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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혁이란 무엇일까요 ?
사전적 의미의 개혁이란 이렇습니다.
개혁 : 1.새롭게 고침.
2.체제나 사회 제도 등을 합법적·점진적으로 새롭게 고쳐 나감
- 출처 : 엠파스 국어 사전
첫번째 의미는 새롭개 고친다는 단순한 행동이지만, 두번째 의미는 한 국가의 체제나 사회제도를 합법적, 점진적으로 새롭게 고쳐 나감을 의미합니다.
쉽게 말해 무언가를 뜯어 고치는데 그 뜯어 고치는 행동을 법률에 저촉되지 않는 범위 내에서, 과격하거나 급하게 고치지 않고 점진적으로 고쳐 나간다는 의미라 하겠습니다.
새로운거라고 과격하고 무리하게 시도하는게 아니라는 말도 됩니다.
다음은 기원전 59년 3월에 공화정 로마의 로마시에서 일어났던 일입니다.
로마사를 살펴보면 로마전체를 뒤흔들어 놓은 사건이 간간히 일어 나는데, 그해의 로마에서는 로마가 계속 역사를 만들며 살아 남느냐 아니면 상처가 곪아 터져 국가가 붕괴하느냐를 결정하는 중대한 사건 하나가 일어 납니다.
바로 '농지법' 이라는 법률 하나를 놓고, 그 법을 통과시켜 로마의 아픈곳을 치료하느나 아니면 그 법을 저지해서 아픈체로 죽는날만을 기다리느냐 하는 방향설정을 놓고 두개의 다른 세력이 싸움을 벌입니다.
그해 로마의 집정관 ( 현재의 수상 )은 바로 유명한 율리우스 카이사르 와 비불루스 라는 귀족 이었습니다.
독재를 허용하지 않던 공화정 체제속의 로마에서는 정치적 수상이라고 할수 있는 집정관을 두명씩 선출해 서로를 견제하게 했습니다.
개혁적 성향의 카이사르는 민중적인 성향의 집정관이었고, 비불루스는 귀족들로 대표되는 원로원과 기득권층을 대표하는 집정관 이었습니다.
공화정 로마에서는 '카르타고 전쟁' 이후부터 발생한, 소수의 귀족들에 의한 대토지사유제가 자리를 잡아 작은 농토를 소유하고 있는 소농들이 설곳이 없어 중산층이 무너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를 걱정하던 호민관 '그라쿠스 형제'는 로마시민의 중핵을 이루고 있던 자영농을 보호하고 소수에 의한 부의 집중을 견제하기 위해 토지의 소유를 제한하는 '농지법'이라는 지극히 당연한 법을 원로원에 제출했지만, 대부분이 귀족들이었던 원로원 의원들은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키기위해 이 법률에 저항하고 급기야 그라쿠스 형제를 무참히 살해하게 됩니다.
그 이후에도 농지법의 부활을 들고 나왔던 호민관들이나 정치인들은 모두 원로원 의원들의 저항에 밀려 결국 말로가 비참하게 되고 공화정 로마의 상처를 점점 곪아 들어가서 사회의 근간을 흔들 정도가 되어 버리지만, 자신들이 가지고 있던 기득권을 보호하기 위한 원로원 의원들은 그것에 아랑곳 하지 않고 자신들의 이익을 챙기기에 분주했습니다.
그후 거의 백년 가까이 흘러 매년 선출되는 집정관에 새로 당선된 명민한 카이사르는 부의 재분배가 시급한 문제임을 직시하고 그라쿠스 형제가 시도했던 농지법을 다시금 원로원에 제출해서 통과를 요청했습니다.
하지만 또다시 자신들이 소유하고 있는 기득권을 침해 당했다고 생각한 원로원 의원들은 카이사르의 시도에 극렬하게 저항하고 법률의 무효성을 주장하게 되는데, 이에 카이사르는 할수없이 민회 ( 평민들의 집회 ) 에 이 법률의 제안을 요청 합니다.
당시의 로마에서는 만약 원로원에서 반대 했다 하더라도 평민들이 모이는 민회에서 다수결에 의한 찬성을 통해 제안하는 법률은 아무리 무소불위의 원로원이라 하더라도 할수없이 이를 받아들여야 했는데, 그때까지는 돈과 힘을 가진 원로원 의원들이 민회에 속한 평민들중 많은 이들을 자신들의 의도대로 조정할수 있었지만, 카이사르의 등장으로 그들의 그런 딴지는 더이상 통하지 않게 되는 상황이 되버렸습니다 .
사람의 마음을 움직일줄 아는 천재형 정치가가 바로 카이사르 였기 때문입니다.
그는 말로만 약속하거나 공약을 남발하지않고 자신이 약속한 것은 반드시 지키는 정치가 였을 뿐만 아니라, 심사숙고뒤에 결정한 일은 끝까지 밀고 가지만 그 전에 자신의 반대파에게 충분히 설명하고 납득 시키려는 노력을 기울이는데 게으르지 않았던 현명한 정치가이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측근이 개인적 욕심이나 능력부족으로 실수를 하거나 욕심을 채우면 그 사람을 절대 크게 쓰지 않고 능력있는 인재만을 골라쓸줄 아는 안목도 가진 정치가였죠.
광장에 모여 있는 평민들의 의사표시는 지금으로 치면 국민투표와 같습니다.
만약 그들이 이구동성으로 찬성을 하거나 반대를 하면, 법률을 제안한 쪽이나 반대한 쪽도 모두 결과에 승복해야 하는 결과를 초래 합니다.
국민을 직접 상대해서 해결을 보려는 카이사르에게 원로원 의원들은 자신들의 영향력이 크다는 자만으로 맞섭니다.
카이사르가 제출한 법률의 내용을 이미 알고 있었던 평민들 이었기에, 그날의 집회에서 사회를 맡은 카이사르는 농지법에 반대하는 대표적 의원인 카토라는 사람에게 반대의견을 개진해 달라고 요청합니다.
달변가 였던 카토는 연단에 올라가서 농지법의 부당성을 주장하기 시작했는데, 그의 연설이 법률의 반대를 위한 것임을 안 평민들은 연단으로 올라가 그를 붙들고 내려오려했고 끌려내려가 곤욕을 치룰뻔 했던 카토는 동료의원들의 보호로 간신이 자리를 벗어 납니다.
카이사르는 다음으로 자신의 동료 집정관 이지만 기득권층의 대표자였던 비불루스를 연설자로 지명했습니다.
하지만 동료인 카토가 평민들에게 끌려내려 갈뻔 했던 장면을 목격한 비불루스는 겁이나서 오늘 아침에 본 점괴가 좋지 않았다는 핑계로 연설을 거부 합니다.
그 다음으로 카이사르는 자신과 정치적 동맹자였던 크라수스에게 연설을 부탁하고, 로마최고의 갑부였지만 땅으로 돈을 모으지 않고 있던 크라수스는 간단하게 카이사르의 법안에 찬성 연설을 하고 그의 역할을 마무리 합니다. ( 사실은 그의 돈 모으는 방법이 더 비열했지만.....)
카이사르가 다음에 지적한 사람은 당시의 로마에서 그 어느 누구보다 인기와 명성이 높았던, 그리고 카이사르의 정치적 동맹자였던 폼페이우스라는 대중스타급 장군 이었습니다.
이미 카이사르와 손발을 맞추고 있던 뛰어난 장군이었던 폼페이우스는 카이사르의 농지법에 대한 지지 연설을 합니다.
이에 카이사르는 당시 로마 최고의 군사적 명성을 얻고 있던 폼페이우스에게 찬성연설 뿐만 아니라 법안이 통과되면 그후의 실시단계에서 누군가 책임지고 감시할 필요가 있다면서 그일을 폼페이우스에게 맡기고 싶다 말하고는 그의 대답을 기다리지도 않고 시민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 이 막중한 책무를 위대한 폼페이우스가 맡아주기를 바라지 않습니까, 여러분 ! "
시민들은 "와! 와!" 하는 환성으로 대답했고, 군인으로서의 능력은 뛰어났지만 폼생폼사의 전형적 인물이었던 폼페이우스는 그만 시민들의 요란한 환호성에 흥분해서 자신은 그런 막중한 책무를 맡을것이라 대답 하고는 다음과 같은 말로 마무리 합니다.
" 만약 누군가가 이 법안에 칼을 들이댄다면, 이 폼페이우스가 방패가 되어 막아설 것입니다 ! "
시민들은 좋아서 난리가 났습니다.
커다란 환호성으로 폼페이우스에게 답하고 법안의 통과를 원로원 의원들에게 요청합니다.
로마시민들의 농지법에 대한 찬성표시가 확실한것을 안 원로원 의원들의 똥줄이 탑니다.
그들은 카이사르의 동료집정관 비불루스에게 거부권을 행사하라고 그의 등을 떠밉니다.
당시의 로마에서는, 집정관 두명중 한명이 거부권을 행사하면 법안이 통과할수 없도록 되어 있었기 때문에 비불루스에게 거부권을 요청한거죠.
거부권을 행사하려고 등 떠밀려 연단에 나서려는 비불루스를 본 카이사르가 먼저 선수를 칩니다.
" 시민 여러분, 집정관 비불루스가 동의하지 않는 한 여러분이 아무리 간절하게 원해도 이 법안은 햇빛을 볼수가 없게 됩니다 ! "
시민들은 더이상 기다리지 않았습니다.
연단을 향해 몰려오는 군중을 보고 비불루스는 거부권 발동을 포기했을 뿐만 아니라 연단에서 곧장 집으로 도망을 처버렸고, 그렇게 해서 로마의 오랜 숙제였던 농지법이 빛을 보게되어 로마는 새로운 역사를 맞이하게 됩니다.
부의 집중이 어느정도 해체되고 재분배가 일어나게 되는거죠.
그런데 카이사르는 자신이 제출한 농지법이 원로원에 의해 가결되자 원로원 의원들의 권력을 제한하는 혁명적인 조항과 그들이 소유하고 있던 땅중에서 가장 비옥한 지방을 평민들에게 분배하는 추가조항을 얹어서 원로원에게 이중 삼중의 강타를 먹입니다.
이에 몇몇 원로원의원들이 반발하려 했지만 , 이미 대세를 파악한 원로원은 손을 들어 버리고 카이사르가 제출한 법률을 승인한후 평민들의 집회인 민회의 의견을 존중하겠다는 서약까지 하게 됩니다.
공화정 로마의 정치체제는 다수당제도나 양당 제도가 아니었고, 지금의 여당이라 할수 있는 원로원과 야당이라고 할수 있는 평민들의 민회가 있었습니다.
처음 평민의 대표였던 호민관 그라쿠스 형제가 제안한 농지법은 원로원 입장에서는 다분히 반체제 적이고 급진적인 법률이었지만, 여기에 이르러 이 농지법은 기득권층의 대표자라고 할수 있는 집정관의 발의와 원로원 의원들의 찬성으로, 반체제 운동의 열매가 아니라 여당과 야당이 협찬한 정책이 되어 버립니다.
쉽게 말해 야당이 제안했다가 퇴짜맞은 정말 필요한 법률을 여당지도자가 다시 보완해서 제안하고 다른 여당의원들을 구워삶아 통과시킨 법률이 되었다는 말입니다.
이렇게 통과된 농지법은 쓰러질뻔 하던 당시의 공화정 로마를 기사회생 시키고 후일 카이사르의 제정이 성립되는 기반을 제공해 로마가 1500년의 수명을 유지하는데 가장 큰 일조를 하게되죠.
개혁이란 이런 것이라 생각 됩니다.
내편 네편을 떠나서 자신이 속한 국가와 사회에 이득이 되는가 안되는가를 면밀히 따져본후, 설사 반대파가 제안했다 하더라도 이익이되는 것이면 모두가 합심해서 밀고 나가고, 정치를 하는 사람 뿐만 아니라 국민 대부분이 절실하게 필요성을 느끼고 납득하며 지지할수 있는 새로운것을 만들고 낡은 것을 고쳐 나가는 그런 태도 말입니다.
기존에 있던 것을 모두 뒤엎어 버린다고 해서 개혁이 되는것도 아니고, 새로 나온 신발이라고 해서 모두가 발을 편하게 해주는건 아닙니다.
여당이나 야당이라는것은 동전의 앞뒤와 같아서 언제 처지가 바뀌게 될지 모르는 것이고 그렇기에 서로가 서로를 무시하며 살지도 못하는 그런 인연을 가지고 있습니다.
여당에 반대하는 야당이 없는 정치체제는 독재국가나 공산주의 체제에서만 존재하죠.
그렇다고 야당은 반대만 하는 세력이 아니고 여당의 독주를 견제하고 발목을 잡기도 하지만, 국가의 이익이 될수 있는 사항에는 협조를 아끼지 말아야 하고 지키려는 노력 보다는 고치고 다듬어 가는 노력을 아끼지 말아야 할 세력입니다.
부부싸움 했다고 불난 집에서 자기 혼자 도망쳐 나오는 남편이나 부인은 없을 겁니다.
( 아....물론 그런짓을 능히 할수 있는 또라이들도 인간세상에는 가끔 존재합니다....)
중요한건 너와나를 따지기 이전에 먼저 우리 라는 공통분모를 깨달아야 하는것 같습니다.
그리고 혼자 가는거 보다는 모두 같이 가는것이 덜 힘들듯 하고 말입니다.
요즈음의 한국정치를 보고 문득 기원전에 어떤 도시에서 일어났던 사건 한가지가 떠올라 지꺼려 봤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