 환율이 91년 6월 70%에서 92년 3월에는 50%로 떨어졌고, 파리에서의 명목가치는 91년 11월 82%에서 92년 1월에 63% 92년 6월에는 57%로 하락했다.

 

또한, 식민지였던 서인도제도에서 내란이 발생함으로써, 시민지상품이 부족하여 경제적 위기는 더욱 가중되었다.

 

대내적으로, 민중폭동(民衆暴動)이 계속되는 동안, 대외전쟁에 대한 준비가 없었던 프랑스는 군의 기강이 문란해지고 장교의 절반이상이 망명함으로써 계속적인 패배를 당하게 되었다. 이런 상황 속에서 6월 20일 군대의 연속적인 패배와 경제사정의 악화로 파리의 민중이 국왕이 거처하는 튀일루리(Tueillier)궁을 습격하였다.

 

 이 사건의 직접적인 원인은 전쟁을 수행하던 지롱드파 각료들이 파리근교에 20,000명의 의용군(Federe)을 주둔시키려 하였으나 국왕이 거부하여 각료들이 총 사임을 하자, 왕은 그를 지지하는 컁이양파 일색의 내각구성을 단행하여 왕권강화를 위한 헌법개정(憲法改正)과 전쟁을 끝내기 위해 적과 타협하려는 국왕의 의도에 압력을 가하기 위한 목적에서 였다.

 

이 사건의 폭도들에 대한 기록이 별로 남아있지 않아, 확실한 구성원은 알 수 없지만, 대체로 상점주인, 가내수공업자, 직공들이었다. 국왕에 대한 반감으로 시작된 이 사건은 정치적 성격이 강한 민중폭동으로 이 폭동은 이후 여러지역으로 번져갔고 파리의 47개 지국에서 국왕의 퇴위를 요구하였다.

 

한편, 대외전쟁(對外戰爭)은 7월 초 프러시아의 가담으로 위기를 맞게되자 11일 프랑스의회는 '조국의 위기(La patrie en danger)'를 선언하고 의용군을 모집하였다. 30일에는 그 동안 부르조아지만 구성되었던 국민방위군에 수동적시민의 가입을 허용하였고, 48개 파리 지구에서는 상퀼로트를 기반으로 혁명코뮌(Revoiutionaire Commune)을 조직하고 보다 강력하게 국왕의 퇴위와 공화국 수립을 요구하였다.

 

마침내, 8월 10일 각 지구의 상퀼로트와 의용병들이 튀일루리궁을 다시 습격하였는데, 국민방위군, 의용군, 파리주민 20,000여명이 왕실 수비대와 무력충돌(武力衝突)을 벌여 스위스출신의 수비대 600명을 학살하였고 90명의 의용군, 300명의 파리주민이 죽거나 부상을 당했다. 300명의 파리 주민중 1/3 내지 1/2이 생-앙뜨완느와 생0마르셀의 거주민이었고 나머지는 파리의 각 지역에서 온 주민이었다.

 

이들은 대부분 상퀼로트들 이었는데 새로이 국민방위군에 가입한 임금노동자들도 많이 참가했지만 수공업자나 상점주인에 비해 숫적으로 적은 편이었다. 8월 10일 왕권은 정지되고, 국왕은 폐위되었다. 왕권의 몰락과 더불어 혁명의 발발에 이바지한 자유주의적 귀족과 상층부르조아지를 지지하던 컁이양파도 그 영향력을 잃게 되었다.

 

또한 국왕과의 타협을 통해 봉기를 막으려고 했던 지롱드파는 큰 이득을 얻지 못하였으나, 장차 '산악파(Montagnard)'라 불리는 로베스피에르를 중심으로 한 세력이 그들의 권한을 강화시킬 수 있었고, '수동적 시민' 즉 상퀼로트가 정치 일선에서 부상하게 되었다.

 

8월 하순에 접어들자 전선의 상황은 극도로 악화되었고, 봉기로 인해 흥분한 파리의 민중이 9월 초 감옥을 돌아다니며 즉결재판을 통해 약 1100-1400명에 이르는 죄수를 처형하였는데 이 희생자 중 67%가 비정치범이었다는 사실로 미루어보아 9월의 학살(虐殺)은 공포정치(恐怖政治)의 뚜렷한 징조였다.

 

Ⅴ. 혁명정부에서 상퀼로트의 주요역할 수행과 퇴조

 

국민공회가 첫 모임을 가진 1792년 9월 20일 프랑스의 시민병은 잘 훈련된 프로이센에게 발미(Valmy)에서 뜻깊은 승리를 거두었다. 때마침 프로이센군에 종군하여 이 전투를 지켜본 괴테는 "새로운 세계사가 오늘 여기서부터 시작된다"고 기록하였다. 다음날 국민공회는 왕정을 정식으로 폐지하고 1792년 9월 22일을 공화제 제 1년의 첫날로 선포하였다.

 

국민공회에서도 중립적인 평원파(平原派)가 의석의 과반수를 차지하였으나 실제로 국민공회를 주도한 것은 상층부르조아지를 중심으로 한 지롱드당과 중산적 부르조아지와 소생산자층(小生産者層)에 기반을 둔 자코뱅당(Jacobins)을 배경으로 한 산악파(mountains)였다. 양파의 대립은 연말에 가서 루이 16세의 처형문제를 놓고 첨예화하였다.

 

 과격한 자코뱅당이 루이의 처형을 주장한 데 반하여 온건한 지롱드당은 적어도 루이의 처형만은 회피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근소한 표차로 루이의 처형이 결정되고 루이 16세는 1793년 1월에 단두대에서 처형되었다.

 

루이 16세의 처형은 유럽의 군주국(君主國)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고 1793년 2월에는 영국을 비롯한 대부분의 유럽국가들이 대불동맹(對佛同盟)을 결성하게 되었다.

 

한편, 오직 재산소유(財産所有)의 부유한 부르조아지의 이익만을 옹호하려고 했던 지롱드파의 소극적인 정책으로 경제적 위기는 악화되었고, 사회적 불만은 높아만 갔다. 아시냐의 계속적인 발행은 재정위기(財政危機)를 더욱 악화시켰고 생계비는 급속히 앙등했다.

 

1792년 8월의 민중폭동으로 군주제가 몰락한 이후 상퀼로트가 얻은 것이라고는 정치적 권리뿐이었다. 쟈코뱅과 함께 이 폭동을 지도했던 혁명코뮌의 상퀼로트 회원이 1789년과 1791년보다는 회원수가 늘었지만 단지 1/3정도만이 소상인, 수공업자, 직공등이 상퀼로트였고 나머지는 법률인ㆍ언론인들이었다.

 

이러한 경제적ㆍ사회적 불만속에서 11월 생-앙뜨완느 지역에서 실업자들을 위해 빵과 일자리를 공급해 달라는 진정서가 국민공회(國民公會)로 보내졌다. 여름과 가을에 조금 안정되었던 빵값은 1793년초 여러 달에 걸쳐 새로운 양상으로 다시 나타났고 이때부터 가격인상이 곡류뿐만 아니라 일반 소비상품(消費商品) 전반에 걸쳐 일어났다.

 

한 예로서 1790년 24수하던 설탕값은 1793년 2월에 47-60수로 올랐고 15수하던 수지양초는 18ㆍ5-20수로, 커피는 34수에서 40수로 비누는 12수에서 23-28수로 크게 인상되었다.

 

이와같이 가격인상(價格引上)이 민중폭동을 유발하였고 이것은 파리 전체로 확산되었다. 1793년 2월 25일 수 많은 민중이 식료품상점과 잡화상점을 습격하였다. 이 폭동으로 체포된 49명 중 29명이 여러 종류의 임금노동자였고 나머지는 상점주인과 수공업자였다. 주요 피해자는 대상인과 대규모 도매상인들로서, 그들이 가격상승(價格上昇)에 책임이 있다고 많은 민중이 믿고 있었다. 1793년 1월 60-65%였던 아시냐의 가치가 2월에는 50%로 하락하였다.

 

파리에서의 식량기근은 만성적이 되어가고 있었고 계속된 폭동으로 빵집이 자주 약탈되었다. 5월 2일 10,000여명의 생-앙뜨완느 주민들이 국민공회 앞에 모여 상품가격을 영세소비자 수준에 맞게 조정하라는 요구를 하였다.

 

5월 4일에는 이들의 요구가 받아들여져 빵과 곡물가격을 통제하기 위한 최고가격제(Maximum Genenal)법을 제정하였으나 실시를 하지 못하였고, 이를 대신하여 정부의 보조금이 지급되어 코뮌이 빵값을 3수로 지지할 수 있었다. 그러나 곡물의 공급이 불규칙했던 관계로 곡물의 저장량은 점차로 감소되어 빵가게에 긴 행렬이 다시 나타났다. 이러한 곡물가격인상의 영향은 다른 상품에도 영향을 미쳤고 아시냐의 가치는 6월 36%로 8월에 22%로 다시 떨어졌다.

 

지롱드파는 여전히 상퀼로트의 고통에 무감각한 상태였고 오직 부유한 부르조아지의 이익에만 관심을 두자 극단적인 과격파가 준동하고 이 과격파의 지도자인 에베르(Hebert)와 앙라제(Enrages)가 국민공회에서 지롱드파를 축출할 것을 주장함으로써 산악파로 하여금 지롱드파를 제거하도록 결심을 하게 되었다.

 

 이미 4월 중순부터 파리의 48개 지구중 35개 지구에서 산악파에 지지를 보내왔고 지구위원회(Sectionale Comite)에서는 20,000명의 상퀼로트출신인 투사(Militia)들에게 일당 40수를 주어가며 무장을 시키고 있었다.

 

물가고와 식량부족에 허덕이던 민중은 산악파의 조직적인 선동(煽動)과 후원으로 5월 31일 국민공회를 포위하였고 6월 2일에는 지롱드파를 공회에서 제거하는데 성공했다.

 

폭도들에 대한 기록은 거의 남아있지 않지만 31개 지구에서 상퀼로트에게 지불한 액수가 114,291리브르였고 생-앙뜨완느(Saint - Antoine)에서 6,000명 몽트이(Montruil) 2,946명 껭즈.벵(Quinze vingets)에서 2,039명 크로와루즈(Croix Rouge)에서 1,458, 그라비이에르(Gravilliers)에서 1,457명 몽마르트(Montmarte)에서 1,358명, 뽀팽꾸르(Popincourt)에서 970명의 상퀼로트를 보냈다.

 

지롱드파의 제거로 국민공회에서 주도권을 잡은 산악파는 민중과의 유대를 강화하여 대외전쟁의 수행과 반혁명적 세력을 제거하고 혁명을 성공적으로 끝내려고 하였다. 이를 위해 6월 3일 망명귀족(亡命貴族)의 토지를 빈농도 획득이 가능하도록 분할하여 매각하였고 7월 17일에는 모든 봉건적 공납을 무상으로 폐지하여 실질적인 봉건제의 폐지를 완성한 동시에 농민층을 견고하게 혁명의 대열에 결합시켰다.

 

 또한, '자코뱅 헌법'이라고 불리워진 '93년 헌법'을 제정하여 능동적 시민과 수동적 시민의 구별을 없애고, 보통선거제도를 채택했을 뿐만 아니라 '사회의 목표는 공공의 행복'이라고 선언하고 생존권(生存權), 노동권(勞動權) 그리고 병약자나 실업자에 대한 공공의 지원을 규정하는 등 오늘날의 복지국가개념을 확립하여 상퀼로트에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

 

그러나 산악파의 과감한 개혁에도 불구하고 경제적인 문제가 해결된 것은 아니었다. 혁명초기보다 임금이 2배 인상되었으나 파리의 상퀼로트는 아시냐의 가치하락과 물가고 그리고 식량난으로 여전히 경제적 고통을 받고 있었다.

 

9월 5일, 국민공회는 혁명군대에 관한 법령을 통과시켰다. 5월부터 혁명군대의 창설문제는 파리의 구들 사이에서 논쟁의 초점이 되었고 온건파적인 구들과 혁명적 상-퀼로트를 분리하는 계기가 되었다.

 

 상퀼로트에게 있어 혁명군대는 그들의 경제적 어려움을 타개할 수 있는 무기였고, 혁명군대의 활동은 국가내의 반혁명주의자들과 그들의 매점매석에 대한 상퀼로트의 처벌의지의 표현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 혁명군대를 누가 통솔할 것인가의 문제와 파리에서의 혁명군대의 형성이 상퀼로트의 세력을 강화시킬 것이라는 두려움이 국민공회로 하여금 혁명군대의 창설에 반대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국민공회는 더 이상 망설일 수는 없었다. 이날 국민공회에서 혁명군대의 형성에 관한 토론을 주도하였던 쇼메뜨의 연설은 그 동안 구들에서 가장 빈번하였던 요구들을 포함한 것이었다. "나는 파리의 교외에서 곡식의 징발을 감독하고 이기주의적인 부자들의 책략을 저지하고 그들을 법의 심판을 받도록 할 혁명군대의 창설을 국민공회에 요구한다,."

 

결국 민중들은 국민공회로부터 "파리에서.... 6천명의 보병과 1200명의 포병으로 구성되고 반혁명을 진압하며, 국민공회에 의해 선언될 공안의 조처들과 혁명법을 시행하고, 생필품의 수송을 보호할 무장군대가 주둔할 것" 이라는 법령의 결정을 획득하였다.

 

민중들의 압력에 의해 혁명적인 조치들을 실행하는 것은 동시에 지금까지의 지역주의적인 자치행정이 아니라 강력한 중앙집권화를 성립시키는 요인이 되었다. 민중들에 의해 그 주권을 위임받은 국민공회의 법적인 권한과 혁명적인 상황이 야기한 역동성이 결합되어 효과적인 중앙집권 체제가 성립될 수 있었던 것이다.

 

1793년 7월 25일 로베스피에르가 공안위원회에 들어감으로써 테르미도르까지 지속된 대공안위원회의 인적 구성이 확립되었다. 공안위원회, 특히 로베스피에르는 민중들의 무질서해 보이는 운동과 민중들의 불만을 선동하는 앙라제의 활동을 더 이상 묵과할 수 없었다.

 

로베스피에르는 상퀼로트가 무지로 말미암아 사악한 자들과 타락한 자들에 의해 잘못 인도되고 있다고 언급하면서 쟈크 루와 르끌락(Leclerc) 등을 "애국자의 가면을 쓴 위선적인 무리들"이라고 비난하였다. 활동의 중심기반이 결여되어 있던 앙라제는 자코뱅 클럽을 기반으로 한 정부의 공격을 견뎌낼 수 없었다. 결국 그들은 꼬르들리에 클럽에서 제명되었고 민중들은 가장 강력한 대변자를 상실하게 되었다.

 

공안위원회는 국민공회 내에서의 세력 강화를 비난하는 논쟁에 성공적으로 대처하면서 점차 그 권한을 강화하였다. 10월 10일, 생쥐스트의 동의에 따라 국민공회는 프랑스 정부가 '평화가 도래할 때까지 혁명적임(revolutionnaire jusqu'a la paix)'을 선언하였다. 그리하여 각료, 장군, 행정단체 등이 새로운 조직의 주축이자 각 지구와 독자적인 연락을 취하고 있던 공안위원회의 감시하에 놓이게 되었다.

 

또한, 9월 29일 공안위원회는 그 동안 상퀼로트가 줄기차게 요구했던 최고가격제법을 만들어 곡물 뿐만 아니라 생필품 전체에 대해 가격통제를 실시하여 상퀼로트의 열광적인 지지를 받았다. 이 법이 축재나 투기를 크게 억제하지는 못했지만 정부기관을 강화하고 화폐유동을 보호하여 일정 기간 동안 상품가격(商品價格)을 안정시켰고 군대와 시민 모두에게 식료품의 적절한 공급을 보장해 주었다.

 

공안위원회에 의해 혁명재판소의 기능도 강화되었다. 재판소의 기능이 미비했던 9월이전에 260명의 죄수중 66명이 사형을 당해 그 비율이 26%인데 반하여 10월 이후 1달 동안에 395명의 죄수중 177명이 사형을 당해 비율이 45%에 달했다. 그리고 구속자의 구도 8일 1417명에서 12월 4525명으로 늘어났다.

 

이때부터 상퀼로트는 파리시 행정부에서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하였고, 모든 지구위원회에도 대다수가 참가하여 중요한 혁명적 협회와 단체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소불의 조사에 의하면 1794년 파리지구 혁명위원회원 454명 중 임금노동자가 9.9% 상점주인, 수공업자가 63.8%인 반면에 제조업자, 임금생활자, 자유직업인, 관리등은 26.3%였다.

 

또한 생 끌레 드빌(Saint claire Deville)의 조사에 의하면 1793년 7월부터 1794년 7월까지 132명의 코뮌회원 중 82명이 제조업자, 수공업자, 상인이었고, 11명은 노동자, 8명은 청부업자이고 나머지 31명은 자유직업인이었다. 이와같이 혁명의 주요세력이었던 상퀼로트와의 굳건한 결합속에서 혁명정부(革命政府)는 대외전쟁에서의 승리와 반혁명반란을 진압할 수 있었다.

 

그러나 테르미도르(Thermidor)반동으로 혁명정부는 무너지고 상퀼로트와의 결속도 깨어지게 되는데, 그렇다면 그러한 결속이 어떻게 깨어지고, 그것이 테르미도르 9일에 어떻게 반영되었나?

 

물가와 임금의 통제를 위한 최고가격제는 파리코뮌이 1794년 4월 에 상거래를 부활시킴으로써 파괴되었는데 이것은 암시장을 형성하는 결과를 가져와 상품가격이 협정가격보다 더 비싸지게 되었다.한 예로 협정가격이 파운드당 22수하던 버터가 36-44수에 거래되었고, 50수하던 계란은 80-100수에 팔렸다.

 

이러한 경제정책(經濟政策)의 방향전환은 생산자에게는 유리한 것이었으나 영세소비자인 상퀼로트 - 특히 노동자나 봉급생활자 - 에게는 커다란 부담과 불만을 가져다 주었다. 1794년 4월 상퀼로트 중에서 가장 빈곤한 계층인 노동자와 봉급생활자가 임금인상(賃金引上)을 요구하는 소요가 일어났으나 파리코뮌이 르샤블리에(Le Chapelier)법을 적용하여 소요를 진압한 까닭에 잠시 주춤하였으나 6월에 다시 일어나서 테르미도르반동 때까지 계속되었다.

 

이 보다 앞서 공안위원회는 1794년 3월에 벙토즈(Ventose)법을 제정하였는데 이 법은 반혁명용의자의 재산을 몰수하여 가난한 애국자에게 분배하려던 것이었다. 많은 상퀼로트들이 이 법을 환영하였으나 실제로는 실시되지 못하였고 그로 인해 상퀼로트는 아무런 소득을 얻지 못했다.

 

그리고 3월과 4월 상퀼로트에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던 과격파인 에베르파(Heberists)와 온건한 당통파(Dantonists)를 제거하자 혁명정부와 상퀼로트와의 굳건한 결속이 금이 갔고, 이는 곧 혁명정부의 약화를 가져왔다.

 

이런 일련의 과정 속에서 테르미도르 9일(1794년 7월 27일)에 로베스피에르와 그의 동료들이 단두대로 보내졌고, 혁명정부는 무너지게 되었다. 이것은 프랑스 대혁명사에서 상퀼로트의 퇴조를 의미하는 동시에 재산소유 부르조아지들의 재등장을 뜻하는 것이었다.

 

Ⅵ. 결론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상퀼로트는 프랑스 혁명의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였다. 고로, 프랑스 혁명을 시민계급에 의한 단일 혁명이 아닌 부르조아지내의 다양한 계층에 의한 복합적 혁명이라고 이해하는 것이 훨씬 더 설득력이 있다.

 

구제도 말기와 혁명초기에 경제적 어려움과 부르조아지의 선동에 의해 수공업자, 소상인, 상점주인, 노동자 등 당시 파리시의 하층민인 상퀼로트가 혁명에 개입하게 됨으로써 부르조아지를 국왕과 특권계급의 저항과 음모로부터 구출하고 혁명에 있어서 부르조아지에게 결정적인 승리를 가져오게 하였다.

 

그러나 혁명의 진행과정에서 주요세력으로 등장하게 된 상퀼로트는 부르조아지와 이해관계의 대립이 생기게 되고 이것은 필연적으로 이들을 지지하는 세력과 반대하는 세력간의 대립, 즉 부르조아지내의 계급분화를 가져오게 하였는데, 1791년과 1792년 입헌군주제를 주장하는 상층부르조아지와 군주제를 전복시킨 민중폭동에 잘 나타나고 있다.

 

군주제의 몰락 후 프랑스 혁명은 다시 한번 계급분화를 맞게 되는데, 재산소유부르조아지를 기반으로하는 지롱드당과 상퀼로트를 기반으로 하는 자코뱅당과의 대립이 그것이었다. 이러한 대립속에서 상퀼로트와 자코뱅당은 굳건한 결속을 통해 마침내 지롱드당을 숙청하고 혁명정부에 의해 공포정치를 실시하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 상퀼로트와 혁명정부사이의 유대관계도 로베스피에르가 제거됨으로써 깨어지게 되고, 이는 결과적으로 사회적, 경제적 위기하에서 일어나 혁명의 원동력이 되었던 상퀼로트세력의 퇴조를 가져오게 하였다.

 

또한 상퀼로트운동의 성격은 값싸고 풍부한 빵과 생필품의 구입이라는 경제문제가 깊숙히 스며들어 있다. 구제도 말기부터 빈번했던 식량폭동은 경제적 위기가 원인이었다.

 

혁명적 민중폭동의 예외적인 경우인 샹드마르스사건이나 튀일루리궁 습격사건을 제외하고는 혁명을 발전시켰던 민중폭동(民衆暴動)의 1차적 원인과 동기는 바로 빵가격의 앙등과 품귀현상(品貴現狀)으로 인한 굶주림 때문이었다.

 

 다시말해 레베이용폭동, 베르사이유새행진, 1792년과 1793년의 연속적인 폭동은 빵기근, 아시냐가치의 하락에 의한 물가상승 그리고 낮은 임금등으로 인한 경제적 궁핍 때문에 일어난 것이었다. 이와같이 1787년부터 1794년까지의 상퀼로트운동은 경제적인 문제와 정치적인 관심이 결합하여 일어난 것으로 이러한 상퀼로트에 의한 민중폭동이 혁명을 진전시켜 온 진정한 원동력이었던 것이다.

Posted by kevin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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