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제토론 자유무역과 보호무역의 역사적 비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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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번호 517791 | 2009.01.20 IP 118.223.***.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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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에야(지난 20-30년간)  보호무역주의가 필연적으로 경제에 부정적인 결과를 가져온다는 도그마에 의문을 제기할 만큼의 충분한 거시 경제적 자료들이 모아졌다.

 

관세의 역사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변화들에 연관되어 있는 6가지의 주요한 면들을 살펴보겠다. 첫째는 영국의 1846년 이후의 무역 자유화인데, 이는 영국에게 자유 무역 이론의 확증을 의미했다. 다음으로 유럽의 자유 무역과 1870-2에서 1891-3년의 유럽의 대 공황이라는 어려운 문제를 다루겠다.

 

자유 무역 이론들에게는 이 문제가 어렵다, 왜냐하면 무역 정책이 가장 자유주의적 단계에 도달했을 때 공황이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세 번째는  유럽의 1892년 이후의 보호무역주의로의 회귀의 결과들을 다룬다. 이 회귀는 “역설적이게도” 유럽의 경제적 팽창과 일치했다. 네 번째는 “보호무역주의와 대외 무역의 팽창”이다. 5 번째와 6 번째는 비유럽 선진국가 특히 미국을 다루는데, 이것은 보호무역주의의 긍정적 결과들을 확증시켜 줄 것이다. 마지막으로 제3세계에 대한 강제적 자유주의가 가져오는 결과들을 다루겠다.: 저발전으로 이끄는 길이 되는 자유주의.


1846년 이후의 영국의 자유주의와 경제성장.

 

주요한 의문은 영국의 무역 자유화가 영국 자체의 무역과 경제성장에 긍정적 영향을 미쳤는가 하는 것이다. 수출과 GNP에 대한 연간 통계는 이 무역 정책의 주요한 변화가 대외 무역만이 아니라 경제 발전의 속도에도 가속도와 동반되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러나 이것이 무역 자유화의 결과인가?

수출 팽창은 1846년 이전 10-15 년 전에 벌써 엄청나게 빨랐고(연간 5%), 그 해 이후로 더 가속화 되었다. 1843/7에서 1857/61 사이에 영국의 수출 규모는 영간 6%이상이었다.

 

이 성장은 자료가 있는 시기(1697) 이후로 가장 최대이었다는 것을 강조할 가치가 있다.

 

경제 성장도 마찬가지로 이 기간에 예외적이었다. 1843/7에서 1857/61 사이에 GNP 성장률은 연 2.4%였다. 이 기간은 아일랜드 인구의 감소로 인구 성장률이 매우 낮았기 때문에(연 0.2%) 1인당 GNP 성장률은 2.2%였다, 그 당시로는 기록된 것 중 가장 높은 것이었다.

1800년에서 1945년 사이에서도 확실히 가장 높다. 아마도 산업혁명에서 1945년 사이에서도 그럴 것이다.

 

무역이 영국에게 극히 이로웠다는 것이 명백하다. 영국 산업은 매우 중요한 기술적 분야에서 선도를 유지하고 있었는데, 더 큰 시장을 발견했다. 그러나 이 시장은 본질적으로 유럽의 바깥에 있었다. 1839/41과 1859/61 사이에 유럽으로의 수출은 연 4.5% 증가했지만 , 다른 곳으로의 수출은 연 5.1% 증가했다. 이 제국 무역의 팽창은 유럽의 중요성을 축소시켰다. 1830년에 유럽으로의 수출은 영국 총 수출의 48%였지만 ,1860년엔 34%를 넘지 못했다.

 

마지막 %는 영국 수출과 다른 유럽 국가들의 수출의 근본적인 지리적 구조의 차이점을 밝혀준다. 1860년에 다가올 무렵에는 유럽대륙의 다른 유럽 구가들에 대한 수출은 전체의 82%나 되었다. 영국의 유럽으로의 수출의 상대적으로 작은 비율은 1850년대에 유럽 인들을 자유주의로 전환시키려는 시도를 설명해주고 그 자체는 유럽대륙의 보호무역주의에 의하여 설명된다.

 

그러므로 , 전 세계적으로 말하면, 최초의 자유 무역 실험은 긍정적인 것이었고, 이것은 1860년 이후에 대부분의 유럽 국가들의 정책에 중요한 영향을 주었다. 그러나 1846년경의 영국의 상황의 유일함을 잊어서는 안 된다.

 

영국은 산업 혁명의 발생지였을 뿐만이 아니라, 이 혁명은 영국에서 최고조에 달했는데 반해, 대부분의 다른 나라들은 반세기 정도 뒤쳐져 있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기술적 선도를 의미한다. 최후로 그러나 중요한 것으로, 이 선도는 장기간의 고 관세 장벽에 의하여 달성되었다.


자유 무역과 유럽 대공황

 

19세기에 유럽에서 자유 무역이 최고조에 달한 기간은 1866에서 1877년까지 12년간이다. 그 중간에(1870-73)유럽의 대공황(great depression)이라고 불리게 된 것이 시작되었다. 유럽 무역의 규모에 관한 한, 추세의 역전은 1873에 시작되었다. 부분적으로는 영국의 대외 무역의 급격한 팽창의 결과로, 유럽의 수출 규모는 1846-60 기간에 급속하게 성장했다.

 

 자유 무역의 최초의 10년간(1860-70)은 벌써 이 성장 추세의 눈에 띌 정도의 하락으로 특징지어 지는데, 그러나 유럽 대륙에는 거의 감속이 없었다.  그러나 1873에서 1893/4까지 유럽의 수출 규모는 단지  연간 약 2.3% 성장했는데, 그 전 십년들에는 연 5-6%였다. 유럽 대륙에게는 이 감속이 더욱 두드러진다.

 

이 심각한 무역 성장의 하락은 불황의 한 면일 뿐이다.  경제 성장의 경우에는 전환점은 그보다 약간 더 일찍 왔다.:1868-70에. 유럽의 1인당  GNP  성장률은 1850년대와 1860년대의 연간 1.6%에서 다음 20년간에는 0.6%로 떨어졌다. 다른 말로 하면, 이 불황 국면에서 유럽의 경제 성장은 1830-40(연 1%)보다 더 낮았다.

 

  자유 무역= 불황?  보호 무역= 경기 회복?

 

특기할 중요한 점은 불황이 자유주의가 피크일 때에 시작되었다는 것만이 아니라 유럽 대륙의 보호무역주의로의 회귀가 진짜로 효력을 나타내기 시작할 때인 1892-4년쯤에 불황이 끝났다는 것이다. 이것은 관세 정책이 경제 발전에 미치는 영향에 대한 중요한 의문을 제기한다. 어떻게 그리고 어느 정도로 자유 무역이 유럽 경제의 불황을 야기했는가? 그리고 어떻게 보호 무역이 경기회복으로 이끌었는가?

 

무역 정책의 역할에 대한 최초의 단서는 불황은 영국에서 덜 심했고 경제적 회복은 주로 보호 무역으로 돌아간 나라들에게 혜택을 주었다는 사실에서 발견될 수 있다. 1850-70과 비교해 볼 때 1870-90년대 동안에는 영국에서 1인당  GNP  성장률의 감소는 30%였다(연 1.6%에서 1.1%로)그리고 유럽 대륙은 80%였다(연 1.1%에서 0.2%로). 더구나 보호 무역 시기에 유럽 대륙은 약  1인당 연 1.5%로 성장한 반면에 , 영국에서는 성장률이 계속적으로 떨어졌는데 연 약 0.7%였다.

 

두 번째 단서는, 이것은 경제 발전에 미치는 무역 정책의 결과에 대해 훨씬 더 많은 것을 우리에게 말해 주는데, 일반적으로 유럽과 특수하게는  유럽 대륙에서의 주요 부문들의 진화의 분석에서 발견될 수 있다. 유럽 전체로서는  GNP  성장률의 감소는 대부분 농업 생산의 성장의 감소의 결과이다.

 

유럽 대륙에게는 1870/74에서 1888/92사이에 연 약 0.2%의 (농업)생산의 하락(drop)도 있었다. 그 전 수십 년들에는 연 3-4% 성장이었다. 유럽 대륙에서의 농업 위기는 대부분 해외 농산물의 유입에 의하여 완전히 설명될 수 있다. 그런데 그것은 다시 운송비의 감소와 1866과 1872년 사이에 일어난 곡물에 대한 보호 관세의 전면적 철폐의 결과이다.

 

농업에 관한 한 관세 “무장 해제”는 더욱 더 완전 했는데 이는 이에 관해서 자유 무역이론과 보호 무역 이론이 일치했기 때문이라는 것을 주목해야 한다. List는 농업에 대해서는 보호주의적 “학습”기간을 주장하지 않았다. 미국 곡물의 유입은 미국의 남북전쟁이 끝날 무렵 시작되었고 급속하게 유럽 전체의 생산에 비교해도 매우 중요하게 되었다. 농업  경제라고 묘사될 수 있는 프랑스에서조차 밀의 수입은 1851-60사이에 국내 생산의 0.6%였다가 1888/92년에는 19.0%로 올랐다. 벨기에서는 , 수입은 1850경에는 6%에서 1890에는 100%로 올랐다. ....

 

이 곡물의 유입은 특히 농부들에게 영향을 주었다, 왜냐하면 수입품의 낮은 가격은 곡물과 일반 농산물의  국내가의 하락으로 이끌었기 때문이다. 환금 작물 중 곡물이 차지하는 비중이 그것이 전체 농산물에서 차지하는 비중보다 훨씬 더 중요하다는 것을 주목해야 한다. 그 결과 유럽 대륙의 거의 모든 국가들의 농부의 생활수준은 정체되거나 떨어졌다.

 

농부들의 생활수준의 하락 또는 정체는 명백하게 농업 부문 내에서만이 아니라 그 당시 유럽 대륙에서 농업 부문이 전체 생산의 60%를 차지한다는 면에 비추어 보아 그 바깥에서도 중요한 결과들을 가져왔다. 이 부정적인 추세는 산업 제품과 건설 부문에 대한 전반적인 수요에 영향을 미쳤다.  유럽 나라들에 대한 그것의 결과는 1870년대와 1880년대에 미국이 유럽의 주요 곡물 공급자라는 사실에 의해 더 악화되었다.

 

미국의 보호 무역 정책들 때문에 미국이 더 곡물을 유럽으로 수출한다고 해서 그에 상응해서 유럽 제조품을 그 만큼 더 사지는 않았고 결국 유럽과 미국 사이에 무역 수지 불균형이 나타나게 되었다. 1870년경에 북미에 대한 유럽 대륙의 무역 적자는 그 지역으로부터의 수입의 5-6%였지만 , 1890년대에는 32%, 1900년경에는 59%까지 달했다.


유사한 진화 그러나 상이한 결과

 

유럽 대륙으로의 음식물 수입이 갖는 부정적인 효과와 25년전의 영국에서의 같은 정책이 갖는 긍정적인 효과와의 외관상의 모순은 그 정책이 채택될 때의 두 곳의 상이한 경제적 발전 단계에 의하여 본질적으로 설명될 수 있다. 영국에서는 1846년에 농업 노동 인구는 총 노동 인구의 약 22%밖에 안 되었고 제조업 노동인구는 32%였다. 1860/62년에 유럽 대륙의 총 노동 인구의 63%가 농업 부문에 있었고 제조업에는 18-20%정도였다. 유럽 대륙에서 산업화된 나라들도 노동인구의 52%가 농업에 종사했고 제조업 종사자는 단지 19-21%였다.

 

이러한 확연한 차이는 농업에서 산업으로의 노동의 전이는 유럽 대륙에서는 영국에서 보다 최소한 2배는 빠른 비율로 일어났고 대외 배출구가 영국의 선진적 단계 때문에 영국과 같은 역할을 할 수 없을 때에 일어났다는 시사해준다. 이것은 일어나지도 일어날 수고 없었다. 두 유형의 경제와 두 기간 사이에 또 다른 두 가지 구조적 차이가 나타난다. 1846년이 되어서는 영국은 유럽 대륙이 1860년경에 하던 것보다 더 높은 수준의 음식물 수입을 하고 있었다.

 

 이것은 1770-80에 시작된 매우 느린 과정의 결과라는 것을 명심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 과정은 그러므로 생산요소들(자본과 노동)이 농업에서 산업으로 점차적으로 이전하는 것을 허용했다. 둘째, 1846년경에는  비유럽 곡물이 대량으로 이용될 수가 없었고 더구나 높은 이송 비용이 그러한 일을 비경쟁적으로 만들었다. 그러므로 농산물에 대한 충격은 더욱 제한되어 있었다.


보호무역주의와 대외무역의 팽창

 

이 절의 제1차적인 목적은 자유무역 지지자들에게는 진짜 역설이 되는 사실들을 제시하는 것이다. 보호무역의 재 강화 기간은 무역의 더욱 급속한 팽창과 일치했을 뿐만이 아니라 , 더욱 역설적이게도, 유럽에서 가장 보호무역주의적인 국가들이 가장 급속한 무역 팽창을 경험했다.

 

비록 이것이 보호무역주의가 국제 무역을 발생시킨다는 증거로 취해질 수가 없다고 해도, 보호무역주의는 언제나 반드시 그것을 방해하지는 않는다는 것을 보여준다.

 

다른 한편, 무역 팽창은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단지 경제 성장을 달성하는 하나의 수단에 불과하다. 만일 동일한 수준의 재화와 서비스의 생산이 대외 무역으로 또는 그것 없이 이루어진다고 해도 효과적인 소비를 위해 사용될 수 있는 재화와 서비스의 양은 (다른 것들이 같다면) 자유 무역이 없을 때가 더 크다고 주장할 수 있다,

 

왜냐하면 이 경우에는 운송이 더 적고 또한 그 재화들을  분배하는데 필요한 서비스가 더 적기 때문이다.

 

표4.1에 제시된 자료들은 보호무역 기간들이 경제의 상이한 부문들에서만 아니라 무역에서도 얼마나 많이  회복을 촉진하지는 않았다 해도 최소한 동반했는가 하는  것을 보여준다.

보호무역 정책을 다시 채택한 후의 20년간 GNP 규모의 연간 증가율은 100%이상 증가했고

수출 규모는 35% 이상 증가했다(그전 20년과 비교하여).

 

모든 국가들에서(이태리를 제외하고) 보호무역 조치들의 도입은 정책의 변화이후 10년간 경제 성장에 두드러진 가속도를 가져왔고 그 조치가 언제 도입되었나에 관계없이 일어났다. 그 다음 10년간은 보호 무역이 더 강화되었는데, 통상적으로 경제 성장이 더 가속화 되었다. 모든 국가들에 있어, 1909-13은 더 높은 경제 성장에 의해 특징지어 진다.

 

다른 한편 , 실제적으로 무역 정책에 변화가 없었던 영국에서는,  처음에는 정체 기간이 있었고 그 후에 경제 성장률의 뚜렷한 하락이 있었다. 더욱이 유럽 대륙에서는 모든 국가들이 보호 무역을 강화했을 때 성장률이 피크에 달했다.

 

대외 무역에 관한 한, 자유 무역을 포기한 이후 최초의 10년간에는 팽창의 거의 보편적인 감속이 눈에 뜨인다. 그러나 두 번째의 10년간에는 거의 모든 보호무역 국가들에서 수출규모의 성장률이 보호 무역주의 채택 이전 10년간 보다 더 빨랐다. 더군다나, 이것은 중요하다, 이 20년 동안에 무역의 팽창은 보호 무역주의를 채택한 국가들에서가 자유 무역을 고수했던 영국에서 보다 더 빨랐다. ..

 

경제 성장에서와 마찬가지로, 무역 팽창은 모든 국가들이 보호무역을 증가했을 때 더 컸다. 이것은 경제 성장이 무역의 엔진이지 그 역이 사실이 아니라는 명제에 대한 부분적 증거가 된다.


 

 

비유럽 선진 국가들에서의 무역 정책과 경제 발전

 

여기에서는 미국에 집중하자. 19세기를 통틀어 그리고 사실상 1920년대 말까지 “보호무역주의의 모국이자 요새”는 세계에서 가장 빠른 속도의 경제 성장을 경험했다. 우리가 1829/31에서 1909/11에만 한정하면(1800-30사이의 믿을 수 없는 자료를 피하고 제1차 세계대전의 다기한 충격들을 제외하기 위하여) 1인당 GNP 연 성장률은 다음과 같다:

 

미국; 2.4%    서유럽;1.2% 유럽국가중 가장 빠르게 성장하는 국가들; 1.5-1.6%

총 GNP로 따지면 차이는 더 커진다. 왜냐하면 미국의 인구는 이 기간동안에 유럽의 인구보다 훨씬 더 빠르게 증가했기 때문이다.

 

분명히 미국의 성공은 전적으로 관세 정책 때문만은 아니다. 최소한 3개의 다른 요인들이 작용했다. 농업에서 인구비례 높은 토지 비율 . 산업을 위한 광범위한 원료의 사용가능성. 유럽에서의 막대한 규모의 노동과 자본의 유입.


미국의 성공담은 더 보호무역적일 때 더 컸다.

 

이 기간에 대한 현대의 의견에 관한 한, 아주 최근까지는 자유 무역의 도그마가 너무 강해서 1980년대 전에 출판된 논문 중에서 미국 산업에 미친 보호무역의 영향이 긍정적이라는 것을 보이는 논문을 하나도 발견하지 못했다. 그 도그마에 도전한 최초의 논문은 Mark Bils의 것인데(19세기 전반부를 다루었다), 그것의 주요 결론은 다음과 같다.


“나의 발견은 관세의 경제적 중요성에 대한 콘센서스 견해와 더 이상 상충될 수 없을 정도이다. 위의 계산은 1833년과 마찬가지로 보호 무역을 제거했더라면 면직 산업에 부가된 방대한 대부분의 가치들이 없어졌을 것이라는 것을 증명해 보인다.”


덜 보호무역적인 기간 즉 1846년과 1861년까지 무엇이 일어났는지 살펴보자. 여기에도 또한 구체적인 연구가 없다. 현대의 관찰자들에 의하면, 매우 온건한 보호무역과 온건한 자유주의의 중간의 정책들은 경제생활에 눈에 띌만한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

 

1846년의 관세 입법의 비판자들은 그것이 미국의 산업 과정을 미약하게 퇴보시켰다는 것 이상을 주장할 수 없다.  사실상, 그것의 효과는 어느 쪽으로든 작았을 것이다. 현제의 자료로는 더 이상 말할 수가 없다.1840년대와 1850년대의 자료는 지금도 믿을 수가 없고 1840년대 이전의 것들은

 

“통계적 암흑시대”에 속한다. 1인당 GNP 규모에 대한 자료들은 1820년에서 1840년까지 연 성장률이 대략 2.1%, 1840에서 1860까지가 1.7%라는 것을 보여준다. 경제 성장이 감속되었을 가능성이 있지만 , 이 기간 동안의 다른 국가들의 성장률(연 0.9%)과 연관해서 보면 연 1.7%라는 이 성장은 여전히 상당히 빠른 것이다.

 

가장 흥미 있는 기간은 유럽대륙을 그들이 가장 자유주의적 기간에 강타한 “대 불황”의 기간인 1870-92년이다. 이 기간 동안 미국은 보호 무역을 증가시키고 있었고 매우 빠른 성장의 국면을 거쳐 갔다. 정말로 이 기간은 미국의 전 경제사 중에서 가장 번영한 기간으로 간주될 수 있다. 1830년과 1870년 사이에 경제 성장으로 보아 최고의 20년은 1850-70인데,

 

1인당 GNP는 연 1.8% 증가했다. 1870년과 1890년 사이에, 그 연 성장률은 2.1%였다. 그 다음 최고의 20년은 1890-1910인다(연2.0%). 그러므로 미국의 경제 성장에서 최고의 20년은 미국의 무역 정책이 보호무역이고 반면 미국의 주요 경쟁자들이 자유주의적일 때 발생했다.

 

캐나다에서는 얘기가 약간 다르다. 캐나다는 1879년에 보호무역 정책을 채택했다. 1879년 전후 10년 또는 20년간을 비교하면 , 균형은 자유주의로 기운다. 그러나 30년간을 택하면 결과는 그 반대이다. 더구나, 1890=1910 기간은 캐나다의 최고의 그리고 세 번째로 최고의 10년들이 있다.

 

 더욱 중요한 것은 이 보호 무역 기간이 캐나다 산업의 정초로 이끌었다는 사실이다. 캐나다의 1인당 제조업 생산의 수준은 1860에는 선진국들의 40-45%였지만 1913년에는 82-7%로 증가했다. 똑 같은 것이 호주에도 적용된다. 거기에도 보호무역 관세가 산업화를 가져왔다.


제3세계에 대한 강제적 자유주의의 부정적 결과들

 

19세기의  제3세계의 강제적 경제 자유주의가  그들의 산업화의 지연을 설명하는 주요한 요소라는 것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19세기 초부터의 대량의 저렴한 제조품의 수입은 탈산업화 과정으로 이끌었다. 주요한 예를 하나 들면: 1813년에 동인도 회사의 무역 독점권이 폐지되었을 때, 영국 섬유의 인도로의 유입이 상당히 증가했다. 백만 야드의 면 의류가 1814년에 수입되었다.

 

1830년에는 5100만 ;1890년에는 20억5천만. 이 유입은 기술 혁신의 결과로서 영국 방적 공업의 실질적인 진보 때문임이  확실하다. 1830년에는 근대적 장비를 사용하는 영국 노동자의 생산성은 평균 방적사에 대해 인도나 다른 전통적인 노동자의 생산성에 비해 10-14배나 되었고 우량의 방적사에 대해서는 200-300배나 더 높았다. 그 당시에는 소득의 격차 따라서 봉급의 격차가 제한되어 있었다. 영국에서는 실질 1인당 GNP는 인도보다 2-3배 이상 높지 않았다. 당시의 지배적인 노동 조건의 관점에서 보면 임금 차는 더 작았을 것이다.

 

이것은 커다란 이윤과 높은 운송비용을 감안하더라도 그러한 생산성의 차이 때문에 인도에서의(다른 곳도 마찬가지로) 실의 최종 소비자 가격은 분명히 그 지방 생산 비용보다 훨씬 더 작았고 그 지방에서는 이미 임금 수준이 매우 낮았기 때문에 비용을 더 많이 줄일 수가 없었다. 그러므로 이 사실과 개방 시장 정책을 결합하면 상당량의 수입은 피할 수 없게 된다.

 

인도는 긴 리스트들 중의 단지 첫 번째 희생자다. 정치적으로 독립적인 제3세계 국가들 조차도 서구의 제품에 문을 열도록 강요당했고, 이 것 때문에 제조품의 유입이 있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1860년에는 영국, 프랑스, 미국에서 라틴 아메리카로의 면화재의 연간 수출양은 거주자 1인당 10.6평방미터였고 그 숫자는 중동에 대해서는 7.0평방미터였다.

 

이 통계는 이 지역들에서의 섬유 산업의 거의 완전한 몰락(disappearance)를 설명해준다. 철강 산업의 경우는 더 심했다. 이 부문에서 탈산업화 과정은 더 두드러졌다:


보호무역주의의 부정적인 결과들에 대한 것보다 더 지배적인 이론에 반하는 경우를 찾는 것은 어렵다. 최소한 19세기 세계 경제사에 관한한 그렇다.  모든 경우에 보호무역은 산업화와 경제 발전으로 이끌든지 또는 최소한 병행했다.

 

또한 자유주의의 4개의 예에서 3개는 부정적 또는 매우 부정적인 결과들을 가져왔다. 예외는 1846년 이후의 자유무역 기간의 영국인데, 그 때는 이 정책은 아마도 완전 관세 철폐이후의 20-30년을 특징지었던 경제 발전을 가속화 시키는데 중요한 요소였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산업혁명의 요람으로서 1846년에는 다른 선진국에 대한 상당한 우위를 점하고 있던 나라에 대한 것이다. 더구나, 그 당시에 영국은 1세기 반의 보호무역을 하고 난 뒤이다. 


 

Posted by kevin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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