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번호 521121 | 2009.01.21 IP 118.223.***.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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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인의 종말

 

경제인의 종말-피커드러커(요약)

 

자본주의와 사회주의의 이념과 질서는 모두 실패했다

 

자본주의는 폐쇄적이고도 뚜렷하게 구분된 계급들 사이에 불가피하게 계급 갈등을 초래하기 때문에 거짓 하느님이라는 것이 증명되었다. 사회주의도 그런 계급들을 철폐할 능력이 없다는 것을 보여주었기 때문에 허구라는 것이 증명되었다.

 

 자본주의 체제 하에서 현실적으로 존재하는 계급사회는 자본주의적 이념과는 양립할 수 없으므로 자본주의는 그 의미가 없어진다. 반면 마르크스의 계급투쟁은 비록 그것이 현실을 있는 그대로 인식하고 있고 또 설명하고는 있지만, 사회를 어디로 이끌고 가는지 알 수 없으므로 아무런 의미가 없다. 결과적으로 자본주의와 사회주의의 이념 및 질서는 모두 실패했다. 그 이유는 개개인이 경제적 자유를 실천하면 자유와 평등이 자동으로 도래하게 된다는 개념이 틀렸기 때문이다.

 

경제인 개념

 

그런 실패는 경제 영역에 가장 직접적으로 영향을 끼쳤다. 그것은 정치 영역에서도 모든 제도를 무의미하게 만들었거나 아니면 적어도 의문을 제기하도록 했다.

 

그러나 그것이 끼친 가장 심각한 영향은 모든 사회가 성립될 때 기초로 삼았던 근본적인 개념을 뒤흔든 것이었다. 즉 인간은 고유한 본성을 가지고 있고, 사회에서 자신만의 역할과 위치를 갖고 있다는 개념이 그것이다. 개인의 경제적 자유는 자동적으로 또는 변증법적으로 평등과 연결되지 못한다는 것이 증명되자, 그것은 자본주의와 사회주의가 근거로 삼은 인간의 본성에 대한 개념, 즉 경제인(economic man)의 개념을 무너뜨리고 말았다.

 

인간을 경제적 동물(economic animal)로 보는 개념은 부르주아 자본주의와 마르크스 사회주의의 진정한 상징이다. 왜냐하면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모두 인간의 자유로운 경제활동을 인간 존재의 목적을 달성하는 수단으로 보기 때문이다. 경제인은 경제적 만족만이 사회적으로 중요하고 또 의미가 있는 것으로 간주한다.

 

경제인은 경제적 지위, 경제적 특권, 그리고 경제적 권리를 획득하기 위해 노력한다. 그것들을 위해 인간은 전쟁을 하고, 심지어 죽을 각오도 하는 것이다. 다른 모든 것들은 단지 위선적이고, 속물적이며, 또는 낭만적이지만 무의미한 것으로 취급된다.

 

경제학의 흥망 : 헨리 포드는 고전 경제학의 법칙을 깨트렸다

 

사회 성립의 기초로서 경제인의 개념이 등장했다는 것을 알려주는 분명한 징후가 바로 독립적 과학으로서 경제학이 등장한 것이었다. 경제인의 개념이 인간의 진정한 본성을 대변하는 것으로 인정되자마자 경제학이라는 과학이 즉각 발전 가능한 것이 되었을 뿐 아니라 필요하고도 불가결한 것이 되었다.

 

그러나 헨리 포드가 독점은 생산을 축소하고 가격을 올린다는 경제법칙을 깨끗이 무시하고 보다 싼 가격으로 훨씬 더 많은 생산을 함으로써 독점을 하기 시작했을 때 고전 경제학의 과학적 체계는 붕괴하고 말았다.

 

오늘날 대부분의 국가들이 훈련받은 경제학자에게 국가 운영을 맡기고 있다. 경제학을 전공한 사람들이 기업의 경영자로서, 정치 지도자로서, 강사로서, 그리고 매스컴의 해설자로서 등장함에 따라 경제 전문가에 대한 수요가 폭증하고 있다.

 

 그러나 이는 단지 겉으로 드러난 현상일 뿐 진실과는 거리가 멀다. 우리는 경제인 사회를 구제하기 위해 최후의 절망적인 노력의 일환으로 경제학자를 국가의 고위직에 배치했는데, 그것은 마치 18세기에 이성주의자로서 계몽되었고, 누구보다도 더 많은 훈련을 받은 학자인 계몽 철학자들에게 위기에 빠진 국가의 왕좌에 앉혔던 것과 똑같다. 그런데 18세기의 철학자-이 그랬던 것처럼 20세기의 경제학자-총리도 역시 실패했다.

 

 전문가로서 경제학자들이 권력을 소유한 듯이 보이는데도 불구하고, 비록 그들 사이에도 의견의 일치를 보기 어렵지만 현실의 사태는 모든 경제학자들이 불가능하다고 선언한 경로를 따라 발전해 갔다. 이런 것을 보면 과학으로서 경제학의 가르침이 사회의 현실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한다는 것을 대변해 줄 뿐이다.

 

경제보다 더 중요한 사회적 평등

 

경제학이 사회의 현실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한 것은 경제학자의 지식수준이 낮아졌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낮아진 것은 경제 영역의 주권과 자율성이 바람직한 것인가, 그리고 필요한 것인가에 대한 신뢰이다. 신뢰가 사라지자 현실도 따라서 사라졌다. 대중은 자유로운 경제활동이 자유평등 사회로 이끌지도 않을 것이고 또한 만들 수도 없다는 것을 인식했다.

 

그러므로 대중은 경제행위를 사회적으로 바람직한 대표적 행위로 간주하기를 거부한다. 대중은 경제 제도들이 경제적 목적에만 봉사하기 때문에 그것들을 수용하기를 거부하고, 그것들이 제공하는 만족 역시 오직 경제적 만족뿐이기 때문에 거부한다. 경제 전문가의 관점에서 보면 이런 모든 것들은 도대체 있을 수 없는 일일 뿐이다.

 

경제 전문가는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는지 설명할 수가 없다.

 

경제법칙은 인위적인 규칙이 아니라 수확체감의 법칙과 같이 물리학과 지질학의 영역에서 끌어온 진정한 자연법칙과 같은 것이므로, 경제법칙을 위반함에 따라 받게 되는 경제적 벌은 매우 심각한 것이 될 수도 있다. 그런데도 대중은 기꺼이 벌을 받을 용의를 갖고 있다.

 

 그런 벌을 받게 된다는 위협마저도 유럽의 대중을 말리지 못하는 것은 그들이 경제법칙을 위반하고서라도 획득하기를 바라는 목표가 그들에게는 경제적 목표보다 한층 더 중요하다는 것을 증명해주고 있는 것이다. 대중이 보기에 경제는 더 이상 다른 모든 영역들이 종속되어야 할 자율적이고 독자적인 영역이 아닌 것이다.

 

마르크스주의마저도 자유평등 사회를 실현시킬 수 없다는 것이 증명되자마자 경제인의 개념에 기초를 둔 사회가 붕괴한다는 것 역시 기정사실이 되었다. 경제 영역의 우월성과 사회의 진정한 목적으로서 자유와 평등에 관한 신념을 융합시킬 수 있는 수단으로는 마르크스주의보다 더 나은 것이 없다. 그리고 경제인 개념 그 자체와 경제인 개념에 기초하여 성립된 사회를 합리화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과 근거는 자유와 평등을 실현한다는 약속뿐이다.

 

마르크스주의의 체계의 엄밀성과 취약성

 

마르크스주의는 개인의 자유를 계급의 이익에 종속시킨 결과로 엄청난 종교적 힘을 확보했다. 마르크스주의는 그런 교의에다 그것의 불가피성, 궁극적 성공의 확실성, 그리고 황홀한 지적 합목적성을 부여했다. 개인의 자유를 계급의 이익에 종속시키지 않고서는, 지금까지의 사회가 항상 계급투쟁 사회였기 때문에 계급 없는 사회가 도래한다는 것, 혹은 최상의 불평등이 진정한 평등을 이룩한다는 것을 믿도록 요구하는 것은 터무니없는 것으로 보였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이성의 힘에 의해 인간이 우주를 이해하고 자신의 상황을 개선할 수 있다고 생각한) 이성의 시대에서만 그런 것이 아니다. 그러나 마르크스주의는 개인의 자유를 계급의 이익에 종속시킨 결과, 독단적이고도 경직된 본질을 형성하게 되었다.

 

 그 결과 마르크스주위의 지적 체계가 너무나 엄밀하게 되어서, 마르크스주의는 마치 하나의 돌만 건드리면 집 전체가 무너질 그런 위험에 처해 있다. 목적으로서 또는 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약속으로서 자유의 포기 없이는 마르크스주의에 변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이것이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믿음이 극단적으로 취약하다는 점을 설명해주고, 자유롭고 평등한 사회의 실현이라는 목적 달성이 실제로 가능한가 하는 의문이 처음으로 제기되자마자 마르크스주의가 빠른 속도로 해체되었던 이유를 설명해준다.

 

악마의 추방

 

애처로운 노력

 

전쟁과 대공황이라는 새로운 악마들을 추방하는 것은 유럽 사회의 최고 목표가 되었다. 그것들을 추방하기 위해 유럽 사회가 취한 최초의 조치는 자본주의 및 사회주의 원칙에 기초한 전통 노선을 따라 더욱더 사회를 발전시키고 또 개선하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제1차 세계대전 후로부터 독일에서 나치즘이 등장하기 전까지 서구의 역사는, 그리고 뮌헨 회담 이전까지 서구의 민주주의는 사회와 개인이 이성과 정신적인 건강을 회복하려는 애석하지만 헛된, 비통한 시도였다.

 

대중의 심리 변화 : 전쟁과 대공황을 막을 수 있으면 자유와 평등도 포기할 수 있다

 

마치 공황이 경제 성장의 결과로 초래되는 것과 같이, 바로 그 전제(경제 성장) 때문에 불가피하게 발생하는 결과(공황)를 제거함으로써 사회를 유지하려는 시도는 본질적으로 모순일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유럽 전역이 점진적으로 인식했다.

 

특히 프랑스에서 인민전선의 실험이 실패로 끝나자 이에 대한 인식은 보편화되었다. 그 이후 대중은 의식적으로 또는 무의식적으로 전통적 사회를 포기하든지 아니면 악마를 퇴치할 시도를 포기하든지, 둘 중 하나를 선택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대공황의 직접적인 희생자들 가운데, 예컨대 1932년경 독일에서 뚜렷이 나타난 것으로 경기회복은 전혀 바람직한 것이 아니며, 차라리 사회체제 자체가 몽땅 붕괴해 버리는 것이 낫다는 모호한 감정은 국제 관계에 있어 처칠의 외교정책을 경제 분야에 그대로 옮겨놓은 것이다. 그리고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평화를 유지해야 한다는 유화론은 경제적 대가와 결과가 어떻든지 간에 다음의 공황에서는 실업을 무조건 막아야 한다는 확신과 궤를 같이 한다.

 

마치 유화론자인 체임벌린이 강경론자인 처칠을 압도했듯이, 심지어 다른 것 모두를 포기하는 대가를 치른다 해도 경제적 악마만큼은 반드시 퇴치해야 한다는 견해는 경제 분야에서 득세를 하고 있다. 대중은 악마의 세력이 지배하는 세계에서는 살 수가 없다.

 

그 결과 유럽 어디서나 경제인 사회에 대한 믿음과 신조는 단 한 가지 기준, 즉 그것이 악마를 불러들인다고 위협하는가 아니면 악마를 회피하고 또 퇴치한다고 약속하는가에 따라 심판을 받게 되었다. 악마를 퇴치해야 한다는 무엇보다 중요한 최고의 목적을 위해서라면 다른 모든 것을 양보하겠다는 이런 새로운 풍조는 경제 발전을 바람직한 것으로 받아들였던 대중의 태도를 완전히 바꾸어 놓았다.

 

 

강요된 민주주의와 획득한 민주주의

 

이탈리아와 독일의 공통성 : 국가 통일이 민주주의보다 더 중요했다

 

무엇이 이탈리아와 독일에서 민주주의를 붕괴시켰는가 하는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서는 먼저 이 두 나라만 공통적으로 갖고 있는 사회적·정치적 특성들 가운데 유럽의 다른 나라들은 갖고 있지 않은 것이 무엇인지를 확인해야만 한다. 그런 공통의 특성이 오직 한 가지가 있다. 그러나 그것은 다양한 방법으로 설명될 수 있다.

 

어떤 사람은 이 두 나라에서 부르주아 질서가 아래로부터의 혁명에 의해서가 아니라 위로부터 강요된 것이라고 주장할 수 있을 것이다. 다른 사람은 이 두 나라가 민주주의적 제도를 보유했고 또 수많은 부르주아와 프롤레타리아가 존재했지만, 이들 두 계급은 정치의 실권을 장악한 적이 없다고 주장할지도 모른다.

 

심지어 독일에서는 정치학 교수들, 그리고 이탈리아에서는 정치 법학자들이 내각에 참여하기는 했지만 사회적으로 별 영향력이 없는 무력한 존재였다는 사실이 지적되기도 했다. 마지막으로 이탈리아, 독일, 그리고 구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서부 지역은 유럽 민주주의의 동쪽 변방을 형성하는 것으로 간주할 수 있다고 말할는지도 모른다.

 

다시 말해 민주주의 제도가 한 번도 안정적으로 정착한 적이 없는 일종의 군사적 변방이란 말이다.

 

이 세 가지 각각 다른 주장들은 다음 한 가지 측면에서 공통점이 있다. 이탈리아와 독일 사람들이 19세기에 경험한 것 가운데, 정서적으로 그리고 감상적으로 대중을 한데 묶어준 가장 큰 사건은 부르주아 질서의 승리가 아니라 국가 통일이었다는 점이다. 이 두 나라에 있어 혁명은 국가가 일차적 목적이었고, 민주주의는 부차적이었다. 전쟁은 국가 통일을 위해 치른 것이었고, 전장에서 흘린 피도 국가 통일을 위한 것이었다.

 

부르주아 질서는 일차적으로 국가 통일을 위한 수단으로서만 수용되었다. 부르주아 질서의 신조와 구호는 결코 국민감정을 일깨우지 못했다. 부르주아 질서의 신조 그리고 구호의 위력은 그것들이 제시한 사회적 약속과 실체 때문이었다. 그것들은 대중의 마음속에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정서적·감상적 실체가 아니었다. 따라서 실체가 타당하지 않은 것으로 인식되자마자 부르주아 질서의 신조와 구호는 곧 존재 가치를 한꺼번에 상실했다.

 

다른 한편으로, 두 나라를 제외한 유럽의 나라들, 예컨대 영국, 프랑스, 네덜란드, 그리고 스칸디나비아 국가들의 경우 민주주의를 위한 투쟁은 사람들의 마음속에 생생한 경험과 전통으로 살아 있었다. 이들 나라에게 국가 통일은 훨씬 이전에 이루어졌기 때문에 민주주의 신조가 그 자체로써 정서적 가치를 갖고 있었던 것이다.

 

서부 유럽 국가로서 벨기에는 국가 통일과 독립 달성을 19세기에 이룩한 가장 큰 성취로 생각하고 자국의 전통과 국민감정에서 첫 번째로 중요하게 생각하는 유일한 국가이다. 그리고 벨기에는 렉시스트당을 통해 서구에서 처음으로 가장 심각한 파시즘 운동을 전개했다.

 

 

산업사회의 비경제적 운영 혹은 파시즘이 목표로 하는 비경제인 사회

 

긴급한 과제

 

이탈리아와 독일의 전체주의에서 가장 근본적인 특성은 비록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지만, 산업사회에 사는 개개인의 계급, 역할, 그리고 지위의 기초가 되는 경제적 만족, 보상, 그리고 가치를 비경제적 만족, 비경제적 보상, 그리고 비경제적 가치로 대체하려는 시도이다.

 

비경제적 산업사회는 파시즘이 추구하는 사회적 기적들 가운데 하나로서 그것은 산업사회의 속성인 대량생산 방식의 유지, 다시 말해 경제적으로 불평등할 수밖에 없는 생산 방식의 유지를 가능하게 해주고 또 의미 있는 것으로 만들어준다.

 

이것은 동시에 가장 긴급하게 달성해야 할 과제인데, 적어도 독일에서는 그렇다. 독일에서 자본주의 생산 방식을 1932년까지 그대로 유지하는 것은 확실히 불가능했다. 자본주의 생산 방식을 다른 어떤 방식으로 대체하는 것도 마찬가지로 불가능했다. 독일 사람들 절대 다수는 비록 제1차 세계대전 후 사회주의에 대해 신뢰를 잃어버렸지만, 자본주의 생산 방식에 대해서도 절망했었다.

 

그들은 자본주의 체제로 복귀하는 것도, 그렇다고 해서 사회주의 혁명도 원하지 않았다. 절망에 빠진 그들이 기대할 수 있는 것은 거의 혼동뿐이었다. 1934년 이후 독일과 마찬가지로 이탈리아도 산업사회의 기초가 되는 경제사회의 기초로서는 배제하면서도 동시에 산업사회의 형태와 생산 방식은 그대로 유지하는 하나의 해결책을 마련해야만 했다.

 

전체주의는 자본주의인가 혹은 사회주의인가

 

전체주의가 자본주의인가 아니면 사회주의인가 하는 질문 그 자체가 잘못된 질문이다. 물론 그것은 어느 쪽도 아니다. 파시즘은 어느 쪽도 타당하지 않은 것으로 단정하고 사회주의와 자본주의를 초월하는, 즉 경제적 가치에 기초하지 않는 사회를 추구한다. 파시즘이 경제에 대해 갖는 유일한 관심은 산업사회의 생산 수단을 원활한 상태로 유지하는 것뿐이다. 누가 그 비용을 부담하는가, 혹은 누가 이익을 보는가 하는 것은 부차적인 질문이다.

 

왜냐하면 경제적 결과는 주요 사회적 과제를 수행하는 과정에 전적으로 부수적으로 발생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파시즘이) 사회주의뿐만 아니라 사적 이익이라는 자본주의의 지상과제에 대해서도 동시에 적대시하는 이 명백한 모순이, 비록 엉터리이긴 하지만 파시즘의 본질적 의도를 일관성 있게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파시즘과 나치즘은 사회적 혁명이지만, 그렇다고 사회주의는 아니다. 그것들은 산업사회 생산 방식을 유지하긴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자본주의도 아니다.

 

노동자계급에게 과시적 소비 수단을 제공하다

 

이런 방향으로 나아가는 최초의 단계는, 사회적으로 전혀 혜택을 받지 못하는 최하층 계급의 사람들에게 경제적 특권층만이 누리던 비경제적 특혜를 제공하는 것이었다. 그런 시도들은 주로 파시스트 조직을 통해 노동자들의 여가 시간을 조직적으로 활용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이탈리아에서는 일과 후(Dopo Labor)라는 구호로, 독일에서는 즐거움에서 비롯된 힘(Kraft durch Freude)이라는 구호로 추진되었다.

 

물론 이런 강제적 조직 활동은 일차적으로 잠재적인 위험 계층과 적대 계층을 정치적으로 통제하기 위한 수단으로 고안되었다. 파시스트 조직은 경제적 부와 특권을 누리는 유한계급의 전형적인 비경제적 과시적 소비 기회를 노동자계급에게 제공했던 것이다. 노동자계급이 누리는 이런 만족은 그 자체로써는 경제적 가치가 전혀 없는 것이지만, 그것들은 사회적 지위를 표현하는 강력한 상징이었다. 그것들은 사회적 평등의 수단으로서, 즉 계속되는 경제적 불평등을 보상하려는 의도에서 제공되었다.

 

 

전쟁과 평화

 

군국주의에서 전쟁이 차지하는 역할

 

군국주의에 기초한 비경제인 사회는 실업이라는 악마를 퇴치하는 데 성공하고 있다. 그러나 군국주의에 기초한 비경제인 사회는 현대의 또 다른 악마의 위협인 전쟁을 합리적인 것이고 또 의미 있는 것으로 보이도록 만들 수 있어야 할 뿐만 아니라 전쟁을 명백히 바람직한 것으로 만들 수 있는 경우에만 그 자체가 성공적이고 또한 타당성이 있다고 증명될 수 있다.

 

 만약 전쟁 그 자체가 목적으로 수용되면 마치 부르주아 민주주의와 마르크스 사회주의가 경제 발전 그 자체를 목적으로 삼는 것처럼 파시스트 국가의 과제는 완성된다. 계급투쟁이나 경제적 불평등도 비경제인 사회에서는 중요하지 않아야만 한다. 그렇지 않으면 전체주의의 기적은 일어나지 않는다.

 

전체주의가 시종일관 주장하는 새로운 사회관은 만약 전쟁을 합법적으로, 그리고 최고의 목적으로 수용하지 않으면 신기루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전쟁 중 개인의 역할과 위치는 요컨대 개인이 사회에서 수행할 역할과 차지할 위치를 결정하는 근거를 제공해야만 한다. 히틀러와 무솔리니의 사회적·정치적 이념체계 전체는 당연히 영웅적 인간을 인간의 진정한 본성으로 삼고서 형성되었다.

 

희생의 승화 : 영웅적 인간의 등장

 

파시즘의 영웅적 인간의 중심 이론은 개인의 희생을 스스로 정당화하는 것이다. 이것은 인간에 대한 가장 오래된, 그리고 가장 깊이 뿌리내린 주술적 개념으로서 악마적 세력을 달래려 하거나 혹은 퇴치하는 데 항상 사용되어 왔었다.

 

 이 개념은 제1차 세계대전 후 이탈리아와 독일 모두에서 전후 세대의 젊은이들 사이에 널리 퍼진 것이다. 1차 세계대전이 그 불합리성과 어리석음을 드러내고 나자 국가의 가장 우수한 자식들을 끔찍하게 죽이고 또한 절멸시킨 것이 참으로 의미 없는 짓이고 헛된 일이라고 선언하는 것은 참을 수 없었다.

 

그들의 희생은 그것 스스로 정당화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의미 없는 산 제물의 희생을 마법의 공물로 승화시키는 것을 통해서만 바로 그런 비합리적인 전쟁의 요소들이 다시 합리화되는 것이다. 기계화된 전쟁 속의 고독한 개인,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개인의 희생, 그리고 맹목적인 운명의 장난 등은 마치 그것들 자체가 목적인 것처럼, 개인 희생의 자기 정당화를 통해 출현한다.

 

영웅적 인간의 개념

 

전체주의가 이런 식으로 희생을 찬양하는 것을 위선, 자기기만, 혹은 프로파간다 기술로 간주하는 것은 흔하고 우매한 실수이다. 희생은 가장 깊은 절망에서부터 우러나왔다.

 

1880년경 러시아의 허무주의가 당시 러시아의 젊은이들 가운데 가장 고귀한 집안 출신이자 또한 가장 용감한 젊은이들을 사로잡았던 것과 마찬가지로 독일과 이탈리아에서도 그것을 위해서라면 죽기라도 할 만한 진정한 가치도 없고 또 그것을 위해서 살아야만 하는 타당한 신조도 없는 세상과 타협하기를 거부했던 세대는 전후 세대의 모습을 최악으로가 아니라 최상으로 대변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허무주의와 마찬가지로 파시스트들은 희생의 자기 정당화를 종교적 열정과 진정한 확신, 완전한 이타심을 갖고 믿었다. 그러므로 도덕적 관점에서 볼 때 영웅적 인간관은 그것이 개인에게 삶의 목적과 의미를 제공하고 있는 것으로 여겨져 일견 타당한 것으로 보인다.

 

파시즘은 사회를 부정한다

 

그러나 영웅적 인간관은 사회에 대해 목적과 의미를 제공할 수 없다. 왜냐하면 영웅적 인간관은 생을 부정하기 때문이고 희생의 자기 정당화는 사회를 부정할 뿐만 아니라 사회를 파괴하기 때문이다. 무솔리니의 위험하게 살아라라는 슬로건도 개인에게 적용할 때는 괜찮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사회는 계속해서 유지되어야만 하는데, 그것은 또한 안전하게 유지되어야만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만약 개인이 자살을 하는 것으로 만족을 찾고 또한 성취감을 느낀다면, 사회는 전혀 의미를 가질 수 없게 된다. 결국 사회 실존의 유일한 합법적 형태로서 무질서 상태가 등장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바로 이런 내적 모순이 파시스트가 새로운 질서를 창조하려고 하는 시도를 좌절시킨다. 전체주의는 실업이라는 악마를 퇴치할 수 있고, 전쟁의 합리성을 개개인에게 (희생의 자기 정당화를 통해) 복원할 수 있다. 하지만 전체주의가 사회적으로 합리화를 완성하려면 (개인의 희생과 전쟁으로 인해 사회가 파괴되므로) 사회가 비합리적이고 또 의미 없다는 것을 증명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하다. 따라서 전체주의는 그것이 추구하는 기적을 수행할 수가 없다.

 

 

반유대주의의 원인

 

히틀러가 집권한 후 과연 유대인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해 대답을 시도한 수백 종이 넘는 저서들은 모두 핵심을 놓치고 있다. 유대인의 인종적·민족적·종교적 특성에 관한 가장 심원한 분석도 나치 독일에서 반유대주의가 발생해야만 하는 이유를 설명하지 못했다.

 

그것은 유대인들만이 갖고 있는 어떤 특성들과는 관계가 없고, 전적으로 나치즘의 내부에서 발생한 긴장 때문에 필요한 (즉 나치가 바라는) 유대인의 모습과 관련이 있다. 진정한 적은 유대인이 아니라, 유대인이라는 이름으로 박멸해야 하는 부르주아 질서인 것이다.

 

전체주의 파시즘이 목적이 있는 듯 보여질 수 있는, 그리고 파시즘 스스로 존재 이유를 정당화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파시즘이 만들어낸 악마들과의 성전을 치를 때뿐이다. 마찬가지의 논리가 반유대주의에 적용된다.

 

유대인과 비게르만이 박해당하고 또한 억압당하면 당할수록 더 심한 박해와 재산 몰수는 나치 체제의 자기주장과 자기 정당화를 위해 더욱더 필연적인 것으로 보여야만 한다. 유대인에 대한 박해가 건설적인 전체주의 이념의 창출로 이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은 유대인이 진정 악마이기 때문에 박해를 통해 유대인들의 힘이 줄어드는 것이 아니라 증가하는 증거로 간주되어야만 하는 것이다.

 

부르주아 정신을 악마의 화신으로 의인화하는 작업을 독일은 반유대주의를 수단으로 하여 달성한 데 비해, 이탈리아에서는 주로 프리메이슨에 대한 거부 운동으로 달성되었다.

 

그 이유는 이탈리아에서 프리메이슨은 사라지고 없었던 반면 부르주아 정신은 계속되고 있었으므로, 무솔리니는 인종차별 정책을 도입해야만 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평화의 개념은 나치 사회의 타당성을 위협하기 때문에, 나치는 평화라는 개념을 국제적인 로마 가톨릭교회라는 악마의 화신이 만들어낸 것이라고 덮어씌우지 않을 수 없었다.

 

이것은 다음과 같은 빈번한 질문에 대답한다. 독일 사람처럼 다른 인간에 대한 증오가 별로 크지 않은 사람이 어떻게 유대인에 대한 가차 없는 박해에 동참할 수 있었으며, 혹은 이탈리아 사람처럼 라틴 논리에 충만한 사람이 영국의 이든 수상에게 모든 잘못된 사태에 대해 개인적으로 책임을 덮어씌우는 정치적 반대 운동에 동참할 수 있는가 하는 질문 말이다.

 

 

새로운 사회

 

도덕적·사회적으로 우월한 인간이 필요하다

 

만약 서구 그 자체가 파시스트가 되어야만 전쟁에서 이길 수 있다면, 서구는 여전히 전체주의에 패배한 것이 되고 말 것이다. 그 외에도 (과거 전쟁의 역사를 보면) 그런 결정적인 전쟁에서 승리하는 사람은 비록 그가 전장에서는 취약하더라도 항상 도덕적·사회적으로 더 강한 사람이었다.

 

그리고 전체주의와 맞서기 위한 목적으로 서유럽 국가가 전체주의를 채택한다면 서유럽은 전체주의 그 자체를 목적으로 전체주의 파시즘에 집착하는 국가들보다 도덕적·사회적으로 더 취약하다.

 

경제인 개념을 초월한 새로운 인간 모델

 

어느 쪽이든 전체주의가 전쟁에서 승리한다면 유럽은 그 이전의 유럽 질서가 역시 완벽히 붕괴되었던 13세기와 16세기의 전체주의적 시대와 꼭 마찬가지로 장기간의 암흑과 절망의 시기를 참고 견뎌야만 할 것이다. 어쨌든 전체주의는 궁극적으로 (시간이 지나면) 저절로 극복될 것이고, 전체주의적 암흑시대로부터 궁극적으로 자유와 평등에 기초한 새로운 질서가 등장하게 될 것이다.

 

사회에서 자신들이 차지할 역할을 의식적으로 포기하고 자신들의 서재에 은둔했던 13세기 스콜라 철학자들의 체념과 비슷한 그런 체념으로부터 16세기 르네상스의 자유의 개념이 도출되었고, 지적 인간에 기초한 사회가 등장했다. 마찬가지로 (경제인 개념에 기초한) 부르주아 사회의 자유의 개념은 퀘이커파 성도들이 사회에 대해 의식적으로 체념하면서부터 성장한 것이다.

 

오늘날 우리는 동일한 현상을 관찰하고 있다. 또 다시 그것은 궁극적으로 (새로운 질서의) 재상으로 이어지게 할 것이다. 사회에 대해 스스로 체념하면서 경제인 개념의 한계에서 자유롭게 된 개인은 일반 개인들이 자유를 누리게 될 새로운 비경제적·사회적 실체를 창출하게 될 것이다.

 

3의 길 : 사회적 목적을 실현하는 자유평등 사회

 

그러나 이런 전망을 오늘날의 역사가들이 아득한 30년 전쟁(1618~1648)을 대하는 듯 그런 안일한 자세로 구경만 하고 있을 수는 없다. 우리는 다른 대안, 즉 제3의 길을 개발하지 않으면 안 된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기존의 경제인 사회를 토대로 그리고 그것들을 전제로 새로운 자유롭고 평등한 비경제인 사회(a new, free and equal noneconomic society on the foundation and from the premises of our existing economic society)를 개발해야 한다.

 

 만약 우리가 이런 임무를 실천하는 데 성공한다면, 우리는 동쪽(서유럽에서 본 동쪽이므로 독일을 의미함)으로부터의 공격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그 경우 전쟁은 단지 어떤 부정적인 가치에 대해서 싸우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인 가치를 위해 싸우는 것이 될 것이므로, 전쟁은 또 다시 합리적으로 보일 것이고 따라서 서구가 감당할 수 있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승리는 당연히 (적극적인 가치를 가진) 새로운 질서의 주창자에게 넘어갈 것이다.

 

개인의 존엄성과 자유가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그런 강력한 결정적인 힘을 가진 새로운 질서가 우리 (서유럽과 미국) 사회 내부에 숨어 있는지, 그리고 그 힘이 전쟁이라는 끔찍한 시련을 통해 발산될 것인지 우리는 알지 못한다. 그러나 적어도 우리는 그런 힘이 (존재하여 그것이) 발산되는 것을 막지 않는 쪽으로 대응책을 준비할 수는 있을 것이다.

 

서유럽 민주주의국가들은 최소한 현대 전쟁의 경직된 경제통제가 개인의 자유를 철저히 빼앗는 일이 없도록 노력할 수 있을 것이다. 비록 서유럽 민주주의국가들이 자본주의와 사회주의의 타당성과 합리성을 복구하기가 어려운 만큼이나 새로운 질서를 마음대로 창출하기가 어렵겠지만, (서유럽 민주주의국가들은) 개인의 자유에 어떤 의미를 다시 부여하는 방식을 통해, 경제인 사회에서 개인의 존엄성과 안전을 강화할 수는 있을 것이고 또한 강화해야만 한다.

 

공짜 점심은 없다

 

빈곤은 악이다. (그리고 빈곤이 아무리 악이라 해도) 빈곤은 자유와 해방의 완벽한 붕괴에 비하면 훨씬 정도가 덜한 악이다. 사회 정책들은 실제로 그리고 필연적으로 경제 발전을 방해한다.

 

 그러므로 잘못된 사회적 대책 그 자체뿐만 아니라 그런 대책은 경제적으로 유익한 것으로 증명된다는 자기기만은 경제적으로 감내할 수 있는 수준을 초월하여 불필요한 경제적 피해를 초래할 것이다. 방어할 수 있었고 또한 강화할 수 있었던 바로 그 자유가 그것 때문에 위태롭게 되었다.

 

그러나 필수적인 사회 정책들은 경제적으로 어느 정도 해롭다는 것을 인식한다면, 사회 정책들이 제공해줄 사회적 혜택이 그에 부수적인 경제적 희생과 비교하여 어느 정도인지 적절히 측정될 수 있을 것이다.

 

비록 우리가 그런 정책들을 형성하는 데 충분히 성공한다 해도, 그것들은 기껏 토대만 제공할 수 있을 뿐이다. 그것들 스스로 새로운 사회를 창조할 수는 없다. 새로운 사회는 (전쟁, 공황, 실업 등) 압력에 의해서만 공급될 수 있는 한층 더 근본적인 성격을 가진 힘(forces of a far more basic nature)에 의해서만 달성되어야만 한다.

 

 다음 10년간(1940~1950)은 유럽이 경제인의 붕괴로 빠져든 그 궁지로부터 자신을 끌어낼 수 있는 그런 힘을 찾을 수 있을지, 혹은 유럽이 자유롭고 평등한 인간의 개념에 기초한 새로운 적극적인 비경제적 사회질서를 찾기 전에 전체주의 파시즘에 점령되어 암흑 속에서 자신의 갈 길을 찾기 위해 방황해야만 할지 결정하게 될 것이다. 

Posted by kevin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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