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06월 24일 (수) 16:11:57 김상일 hanism@kornet.net
김상일 (전 한신대 교수)

이명박 정부 1년 반이 지나가는 즈음 그의 국정 시책의 지표였던 ‘실용주의’가 그 정체를 거의 드러내고 있다. 즉, 그가 말하고 있는 실용주의란 사대주의의 다른 표현임이 분명해 졌다. 잃어버린 10년을 실용주의로 되찾겠다던 그의 약속은 미국에 ‘퍼 날리기 외교’로 그 전모가 드러나고 있다. 그가 적용한 실용주의는 어느 하나 제대로 된 것 없이 그 모습이 드러나고 있다. 되로 주고 말로 받을 수 있는 남북 경협을 파산 내지 파탄 지경으로 내 몰고는, 걸핏하면 미국에 전화하고 일본에 전화하고, 전화 하다 안 되면 안달박달 달려가고, 실로 이것이 그의 실용주의 외교 방식이라면 우리는 참담함을 금할 수 없다. 

백남주 한국민권연구소 상임연구원의 ‘이명박 정부의 대결정책이 부른 한국경제 손실’에 의하면 남북경협이 완전 차단되면 한국 경제가 입을 손실이 무려 7조 4천억 원에 달하고 8천 800명이 일자리를 잃을 것이라고 했다. 개성공단 사업이 중단되면 총 손실이 1조 3600억 원이라고 한다. 금강산 관광중단으로 작년 7월부터 손실이 1000억 달러이다. 여기서 협력 업체의 손실은 계산하지 않은 것이다. 이것은 직접적인 손실이고 간접적인 손실 역시 이만 저만이 아니다. 대외 신인도 추락은 말할 것 없고, 미국이 강요하는 군수 물자를 사들이자면 국방비를 증액해야 하는 데 만약에 남북 화해 협력을 하면 총 181.6억 원을 줄일 수 있다. 중소기업이 입을 손실은 여기서 계산도 안 한 것이다. 여기에 남북 철도를 연결했을 때에 가져올 이익은 어마어마하다. 

그런데 계산에 누구보다 밝을 이명박 대통령은 왜 이 엄청난 효과를 내는 남북 교류에 그의 실용주의를 적용하지 않는 것인가? 삼척동자도 의문을 가지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이유는 있었다. 그의 실용주의의 적용대상이 딴 곳에 있었기 때문이다. 다름 아닌 이명박 정부는 자꾸 자꾸 정권을 재창출하고 다시는 좌파 빨갱이들에게 정권을 넘겨주지 않으려면 보수 우익 지지 층을 차돌 같이 단단하게 묶어 놓아야 하고, 그 방법은 북에 강경 대응하고 다른 한 쪽에서는 미국과 일본에 철저하게 매달리는 사대주의 외교를 펴는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면 이명박의 실용주의는 헛발질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 분명해진다. 

그의 실용주의는 서민 경제를 위하자는 것도 민주주의를 지키자는 것도 남북화해를 하자는 것도 아닌 철저한 자기 기득권을 지키기 위한 것임이 그 용도가 분명해졌다. 우리는 지난 1년 동안 바로 이것을 확인한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남은 실천 과제는 무엇인가. 강희남 목사님의 유언 말씀 “이명박을 내치자” 대로 하는 것이다. 우리나라 대통령의 외교는 어떤 면에서 간단하면 간단하다. 그것은 일본이 하자는 그 반대로만 하면 되고, 민초들이 퍼뜨린 “미국 믿지 말고, 소련에 속지 말라, 일본이 일어난다”이다. 이 한 구절만 머릿속에 명심하고 실천에 옮기면 그것이 우리 외교의 전부이다. 그러나 이명박 정부는 사사건건 그 반대로만 하고 있다. 도대체 그 지독한 사대주의가 어디서 유래한 것일까? 삼국사기에는 ‘유명환-이명박 조’와 일란성 쌍둥이 같은 조가 있었으니 바로 ‘김유신-김춘추 조’다. 

유명환-이명박 조는 김유신-김춘추 조와 닮았다 

유명환 외교통상부 장관은 PSI(대량살상무기 확산방지구상) 참가를 해 낸 것이 무슨 큰 공로나 세운 것처럼 자랑하고 있다. 그리고 한 수 더 떠 유엔 안보리 결의안을 성사시킨 것도 자기 실력 때문이라고 장광설을 늘어놓았다. 아마도 이명박 주변에서는 이런 일들이 모두 수훈과 전공 감으로 여겨지는 것 같다. 대부분의 우리 국민들은 유명환-이명박을 한심하게 보고 있는 데도 말이다. 지금 이명박과 유명환이 한 조가 되어 노는 꼴은 마치 김부식이 써 놓은 삼국사기에서 김춘추와 김유신이 한 조가 되어 노는 꼴과 너무 흡사하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기록돼 있는 김유신과 김춘추의 사대주의 행각을 유명환-이명박의 그것과 대차대조표를 만들어 한 번 읽어 보자. 625년 당태종이 즉위할 무렵 신라는 김유신과 김춘추가 모든 실권을 한 손에 거머쥐고 있을 때이다. 김춘추는 진평왕의 외손으로 나중에 태종무열왕이 된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문무왕조에 의하면 김춘추는 나이 60이 되었는데도 중국 황제 앞에 무릎을 꿇고 백제와 고구려를 칠 것을 요구했는데 그 모양이 측은하기 그지없다고 기록하고 있다. 신라는 임금을 당나라 황실 친척으로 바꾸라는 요구까지 수용하면서 당의 군대 파병을 간청한다. 이 사대주의의 DNA가 1,500년이 흐른 지금에도 수시로 출몰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자 당은 두 가지 조건을 내 건다. 고구려를 칠 경우는 요동지방을 당에 내 주고 백제를 칠 경우에는 신라의 임금을 당 나라 황제의 친척으로 바꾸고 동시에 당나라 군대의 신라 파견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었다. 647년 김춘추는 직접 당태종을 찾아가 고구려뿐만 아니라 백제까지 치도록 애걸한다. 이에 둘 사이에 비밀 협정이 이루어져 평양 이남 백제 땅은 신라가 그 나머지 모든 땅은 당이 차지한다는 밀약이 이루어졌다. 

나라를 분단해서라도 단독 정부를 세우려는 오늘날 보수우익들의 유전자가 이렇게 1,500여 년 전에 만들어졌던 것이다. 한반도 분할 통치의 역사는 사실상 이때부터 거론되지 않았나 여겨진다. 그 이후 임진왜란 때에도 일본과 명이 한반도를 분단시켜 나누어 가지려 했다. 이에 대해서는 따로 논하기로 한다. 8027인가 하는 작전은 일본이 원산을 점령하고 북에서 중국이 밀려 내려오면 그 중간 지점에서 선을 긋자는 작계라는 끔직한 소리가 부디 낭설이기만을 바란다. 

옷을 바꿔 입고 스스로 사대를 청해 

참으로 되돌아 볼 때에 이 모든 하나하나의 사건이 모두 오늘 우리 후손들이 짊어지고 있는 수난의 씨앗이 되고 말았다. 당태종이 죽고 그의 아들 고종이 황제가 되자 사대주의 외교는 더 극성을 부린다. 법흥왕 이후 115년간 사용돼 오던 연호를 당의 것으로 바꾸고 옷도 당의 것을 착복하기 시작한다. 복종, 복속, 항복 등 모두가 옷에 관계 되는 말이고 보면 옷을 바꾼다는 것은 굴종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무엇인가. 

김춘추는 당나라를 찬양하는 사대주의의 극치인 오행시 ‘태평송’을 지어 바친다. 태평송의 내용은 당나라 황제의 위업을 훼손하는 고구려를 ‘오랑캐’라 지칭하며 단 칼에 쳐 물리쳐 달라는 내용이다. 651년 김춘추는 모든 제도를 당나라의 것으로 바꾸고 지명도 순 우리말에서 한자로 바꾸는 동시에 유교를 적극 도입하여 국학이란 교육기관을 세운다. 성균관의 전신과 같은 것이다. 유생들이여 이런 역사를 알고 있는가? 

드디어 당 고종은 소정방을 최고 지휘관으로 하여 10만 대군을 이끌고 660년 백제를 향한 대 공격을 단행한다. 김유신은 신바람 났으며 이에 대하여 삼국사기는 “내가 지금 죽기를 서슴치 않고 험난한 판에 달려 온 것은 큰 나라(당)의 힘을 빌려 두 나라를 없애 버리는 데 있다”(삼국사기 42권 김유신열전)라고 의기를 토하고 있다. 

진평왕은 원광법사에게 출사표를 지으라고 했다. 그러나 “자기가 살기 위해 남을 없애 버리는 것은 승려의 길이 아닙니다. 그러나 대왕의 나라에 살면서 어찌 명을 어길 수 있겠습니까” 하면서 지식인의 고뇌를 토로한다. 원효는 회삼귀일(會三歸一)을 주장하며 신라만이 아니라 세 나라가 같이 살아 평화 공존을 해야 한다고 역설한다. 저 유명한 원효의 ‘불난 집의 비유’는 집에 불이 났는데도 방안에서 어린 아이 셋이 철모르게 놀고 있다면 수레를 사준다고 소리쳐 다 밖으로 나와 위기를 피해야 한다는 내용이다. 그러나 원효의 이 말을 듣지 않고 자기만 살겠다고 신라는 고구려와 백제만을 방에 남겨 두고 뛰쳐나왔고 그래서 나머지 두 친구는 불에 타 죽게 하고 말았다는 비유이다. 그렇다. 유명환-이명박은 들어라. 파산당하는 배 안에서 축배의 잔을 드는 어리석음을 회개하고 민족 앞에 대오각성하라. 

이러한 김춘추와 김유신을 두고 현대 한국의 학자들은 천추에 남을 명 외교관 그리고 충신으로 입에 침이 마르도록 찬양에 찬양을 하고 있다. 처녀가 아이를 낳아도 할 말이 있다는 속담이 있기는 하지만 말이다. 660년 소정방의 10만 대군은 백마강을 타고 올라와 무방비 상태에 있던 백제를 단숨에 함락시켰다. 고구려도 668년 9월 영원히 이 땅에서 사라지고 말았다. 그 후 당은 백제에 웅진 도독부, 고구려에 안동 도독부 그리고 심지어는 신라에까지 계림 도독부를 설치하려 한다. 김유신과 김춘추는 사대주의의 결과가 빚어낸 뼈저린 교훈을 그제야 확인하게 된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막상 당나라 군대를 몰아내는 데 선봉장이 된 사람들은 백제와 고구려의 유민들이었다. 대당 10년 항전 끝에 고작 찾은 땅이란 대동강 이남의 것이었다. 그조차도 신라의 영토 영유권이 인정된 것은 60년 후인 736년이었다. 이제 이 한 조각 남은 한반도 한 부분이나마 중국이나 소련이 차지하면 우리 후손들은 다시 1,000년이 지나도 차지하지 못한다. 

사대주의는 민족의 존립을 위협 

이 얼마나 생각하고 싶지 않고 한 줄의 글로 남기고 싶지도 않은 우리 역사의 처참한 시기인가. 어찌 이 시기를 ‘통일신라 시대’ 운운하면서 칭송할 수 있단 말인가? 그때 우리 피 속에 만들어진 사대주의 DNA는 지금 온 몸에 퍼져 있다. 전직 국방장관들이 지금 늘어놓고 있는 장광설도 결코 우연이 아니다. 경주를 중심으로 신라가 물려준 한국 사대주의 세력의 잔재가 1,500여년의 세월이 지나갔어도 조금도 수치와 모멸을 느끼지도 않으며 자랑스럽다는 듯이 기염을 토하고 있다. 

신라 사대주의는 두 이웃 친구를 불사른 데 그치지 않았다. 고구려 유민들이 세운 발해는 신라에게 목구멍의 가시와 같았다. 계모에게 전처의 자식은 자기의 정통성을 비웃는 존재일 것이다. 해동성국 발해는 신라로부터 721년 그리고 733년 공격을 당하였으나 의젓하게 물리쳤다. 지금 발해 유적지에 가보면 중국 정부가 1981년부터 발해를 중국 소수민족의 한 정부로 격하시킨 안내판이 버젓이 세워져 있다. 드디어 중국 정부는 동북공정을 시작하여 고구려의 역사마저 자기들 것으로 편입시키고 있다. 이 모든 원죄가 어디서부터 비롯하는가? 다름 아닌 신라의 잘못된 통일 때문이다. 

결국 사대주의는 우리 한민족을 종자까지 말리고 마는 독소이다. 지금 한반도 정세가 과연 1,500년 전과 무엇이 다른가? 사대주의는 더하면 더했지 결코 덜하지 않다. 자주권은 한 나라의 생명줄과 같은데 이를 되찾는 일을 반대하는 것은 사대주의 가운데 극치이다. 물론 작전권을 갑자기 되돌려주겠다는 미국의 속셈이 무엇인지는 지혜롭게 간파해야 하겠지만 말이다. 

전작권 제발 다시 가져가 달라고 애걸복걸 

작년 전시작전통제권(전작권) 환수 논의 중단을 요청하기 위해 미국을 방문한 한나라당 2차 방미단 단장 이상득 부의장(이명박 당선자의 친형)은 2007년 9월 20일 워싱턴 특파원들과 가진 기자간담회에서 "우리가 옛날에 중국에 죽지 않으려고 조공도 바치고 책봉도 받아가면서 살아남지 않았느냐"면서 "(미측 인사들이 만나기) 귀찮다고 해도 국익에 필요하면 귀찮게 할 것"이라고 말했다. 난형난제란 말이 이런 것을 두고 하는 말이 아니겠는가? 이는 마치 김춘추와 김유신이란 처남남매가 당나라에 구걸 외교를 한 것과 다를 바 없어 보인다. 

한나라 방미단의 한 의원은 "미국과 동맹관계인 나라 가운데 야당이 (당시) 이처럼 미국에 찾아와 외교를 하는 경우가 있느냐"는 한 기자의 질문에 "일본이나 호주에는 노무현 대통령이 없기 때문"이라고 답변했다. 노무현은 가고 없다. 이렇게 쓸 만한 말 하는 사람들은 비극이라는 유전인자를 갖고 이 땅에 태어난다. 1949년 6월 26일 김구 선생도 그 유전자 때문에 죽었다. 김원웅 국회 통일외교통상위원장(당시)은 2007년 10월 24일 "21세기판 모화(慕華)주의자들이 동맹과 예속을 분별하지 못하는 서글픈 사대주의로 나라 망신시키고 있다"고 비판했다. 

김원웅 위원장은 "지난날 사대주의에 찌든 지배층이 조선의 안위와 중국의 안위를 분별 못하고 자주적 인식을 결여해 병자호란을 자초했다"며 "자국 국익에 충실한 외국군 장성 등에게 전시작통권을 되받아가 달라고 애원하는 건 역사의 평가를 두려워 않는 태도"라고 비판했다. 그는 이상득 부의장의 위 '조공 외교' 발언에 대해 "그러면 고구려의 을지문덕과 연개소문도 바보짓을 했단 말이냐"며 "살아남기 위해 일본의 식민 지배를 환영한 이완용도 지하에서 '나도 당시 같은 생각이었다'고 할 것"이라고 비꼬았다. 

이명박은 ‘이명박문’을 자처하고 있는가? 

조선 민씨 일가 수구 세력들이 청나라에 통수권을 청하자 일본이 상관하며 간섭하기 시작하였고 드디어 1894년 청일전쟁이 이 한반도에서 벌어지고 동학군은 공주 우금치에서 일본군에 의해 궤멸당하고 만다. 일군(日軍)은 총구를 남에서 북으로 돌려 조정으로 올라와 민비를 시해하고 결국 우리 국군통수권은 모두 일본군에 넘어간다. 그 다음 결과는? 1905년 을사늑약, 1910년 한일합방, 1918년 고종 사망(고종도 일본의 시해라는 것이 정설임). 외세를 끌어들인 최대 피해자는 결국 민씨 일가와 고종 자신이었다. 고종과 민비는 앞 다투어 외세를 끌어 드렸지만 그들은 결국 그 외세의 손에 비참한 최후를 마치고 말았다. 유명환-이명박은 지금 이 사실을 애써 외면하고 자기들 기득권 수호에 급급하고 있다. 정권만 유지 내지 재창출만 하자. 이것이 구한말 민씨 일가들과 무엇이 하나 다른가? 회고록은 말한다. 국망의 제일 원인이 사대주의이고 사대주의는 청원 외교로부터 시작한다고. 

유명환-이명박 조는 들어라. 과연 미국과 일본이 통일을 시켜 준 다음에 그 통일을 우리에게 선물로 안겨 줄 것이라 믿고 이런 언행을 하고 있는가? 다시 말한다. 일본이 하자는 그 반대로만 하면 틀림없이 외교는 성공한다. 진정으로 북을 이기고 싶은가? 몸속에 있는 사대주의 유전인자부터 제거 수술해라. 그 전엔 절대로 못 이긴다. 아니 이겨서는 안 된다. 정권은 순간이지만 민족은 영원하기 때문이다. 김유신-김춘추 조는 그래도 당나라를 몰아 낼 의지라도 있었다. 나라의 주권을 통째로 가져다 내 바치고 있는 이명박은 ‘이명박문’을 자처하고 있는가?


원문 주소 - http://www.seoprise.com/board/view.php?table=global&uid=113725

 

Posted by kevin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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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경제토론 보험가입의 경제성 답변(보험회사가 알려주지 않는 불편한 진실) 
  • 나너너나 나너너나님프로필이미지
  • 번호 580826 | 2009.03.06 IP 118.36.***.12
  • 조회 5434 주소복사
보험은 금융상품 중에 최대의 사기라고 생각하네..

목숨과 건강을 담보로 돈을 불입, 지불하고 청년층의 돈으로 장노년층의

비용을 부담하며, 이미 건강보험으로 할인받은 금액의 나머지 부분까지

보상해준다는 허상으로, 공짜의식에 편승하여

천민의 주머니를 노리는 수법이라 생각하고 있지......

이런 면에서 보면 사람들이 다소 가깝게 느끼지 못해 접근하지 못하는

파생상품 쓰나미보다 더 나뻐.......

 

재보험이나 화재보험, 기타 산업보험, 고용보험등의 보험은 사회안정을

위해 꼭 필요하니 내가 말하는 생명보험의 부당함과 혼동하지 말게

 

 

보험료에는....개인이 불입하는 돈의 절반이상이 임금과 수수료...등의 비용으로 소모되고 나머지만 저장, 운용되지...........

그나마 저장된 돈으로 뭐하겠나? 국민연금이 우리나라 주가를 어떻게 받치는지 봤지 않은가? 또 다른 파생상품으로 그 돈들은 움직여 가는 것이지..

 

자본주의에 적당한 인간주의는 없어......죽이고 사는 착취 피착취의 전쟁이지.....그래서 그 고통을 감당 못할 사람은 차라리 깨지 않는 게 나아...

 

보험가입은 거부연령 직전에 하는 게 가장 이익이며

건강보험하나로도 대학병원 진료비부터 약국에서 조제되어 먹는 약값까지 실제금액의 반에서 3분의 1, 큰병은 10분의 1밖에 내지 않아..

또한 나이별로 건강종합검진비, 내시경, 암검사 등의 금액을 지정병원을 정해서 지원해줘....이건 아는 사람만 알더라.........젊은이들은 아예 모르더구만..........몸이 좀 이상하면 내시경 받아볼 때 다른 데서 10만원 넘을 거 지정병원에 가서 자신에게 해당된 시기에 받으면 4만원 안짝이야..

 

건강보험에서 할인해주고 남은 그 돈까지 받아내려 하거나 들어간 돈보다 더 받고 싶은 심리나 ,아픈 것 보다 훨씬 많이 받아서 이익을 취하려는  보험사기성 재테크 포지션으로 생각해서 평소에 보험을 들겠다는 거면 그러지마.....(지금 오크도 그러고 있던데..돈도 많은 사람이 왜 그러나?)

그건 전체 보험료 인상요인에 반영되어 다수에게 피해를 줘...

 

 차라리 민간보험료 낼 돈을 금리 6%짜리 적금을 하든가...시기에 맞춰 금이나 채권으로 운용하면 수술이 필요할 그 때 오히려 더 큰 돈이 모여 있을 것이야...그리고 수술하기까지 안 가도록 몸을 관리해...

 

단, 교통사고나 재해 같은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오는 것을 대비할 필요는 있어...............그것은 생명보험사가 아닌 화재보험사 같은 곳에서 실손형 보상상품 이라는 게 있어서 월별로 내는 돈은 소멸하지만, 당신이 다치거나 입원해서 건강보험이 지불하는 돈 이외에 당신의 주머니에서 나간 돈 전액을 2천이나 5천 한도 내에서 보장하겠다.....뭐 이런 상품이야...

 

보험을 재테크나 저축으로 생각하고

변액이네...전액환급이네...원금보장이네...에 속아서 당하는 무지몽매한 사람들이 있던데.........

억대 보험설계사가 그 사람들 덕에 벤츠나 아우디를 굴린다는 거 잊지마

 

오죽하면 보험회사가 가르쳐주지 않은 진실 이라는 책까지 나오겠냐고........기사 하나 첨부할게....잘 읽어봐....도움이 될거야...

http://lady.khan.co.kr/khlady.html?mode=view&code=10&artid=10684&pt=nv

 

우리나라는 이미 국민 전체가 최고의 보험을 가입하고 있어.

난 개인적으로 군사정권에서 딱 하나 잘한 일로 "건강보험"을 국영화하고

의무화시킨 것이라고 생각해.

당시의 전략이 먹고 사는 데 지장없게 해주면 모든 게 오케이던 시대라서

쌀값을 통제해주고, 병원비를 통제해주면 불만이 줄어들었던게 사실이니까 그런 정책을 강제적으로 썼을거야........

 

건강보험이 연금과 같다고 생각하지마...전혀 다르니까...

그리고 건강보험공단은 우리가 지켜야할 최우선의 공기업이야..

"식코"영화 봤니? 미국의 오바마 정부가 지금 우리나라처럼 건강보험을 만들어야 한다고 말하는 것도 현 정부에게는 잘 안 먹히지.........

 

민간보험에 돈 몰아주는 건강보험 민영화를 추진하고 있잖아.

그거 해서 미국이 어떻게 되었니? 손가락 2개 잘린 사람이 하나 붙이는데

2천만원이 넘는 금액을 감당 못하고 손가락 하나를 포기해......

 

유학 갔다 온 사람들은 알거야...감기 땜에 병원간다고 말하면 이상한 사람취급받았던 경험이 있을테니.....걔네들은 손가락이 부러져도 나무젓가락 두개 가져와서 스스로 맞춰서 반창고 감더라고.....그것도 여자애가...

 

그런 세상에 살지 않아도 되는 지금의 건강보험은 정말.....

쿠바 다음으로 잘된 제도 같아. 우리나라에 몇 안되는 좋은 제도지..

그걸 없애겠다는 거야......

그것의 논리에 일조하는 게 천민들의 민간보험 가입율이야.

 

원금보장형은 절대 가입하지마....

30년 뒤에 원금찾아 뭐할래? 1970년대 대기업 월급 15만원이나 됐니?

그 중에 보험료로 1만원 10% 정도 냈다 치자...지금은? 원금 360만원

 

30년 동안 복리 5%상품이나 블루칩이나 국공채나 금을 갖고 있었으면?

상상은 자유다........

 

결론

1. 있는 보험은 최소로 줄이고, 그나마 있는 것도 "실손형"으로 바꾸고

   전환이 안된다면 과감히 버리고, 자신이 병원에 낸 순수 금액만 보상받

   으면서도 범위가 가장 넓은 상품을 알아본다...

   단 보험설계사의 도움은 받지 않는다. 사기꾼이 훨씬 많음....

   인터넷 검색해보고..인터넷 가입하든가...아님 최소한 약관이라도

   다 읽고 상품을 정하고 선택해서 연락하면 보험설계사가 친절히

   찾아와서 밥도 사줘....그 때 가입하면서 이것 저것 추가하면서

   금액을 늘리려고 하거든......네가 정하고 결정한 메모지를 보여주고

   이대로만 하고 싶다고 해......그 이상하는 것은 충동구매와 같아.

 

2. 건강보험을 믿고, 이것을 지켜내라..

    의료부분에서 양극화 극단점의 미국처럼 되지 않으려면

    식코라는 영화를 꼭보고 결사항쟁으로 지켜내라...우리의 생존전략이다

 

    보험수가인상과, 비보험 항목을 늘리는 의사들의 파업집회멘트 봤니?

    대표가 말하길 우리들의 "행복추구권"을 지키기 위해 파업한다더라....

    결국 보험수가 인상과 비급여 항목은 통과되었고

    무소불위의 의사권력은 자신들의 행복추구권을 지켰어........

 

    사람들아...우리는 행복추구권이 아니라 생존권을 지켜야해...

    건강보험료 내는 거 아깝다고 민영화 찬성하는 사람들아......

    1만 3천원 냈던 사람 때문에 불공평하다고 느낄 수는 있겠지만

    천재적 사기꾼이신 그 분외에는 가난한 사람들이 더 많이 혜택보는 

    거의 유일한 제도다...지켜라...두부에다가 간접세를 메기는 나라다...

 

3. 보험은 위에 소개한 기사에서 읽어봤듯이 거부연령 직전에 가입하는게

   많은 금액을 내더라도 가장 이익이다...

   다들 저축 중요한 것은 알면서 복리의 마술은 모르는지.......

   인디언이 맨하튼을 24달러에 팔고 장신구를 샀지...

   그 돈이 8%짜리 채권에 들어가 있었으면 360년 후인 현재에는

   맨하튼 전체 부동산 가격의 수십배가 되지.........

   그러니 원금보장형 하지말고 내고 버리는 개념으로

   상해, 재해 이런 것에만 대비해.

 

4. 가장 큰 보험은 술, 담배 끊고 자기 체질에 맞게 먹고 즐거운 마음갖고 공부하고 운동하는 게 최고야..

 

 

(원금보장은 사기다. 민간보험금 낼 돈으로 차라리 저축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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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아프면 지역별로 있는 보건소를 이용해.

간호사도 질이 높고 의사도 괜찮다...간혹 공중보건의들이 경험이 없어서

못 믿는 사람도 있던데.....수술하는 정도가 아니라 감기몸살이나 타박상 골절등의 작은 거라면.......레지던트 마친 정도면 다 치료할 수 있으니...

우리나라의 의사들을 믿어보시게.....

민간병원보다 2분의 1이상이 절약된다네..요즘은 시설도 좋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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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글에도 금칙어가 무한대로 걸렸다.....다른 아이디로 올릴 때는 올라가네....

금칙어가 뭔지나 알려주면 그걸 고치고 찾느라, 3시간이나 허비할 필요는 없잖아...

글의 대부분을 애초의도와 다르게 바꾸고 말았군.........

이제 아이디를 바꿀 때가 된 건가? 유럽이나 영국에 외국인으로 거주하는

교포들 중에 아이디 빌려 줄 사람 혹시 있으면 메일주소 남겨줘...

여차하면 갈아타야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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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au
보험에 대한 중요성을 그리 크게 생각하지 않다가 49세 말에 종신생명보험을 지난 해에 가입했습니다. 제 나이또래의 주변 사람들이 암이나 병원에서 수술하는 것을 보고 가입했는데, 월 12만9천원 정도하는데, 보장이 별로여서 해약할까 고민을 많이 하고 있었습니다. 건강보험은 이게 다이기 때문에 고민 고민 하고 있는데, 나너너나님의 글을 읽고 화재보험을 알아보아야 겠네요. 내가 죽고 나면 3천만원이 나오는 것이고, 60세까지 사망사고시에는 5천만원을 주는 보험상품인데, 님께서도 말씀하셨듯이 사실 죽고나서 타는 것은 내게 아무 소용없는 것이죠. 09.03.06 IP 125.178.***.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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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모나코73
종신보험은 간단히말해서 살아생전에는 별로 혜택을 못보는 상품입니다.참고만하세요^^ 00:13 IP 122.46.***.109
 
소리비도
보험설계사분들이 더 문제가 많죠..교묘히..설명 하는것 보면..2002년 이후로 나온 민간보험들은 보험회사 좋은일만 시키는 보험으로만.잘 짜여져 있네여..그나저나 아시는것도 많으세여. 정말이지 글 읽고 있으면 ..감동 그자체네여.. 09.03.06 IP 121.147.***.1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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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폰
정말 시기 적절한 경방의 글이네요. 보험 잘들면 나쁘지 않습니다. 그러나 복잡한 상품명 대면서 노후 대비하라는 식으로 꼬득여 한달에 15~17만원씩 15년 20년 납부하는 보험 절대 비 추천입니다. 가족중에 의사가 한명있는데 보험아예 들지말라고 반대합니다. 전 동의하지는 않지만 냉정하게 판단하면 이유가 있다고 봅니다. 09.03.06 IP 59.25.***.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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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남
일정 부문 맞는 말인데 간과하고 있는 부문이 있음 보험이란 가난한 사람은 별효용가치가 없고 사실은 부자들에게 가장 유용한 것으로 절세엔 보험만한것이 없음 증여도 할수 있고(세금거의 안내고) 등등 09.03.06 IP 125.185.***.1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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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나너너나
그게 같은 돈 내고 민영보험에서 좋은 혜택받고 싶은 부자들 심리지...민영화는 그렇게 만들겠다는 것이고....앞전에도 말했듯이 내가 쓴 글의 독자는 인터넷이라도 켤 수 있게된 천민들일세... 09.03.06 IP 118.36.***.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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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모나코73
할배님이 말한대로..순수보장형으로 적당선으로 보장받는게 꼭 좋습니다..할배님이 말한것처럼 죽어서 받으면 무슨소용인지..손실형보험가입은 필요한듯 합니다. 09.03.06 IP 122.46.***.109



Posted by kevin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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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minihp.cyworld.com/pims/main/pims_main.asp?tid=49743425

개혁이란 무엇일까요 ?

 

사전적 의미의 개혁이란 이렇습니다.

 

개혁1.새롭게 고침. 
         2.체제나 사회 제도 등을 합법적·점진적으로 새롭게 고쳐 나감

                

                    - 출처 : 엠파스 국어 사전

 

 

첫번째 의미는 새롭개 고친다는 단순한 행동이지만, 두번째 의미는 한 국가의 체제나 사회제도를 합법적, 점진적으로 새롭게 고쳐 나감을 의미합니다.

 

쉽게 말해 무언가를 뜯어 고치는데 그 뜯어 고치는 행동을 법률에 저촉되지 않는 범위 내에서, 과격하거나 급하게 고치지 않고 점진적으로 고쳐 나간다는 의미라 하겠습니다.

 

새로운거라고 과격하고 무리하게 시도하는게 아니라는 말도 됩니다.

 

 

다음은 기원전 59년 3월에 공화정 로마의 로마시에서 일어났던 일입니다.

 

로마사를 살펴보면 로마전체를 뒤흔들어 놓은 사건이 간간히 일어 나는데, 그해의 로마에서는 로마가 계속 역사를 만들며 살아 남느냐 아니면 상처가 곪아 터져 국가가 붕괴하느냐를 결정하는 중대한 사건 하나가 일어 납니다.

 

바로 '농지법' 이라는 법률 하나를 놓고, 그 법을 통과시켜 로마의 아픈곳을 치료하느나 아니면 그 법을 저지해서 아픈체로 죽는날만을 기다리느냐 하는 방향설정을 놓고 두개의 다른 세력이 싸움을 벌입니다.

 

그해 로마의 집정관 ( 현재의 수상 )은 바로 유명한 율리우스 카이사르 와 비불루스 라는 귀족 이었습니다.

 

독재를 허용하지 않던 공화정 체제속의 로마에서는 정치적 수상이라고 할수 있는 집정관을 두명씩 선출해 서로를 견제하게 했습니다.

 

개혁적 성향의 카이사르는 민중적인 성향의 집정관이었고, 비불루스는 귀족들로 대표되는 원로원과 기득권층을 대표하는 집정관 이었습니다.

 

공화정 로마에서는 '카르타고 전쟁' 이후부터 발생한, 소수의 귀족들에 의한 대토지사유제가 자리를 잡아 작은 농토를 소유하고 있는 소농들이 설곳이 없어 중산층이 무너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를 걱정하던 호민관 '그라쿠스 형제'는 로마시민의 중핵을 이루고 있던 자영농을 보호하고 소수에 의한 부의 집중을 견제하기 위해 토지의 소유를 제한하는 '농지법'이라는 지극히 당연한 법을 원로원에 제출했지만, 대부분이 귀족들이었던 원로원 의원들은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키기위해 이 법률에 저항하고 급기야 그라쿠스 형제를 무참히 살해하게 됩니다.

 

그 이후에도 농지법의 부활을 들고 나왔던 호민관들이나 정치인들은 모두 원로원 의원들의 저항에 밀려 결국 말로가 비참하게 되고 공화정 로마의 상처를 점점 곪아 들어가서 사회의 근간을 흔들 정도가 되어 버리지만, 자신들이 가지고 있던 기득권을 보호하기 위한 원로원 의원들은 그것에 아랑곳 하지 않고 자신들의 이익을 챙기기에 분주했습니다.

 

그후 거의 백년 가까이 흘러 매년 선출되는 집정관에 새로 당선된 명민한 카이사르는 부의 재분배가 시급한 문제임을 직시하고 그라쿠스 형제가 시도했던 농지법을 다시금 원로원에 제출해서 통과를 요청했습니다.

 

하지만 또다시 자신들이 소유하고 있는 기득권을 침해 당했다고 생각한 원로원 의원들은 카이사르의 시도에 극렬하게 저항하고 법률의 무효성을 주장하게 되는데, 이에 카이사르는 할수없이 민회 ( 평민들의 집회 ) 에 이 법률의 제안을 요청 합니다.

 

당시의 로마에서는 만약 원로원에서 반대 했다 하더라도 평민들이 모이는 민회에서 다수결에 의한 찬성을 통해 제안하는 법률은 아무리 무소불위의 원로원이라 하더라도 할수없이 이를 받아들여야 했는데, 그때까지는 돈과 힘을 가진 원로원 의원들이 민회에 속한 평민들중 많은 이들을 자신들의 의도대로 조정할수 있었지만, 카이사르의 등장으로 그들의 그런 딴지는 더이상 통하지 않게 되는 상황이 되버렸습니다 .

 

사람의 마음을 움직일줄 아는 천재형 정치가가 바로 카이사르 였기 때문입니다.

 

그는 말로만 약속하거나 공약을 남발하지않고 자신이 약속한 것은 반드시 지키는 정치가 였을 뿐만 아니라, 심사숙고뒤에 결정한 일은 끝까지 밀고 가지만 그 전에 자신의 반대파에게 충분히 설명하고 납득 시키려는 노력을 기울이는데 게으르지 않았던 현명한 정치가이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측근이 개인적 욕심이나 능력부족으로 실수를 하거나 욕심을 채우면 그 사람을 절대 크게 쓰지 않고  능력있는 인재만을 골라쓸줄 아는 안목도 가진 정치가였죠.

 

광장에 모여 있는 평민들의 의사표시는 지금으로 치면 국민투표와 같습니다.

 

만약 그들이 이구동성으로 찬성을 하거나 반대를 하면, 법률을 제안한 쪽이나 반대한 쪽도 모두 결과에 승복해야 하는 결과를 초래 합니다.

 

국민을 직접 상대해서 해결을 보려는 카이사르에게 원로원 의원들은 자신들의 영향력이 크다는 자만으로 맞섭니다.

 

카이사르가 제출한 법률의 내용을 이미 알고 있었던 평민들 이었기에, 그날의 집회에서 사회를 맡은 카이사르는 농지법에 반대하는 대표적 의원인 카토라는 사람에게 반대의견을 개진해 달라고 요청합니다.

 

달변가 였던 카토는 연단에 올라가서 농지법의 부당성을 주장하기 시작했는데, 그의 연설이 법률의 반대를 위한 것임을 안 평민들은 연단으로 올라가 그를 붙들고 내려오려했고 끌려내려가 곤욕을 치룰뻔 했던 카토는 동료의원들의 보호로 간신이 자리를 벗어 납니다.

 

카이사르는 다음으로 자신의 동료 집정관 이지만 기득권층의 대표자였던 비불루스를 연설자로 지명했습니다.

 

하지만 동료인 카토가 평민들에게 끌려내려 갈뻔 했던 장면을 목격한 비불루스는 겁이나서 오늘 아침에 본 점괴가 좋지 않았다는 핑계로 연설을 거부 합니다.

 

그 다음으로 카이사르는 자신과 정치적 동맹자였던 크라수스에게 연설을 부탁하고, 로마최고의 갑부였지만 땅으로 돈을 모으지 않고 있던 크라수스는 간단하게 카이사르의 법안에 찬성 연설을 하고 그의 역할을 마무리 합니다. ( 사실은 그의 돈 모으는 방법이 더 비열했지만.....)

 

카이사르가 다음에 지적한 사람은  당시의 로마에서 그 어느 누구보다 인기와 명성이 높았던, 그리고 카이사르의 정치적 동맹자였던 폼페이우스라는 대중스타급 장군 이었습니다.

 

이미 카이사르와 손발을 맞추고 있던 뛰어난 장군이었던 폼페이우스는 카이사르의 농지법에 대한 지지 연설을 합니다.

 

이에 카이사르는 당시 로마 최고의 군사적 명성을 얻고 있던 폼페이우스에게 찬성연설 뿐만 아니라 법안이 통과되면 그후의 실시단계에서 누군가 책임지고 감시할 필요가 있다면서 그일을 폼페이우스에게 맡기고 싶다 말하고는 그의 대답을 기다리지도 않고 시민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 이 막중한 책무를 위대한 폼페이우스가 맡아주기를 바라지 않습니까, 여러분 ! "

 

시민들은 "와! 와!" 하는 환성으로 대답했고, 군인으로서의 능력은 뛰어났지만 폼생폼사의 전형적 인물이었던 폼페이우스는 그만 시민들의 요란한 환호성에 흥분해서 자신은 그런 막중한 책무를 맡을것이라 대답 하고는 다음과 같은 말로 마무리 합니다.

 

" 만약 누군가가 이 법안에 칼을 들이댄다면, 이 폼페이우스가 방패가 되어 막아설 것입니다 ! "

 

시민들은 좋아서 난리가 났습니다.

 

커다란 환호성으로 폼페이우스에게 답하고 법안의 통과를 원로원 의원들에게 요청합니다.

 

로마시민들의 농지법에 대한 찬성표시가 확실한것을 안 원로원 의원들의 똥줄이 탑니다.

 

그들은 카이사르의 동료집정관 비불루스에게 거부권을 행사하라고 그의 등을 떠밉니다.

 

당시의 로마에서는, 집정관 두명중 한명이 거부권을 행사하면 법안이 통과할수 없도록 되어 있었기 때문에 비불루스에게 거부권을 요청한거죠.

 

거부권을 행사하려고 등 떠밀려 연단에 나서려는 비불루스를 본 카이사르가 먼저 선수를 칩니다.

 

" 시민 여러분, 집정관 비불루스가 동의하지 않는 한 여러분이 아무리 간절하게 원해도 이 법안은 햇빛을 볼수가 없게 됩니다 ! "

 

시민들은 더이상 기다리지 않았습니다.

 

연단을 향해 몰려오는 군중을 보고 비불루스는 거부권 발동을 포기했을 뿐만 아니라 연단에서 곧장 집으로 도망을 처버렸고, 그렇게 해서 로마의 오랜 숙제였던 농지법이 빛을 보게되어 로마는 새로운 역사를 맞이하게 됩니다.

 

부의 집중이 어느정도 해체되고 재분배가 일어나게 되는거죠.

 

그런데 카이사르는 자신이 제출한 농지법이 원로원에 의해 가결되자 원로원 의원들의 권력을 제한하는 혁명적인 조항과 그들이 소유하고 있던 땅중에서 가장 비옥한 지방을 평민들에게 분배하는 추가조항을 얹어서 원로원에게 이중 삼중의 강타를 먹입니다.

 

이에 몇몇 원로원의원들이 반발하려 했지만 , 이미 대세를 파악한 원로원은 손을 들어 버리고 카이사르가 제출한 법률을 승인한후 평민들의 집회인 민회의 의견을 존중하겠다는 서약까지 하게 됩니다.

 

공화정 로마의 정치체제는 다수당제도나 양당 제도가 아니었고, 지금의 여당이라 할수 있는 원로원과 야당이라고 할수 있는 평민들의 민회가 있었습니다.

 

처음 평민의 대표였던 호민관 그라쿠스 형제가 제안한 농지법은 원로원 입장에서는 다분히 반체제 적이고 급진적인 법률이었지만, 여기에 이르러 이 농지법은 기득권층의 대표자라고 할수 있는 집정관의 발의와 원로원 의원들의 찬성으로, 반체제 운동의 열매가 아니라 여당과 야당이 협찬한 정책이 되어 버립니다.

 

쉽게 말해 야당이 제안했다가 퇴짜맞은 정말 필요한 법률을 여당지도자가 다시 보완해서 제안하고 다른 여당의원들을 구워삶아 통과시킨 법률이 되었다는 말입니다.

 

이렇게 통과된 농지법은 쓰러질뻔 하던 당시의 공화정 로마를 기사회생 시키고 후일 카이사르의 제정이 성립되는 기반을 제공해 로마가 1500년의 수명을 유지하는데 가장 큰 일조를 하게되죠.

 

 

개혁이란 이런 것이라 생각 됩니다.

 

내편 네편을 떠나서 자신이 속한 국가와 사회에 이득이 되는가 안되는가를 면밀히 따져본후, 설사 반대파가 제안했다 하더라도 이익이되는 것이면 모두가 합심해서 밀고 나가고, 정치를 하는 사람 뿐만 아니라 국민 대부분이 절실하게 필요성을 느끼고 납득하며 지지할수 있는 새로운것을 만들고 낡은 것을 고쳐 나가는 그런 태도 말입니다.

 

기존에 있던 것을 모두 뒤엎어 버린다고 해서 개혁이 되는것도 아니고, 새로 나온 신발이라고 해서 모두가 발을 편하게 해주는건 아닙니다.

 

여당이나 야당이라는것은 동전의 앞뒤와 같아서 언제 처지가 바뀌게 될지 모르는 것이고 그렇기에 서로가 서로를 무시하며 살지도 못하는 그런 인연을 가지고 있습니다.

 

여당에 반대하는 야당이 없는 정치체제는 독재국가나 공산주의 체제에서만 존재하죠.

 

그렇다고 야당은 반대만 하는 세력이 아니고 여당의 독주를 견제하고 발목을 잡기도 하지만, 국가의 이익이 될수 있는 사항에는 협조를 아끼지 말아야 하고 지키려는 노력 보다는 고치고 다듬어 가는 노력을 아끼지 말아야 할 세력입니다.

 

부부싸움 했다고 불난 집에서 자기 혼자 도망쳐 나오는 남편이나 부인은 없을 겁니다.

 

( 아....물론 그런짓을 능히 할수 있는 또라이들도 인간세상에는 가끔 존재합니다....)

 

중요한건 너와나를 따지기 이전에 먼저 우리 라는 공통분모를 깨달아야 하는것 같습니다.

 

그리고 혼자 가는거 보다는 모두 같이 가는것이 덜 힘들듯 하고 말입니다.

 

요즈음의 한국정치를 보고 문득 기원전에 어떤 도시에서 일어났던  사건 한가지가 떠올라 지꺼려 봤습니다.

Posted by kevin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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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경제토론 한국은 4등급 국가? [20]
  • gorilla gorilla님프로필이미지
  • 번호 432402 | 2008.12.06 IP 82.110.***.2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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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에 8년째 살면서 최근 영국 모 공기업 해외사업부에 취직하여 일하고 있습니다.

그다지 애국자라 할 수 없지만 그래도 이제까지 한국인이라는 자부심을 가지고 살았습니다.

78년생이라 초등학교 시절 '우리나라 좋은나라 대한민국 만만세' 교육의 영향이 있었던것을 무시할 수는 없겠네요.

저는 정말 우리나라가 선진국이라고 지금까지 생각하며 살았습니다.

최근 아고라에서 갖가지 사회적 정치적 경제적 모순들을 보면서 조금씩 내가 생각하던것과 다르다는 생각은 하기 시작했지만 그래도 우리 조국이 어려움을 극복하고 곧 서방의 선진국들과 어깨를 겨루는 날이 올거라고 믿었지요.

 

그런데...

제가 일하는 회사는 세계각국의 기업과 개인 회원을 관리하는 일을 합니다. 따라서 세계 각국마다 우리가 제공하는 서비스에 대한 서비스비를 청구하며 각각의 나라들의 경제적 수준에 의해 등급을 다르게 책정하고 있습니다.

2008년 한국은 1 부터 6등급중 2등급이었습니다. 물론 1등급에 속하는 나라는 소위 말하는 미국을 비롯한 유럽 선진국이구요.

어제 2009년 새 등급별 서비스 비용 표가 나왔는데 한국은 4 등급으로 떨어졌더군요.

한국과 같은 4등급에 속하는 국가는 보스니아, 브라질, 크로아시아, 헝가리, 이라크, 자메이카, 카자흐스탄, 멕시코, 몽골리아, 미얀마, 필리핀, 폴란드, 로마니아, 세르비아, 슬로바키아, 슬로베니아 등입니다.

참고로 중국은 작년 2등급에서 올해 1등급으로 올랐습니다. 태국도 작년 3등급에서 2등급으로 올라갔네요.

 

도대체 왜일까요. 이 서비스비 책정 프로젝트를 담당하고 있는 매니저에게 물으니 공신력있는 기관의국가별 경제력 현황 보고서에 따른 결정이라네요.

그래도 왜 한국이 4등급인지 깨놓고 물어보지는 못했습니다.

혹시 우리나라의 상황이 안에 있는 사람은 상상하지 못할 정도로 심하게 악화된건 아닐까요. 그런데 우리만 모르고 있는건 아닐까요.

저는 신문도 잘 안 읽고 집에 텔레비젼도 없고 바깥세상 소식이라면 가끔씩 인터넷에서 보는게 다입니다.

선진국이라고 믿었던 조국이 이제는 독재국가 미얀마와 어깨를 나란히 한다고 하니 부끄러운 마음이 드는건 저 혼자인가요?

Posted by kevin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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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번호 432415 | 2008.12.06 IP 119.202.***.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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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겐 충무공이 계셨다. 비록 그가 통치자는 아니지만, .....

 

호치민, 그는 어려운 시기에 태어났으나 지피지기를 위해 일찍 그들의 적국에서 배움을 했고 그것을 그 자신, 일신을 위해 쓸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는 그의 능력과 열정과 배움을 그들의 가장 낮은 기층 민중을 위해 썼고 한 점 남김 없는 빈 몸으로 돌아갔다

소박했고 자국민을 자식처럼 사랑하고, 청렴하게, 그러나 조국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치고 마침내는 그의 적국사람들에게까지 경외의 대상이 된 이였다.

그러나, 나는 좌절하지 않는다. 우리도 언젠가는 저런 진정 위대한 지도자를 맞게 될 희망의 끈을 놓지 않으련다. 살아서도 죽어서도 상층과 하층, 이념의 좌우에 관계 없이 존경 받는 인물이 우리에게도 언젠가는 출현할 것임을 믿고 살아 보련다.

 

 


흔히들 베트남하면 요즘 사람들은 대부분 '베트남처녀랑 결혼하세요' 라는 문구부터 생각날것이다. 우리에겐 가까워보이기도하지만 멀리있고, 우호관계가 돈독해보이기도 하지만 한때는 서로 총을 겨누고 싸우던 사이였던 나라 베트남.

 

베트남은 우리나라 역사 못지않게 눈물겨운 투쟁의 역사로 유명했던 나라이다.


 


 한때 고대에서 19세기 말엽까지 중국의 침공으로 부터 자신들의 나라를 지키려했던 이 정글의 전사들, 19세기 말엽에 프랑스의 억압에도 굴하지 않은 민초들... 20세기 들어와서 최신예 전폭기와 헬리본 작전 대규모 물량전을 앞세운 미국에 굴하지 않고 볼품없는 칼라니쉬코프 소총 한자루를 들고 저항했던 전사들의 나라.



우리에게는 베트남전쟁 당시 월맹의 지도자로...베트남 국민들에게는 우리네 백범 김구선생님처럼 '호 아저씨'로 영원히 기억되고 있는 이 작은 베트남출신의 혁명가. 쿠바혁명의 체 게바라와 함께 영원히 세계인의 기억속에 혁명가로 남아있는 그, 

그의 이름은 '구엔 타트 탄 (Nguyen Tat Thanh)'

1890년 5월 8일에 중(中) 베트남의 게친주(州)의 중견 공무원이자, 농민출신 문학자의 아들로 태어난 그... 부친은 명망받던 중견 공무원이었지만, 프랑스 정부로 부터 민족주의자라는 이유로 자기가 앉아있는 자리에서 쫓겨났어야 했다. 단지 "이상한 생각을 한다'는 명목아래...

3남매중에 막내로 태어난 그는 청년 시절에 부친으로 부터 배운 민족주의를 여러 사람들에게 전파시켰다는 이유로 자신의 형과 누나와 함께 투옥되는 아픔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청년 시절 왜 같은 사람인데 자신과 같은 베트남 사람들은 프랑스인에게 억압받아야 하는지에 대한 의문을 가지고 어떻게 하면 이러한 제국주의의 억압에서 자유로워질수 있을까, 라는 생각끝에 21살이 되던 1911년, 좀더 넓은 세상을 보기위해서 그는 영국행의 프랑스 유람선 견습요리사가 되어서 베트남을 떠났다. 대영제국의 수도인 런던에 도착한 그는 호텔 견습 요리사로 일하면서 아일랜드인들의 독립운동을 목격하고 그걸 바탕으로 아일랜드 독립을 포함한 다른 지역의 독립투쟁을 위해서 反 제국주의 비밀결사단체인 '해외노동자 연합(Overseas Workers' Association)'을 결성에 참여한다.

이 무렵 그는 미국을 방문해서 미국의 어두운 뒷면인 할렘가를 목격하고 다시 프랑스로 돌아가 그곳에서 세탁소 종업원이나 정원사등으로 일하면서 생활하였다.

그후 그는 1919년 프랑스 사회당에 가입을 하고 같은해에 베르사유 조약에서 베트남대표로 출석해서 '베트남 인민의 8항목의 요구'를  제출 29살이라는 젊은 나이에 일약 그 이름이 알려지게되었다. 그리고 1920년에 그는 프랑스 사회당 투르대회에서 코민테른 지지파에 가담, 프랑스 공산당 창립 멤버 중에 하나가 되고, 이듬해 공산당의 지원으로 프랑스식민지인민연맹을 결성, 기관지 <르 파리아>를  발행-편집하게되었다. 이 무렵부터 그는 구엔 아이 쿡 (Nguyen Ai Quoc) 이라는 가명으로 反 식민지, 反 제국주의 색채의 기사를 기고하였다.

그러다가 1922년에는 모스크바에서 열린 코민테른에 프랑스 대표로 참석, 모스크바에 2년 정도 머물면서 마르크스에 대해서 연구하고 레닌을 직접 만나게 되었다.

이어서 1925년 중국 광둥의 소련영사관 사무원 되어 모스크바로 떠났고 그 해에 중국 상하이에서 코민테른의 아시아 지역본부 책임자가 되었다. 그후 1930년에 코민테른의 의해서 권한을 부여받고 인도차이나공산당을 창립하게되었다. 이듬해에 홍콩에서 영국 관헌에게 체포되었으나, 석방 후 모스크바로 돌아갔다가, 1941년 베트남에 잠입, 인도차이나 공산당을 중심으로 베트민(베트남독립동맹회)을 결성, 본격적인 독립운동에 나섰다.

1942-1943년에 중국 국민당 정부에 의해 체포-투옥 당한 무렵부터 호치민이라는 이름을 사용1945년 8월 15일 일본의 무조건 항복으로 인한 종전과 동시에 총봉기를 주도해서,  당시 親프랑스 괴뢰정권인 구엔왕조[국가수반-바오다이]를 전복시키고 정권을 탈취(8월 혁명)에 성공 베트남민주공화국의 독립을 선언하고 정부 수석으로 취임한다. 1946년 퐁텐블로회의가 결렬되자 프랑스에 대한 항전을 직접지휘, 마침내 1954년 디엔비엔푸 전투에서 승리함으로써 베트남은 오랜만에 제국주의의 억압으로부터 벗어나게되었다.

결국 1954년 제네바 협정으로 북도 17도선을 기준으로 비무장 지대를 선언하고 이어서 이듬해에 남-북 베트남 총선거로 통일된 베트남정권을 수립한 준비를 하였다.

그러나 그런 독립의 기쁨도 잠시, 1955년 미합중국의 지지를 받고 고딘디엠이 독립국으로서의 베트남 공화국(월남정권)을 수립하고 스스로 취임하면서 베트남 독립의 꿈은 멀어지는듯했다.

결국 호치민은 다시한번 노구의 몸으로 무기를 들고 당시 최신예 무기로 무장한 미국에 단 한자루의 카라니쉬코프 자동소총을 들고 저항을 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1969년 7월 8일 미국의 닉슨 대통령이 남부 베트남으로부터 첫 군대 철수 공고함으로써.

어느정도 베트남전에서의 결실을 맺고 통일로 나아가려던 그 순간 1969년 9월 3일 80에 가까운 노구의 몸으로 결국 죽음을 맞이한다.

평생을 자기의 조국 베트남의 독립과 혁명을 위해서 싸웠던 그....

마치 어떤 영웅소설의 주인공과도 같은 삶을 살아갔지만, 죽는 순간까지도 낡은 옷 한벌에 고무타이어를 잘라서 만든 샌들을 신고 다녔던 그 대기근 중에 절식으로 기아에 허덕이는 인민과 함께 아픔을 같이 했고 조국을 위해 죽어간 무명의 병사 무덤 앞에서 진정어린 눈물과 피의 댓가를 조국해방으로 갚으려 했던 이 영원한 베트남의 아버지요, 사심 없이 민족과 조국을 위해 자신을 다 바친 이다.

철저한 비폭력,무저항,불복종으로 조국을 독립시킨 간디보다는 적극적 항왜의 민족주의자 백범 선생과 더 어울린다할 베트남의 '아버지' '호 아저씨'이다

그의 머리맡에는 다산 정약용 선생의 牧民心書가 놓여 있었다는데 올바른 관리로서의 소임을 잊지 않고자  하는 그의 마음을 읽을 수 있다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과, 부정부패 하지 않는 관리의 모습을 베트남 관리도 본받아야 된다고 생각하고 자신들 휘하의 장병과 부하들에게 가르쳤다 한다.

뿐만 아니라 자신이 죽을 때 자기 머리위에 목민심서를 놓으라 유언을 남겼다고  한다.

 

 

                                호치민 기념묘

(자신의 죽은 몸을 위해 땅 한 평도 쓰지 말기를 바랐으나 베트남 국민들은 그를 방부처리 하여 영원히 함께 할 수 있도록 기념묘를 세웠다. 혹자 김일성 아저씨도 그렇다고 강변할라. 저 왜소하고 소박하고 검소함이 지나쳐 남루한 모습을 보곤 그런 소리 안하겠지... ㅎㅎ  )

 

※《호치민-혁명과 애국의 길에서》

다니엘 에므리(성기완 옮김) / 시공사(1998)

 

75회 생일에 부쳐 - 미리 쓴 유언장 -

일찍이 중국 당나라의 위대한 시인인 두보는 “인생칠십고래희(人生七十古來稀)”라 했다. 올해 나는 일흔다섯이다. 아직 정신이 말짱하고 건강이 좋지만 나는 이미 그 '자고로 드문’사람들에 속한다. 내가 몇 달이나, 몇 년이나 더 살 것이며 당과 혁명과업에 얼마나 더 봉사할 수 있을 것인지 누가 감히 말할 수 있으랴. 그리하여 존경하는 카를 마르크스, 블라지미르 일리치 레닌, 그리고 먼저 간 우리 혁명 제위들을 만나러 갈 날에 대비하여 간단하게 몇 자 적는 것이니 모든 동포들과 당의 동지들은 놀라지 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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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당에 대해 말하겠다.’:
우리 당은 긴밀한 단합력과 노동자 계급과 민중, 조국에 대한 전적인 헌신 덕분에 창립 이래로 우리 민족을 단결시키고 조직하여 열과 성을 다해 그들을 투쟁으로 이끌었으며 승리에 승리를 거듭할 수 있게 했다. ‘하나됨’은 당과 민족의 지극히 고귀한 전통이다. 중앙위원회에서 하위세포에 이르는 모든 동지들은 당의 단합과 하나됨을 눈동자처럼 소중히 간직하자.

당차원에서 광범위한 민주주의를 실현하고 성실한 ‘자아비판과 비판’을 정기적으로 실천하는 것이 단합과 하나됨을 굳건히 발전시키는 가장 좋은 방법이다. 중요한 것은, 모든 동지들의 유대는 동포애적 사랑에서 나온다는 것이다. 우리는 권력을 쥐고 있는 당이다. 당원 각자와 관료들 각자가 ‘혁명윤리’를 깊이 체화해야 하고, 근검절약과 청렴, 공명정대, 공정인 일에 헌신하는 등 진정한 모법을 보여야 한다. 당의 완벽한 순수성을 지켜야 하고 스스로 지도적 위치에 설 만한 격을 지녀야 하며 인민에 진정 충실한 공복이 되어야 한다. ‘노동청년단원과 우리 젊은이들’은 훌륭한 자질을 갖추었으며 모든 임무를 열성적으로 수행한다. 그들은 난관을 두려워하지 않으며 쉬지 않고 앞으로 나아가고자 한다. 우리당은 그들에게 ‘고양된 혁명적 윤리’를 차근차근 가르쳐 그들을 사회주의 건설의 ‘붉은’, 그리고 ‘숙련된’전수자로 양성해야 한다는 것을 명심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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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래의 혁명세대들을 육성하고 교육하는 일은 지극히 중요하고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산악지대와 평야에 사는 우리 노동자 인민들은 수세기 동안 수많은 고초를 견뎌왔다. 그들은 봉건제도와 식민지의 착취와 억압을 겪었으며 게다가 여러 해 동안 전쟁을 겪었다. 그럼에도 우리 민중은 언제나 영웅적 투쟁과 용기와 열성, 그리고 근면함으로 놀랄 만한 모범을 보여왔다. 그들은 당이 창립된 이래로 당을 따랐으며 늘 충성을 바쳐왔다. 당은 끊임없이 ‘민중의 삶의 수준을 높이고’ 경제와 문화를 발전시키기 위해 훌륭한 계획을 세워야 한다.

‘미국의 침략에 맞선 항쟁’은 아직 몇 년 더 지속될 것이다. 우리 동포는 아직 수많은 목숨과 재산의 희생을 묵묵히 받아들이고 있다. 우리는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완전한 승리의 그날까지 침략자 미국에 항거해야 한다. ‘우리의 강, 우리의 산, 우리 국민들은 언제나 변치 않으리니, 양키를 무찔러 지금보다 열 배 더 아름다운 나라를 세우리라!’ 난관과 궁핍이 아무리 심하다 해도 우리민족은 반드시 승리할 것이다. 미제국주의자들은 틀림없이 줄행랑을 칠 것이다. 우리 조국은 분명 다시 통일될 것이다. 우리 북과 남의 동포들은 확실히 한 지붕 아래 모여 살 것이다. 우리나라는 영웅적인 전투를 통하여 두 거대한 제국주의자들(프랑스 제국주의자와 미제국주의자)을 무찌르고 민족 해방운동에 값진 기여를 한 작은 나라라는 빛나는 영광을 누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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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개인적 문제에 관하여’:
내가 죽은 후에 웅장한 장례식으로 인민의 돈과 시간을 낭비하지 말라. 내 시신은 화장해 달라. 나는 화장이 점차 일반화되기를 바란다. 위생상 좋고 땅도 절약되기 때문이다. 나중에 전기가 풍부해지면 ‘전기화장’도 할 수 있고, 여러모로 그게 더 나을 것이다. 재는 언덕에 뿌려 달라. 탐다오와 바비 근처에 좋은 언덕이 있는 듯하다. 재가 뿌려진 곳 위에는 단순하고 넓고 튼튼하며 통풍이 잘되는 집을 세워 방문객들을 쉬어가게 하는 것이 좋겠다.

언덕에 ‘짙푸른 나무 숲’을 꾸미도록 하라. 방문객마다 추모의 뜻으로 나무를 심는 것이다. 나무가 잘 자라려면 나무 하나하나에 수고를 들여야만 할 것이다. 세월이 지나면 나무들은 숲을 이룰 것이고, 그러면 경치가 더 좋아지고 농업에도 이로울 것이다. 만일 내가 나라가 통일되기 전에 죽게 되면 재의 일부를 남베트남 동지들에게 전해주라. 마지막으로 우리 인민 모두에게, 우리 당과 군인 모두에게, 내 조카와 사촌들, 젊은이들과 어린이들에게 끝없는 애정을 보낸다. 또한 내 동지들과 친구들과 모든 나라의 젊은이들과 어린이들에게도 형제로서 같은 축복을 보낸다.

내 마지막 희망은 우리 당과 인민 전체가 단단히 뭉쳐 평화 베트남, 통일된 독립 민주 베트남, 번영된 베트남을 건설하여 세계혁명에 값진 기여를 하는 날까지 모든 노력을 다하는 것이다.

                               

중앙위원회 제1서기 레 두안 입회하에 하노이.

                                                                1965년 5월 15일

                                                                                      호치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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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마지막 혁명 전사 호치민, 현대와 전통, 두 문화의 중간에서 스스로 깨우친 자, 그는 1911년 프랑스의 압제하에 있던 인도차이나를 떠나 30년 동안 지하운동과 망명생활을 거듭한 후 통킹의 국경을 넘어 베트남으로 들어온다. 때마침 강대국의 식민지 경영은 2차대전의 시련을 견디지 못했고, 그가 조직한 베트남 독립동맹은 민족해방을 위한 정치적 연하전선을 이루어냈다. 그리고 불타는 인도차이나, 20세기에서 가장 오래 지속된 전쟁이 끝나고 베트남 사회주의공화국이 탄생되었다.”

                                                                                            - 본문 中에서

 

<더 알기- ‘MBC스페셜-리더십 시리즈’ 제 3부 ‘호찌민, 코끼리를 이긴 호랑이’>

 


호치민 박물관

 

이야기 하나

호치민은 미국과의 전쟁이 계속되는 와중에도 유능한 젊은이들을 선발해서 세계 각국으로 유학을 보낸다. ‘엄청나게 추운’ [조선]으로 유학을 떠나는 비엔 선생(1965년 호치민 유학생으로 북한에 유학을 옴)에게 베트남 정부가 해 준 것은 입고 갈 옷 한 벌, 구두 한 켤레, 가방 하나가 전부였다.

아, 호치민의 말씀이 있었다.


‘우리 정부가 어려워서 너희들을 빈손으로 떠나보내지만, 너희들은 지금 전쟁으로 고통 받으며 죽어가는 인민들에게 크나큰 빚을 지는 것이다. 반드시 그 빚을 갚아야 한다. 이 전쟁에서 우리가 승리할 것은 자명한 일이지만 시간이 좀 걸릴 것이며, 그 과정에서 조국의 많은 인재들이 희생될 것이고 너희들의 부모 형제들도 죽어갈 것이다. 조국을 대신해서 이 아저씨가 너희들에게 받아 두아야 할 약속이 하나 있다. 무슨 일이 있더라도 학업을 마치기 전에 돌아와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우리가 승리한 다음 너희들은 전쟁으로 파괴된 조국의 강산을 과거보다 세계의 어느 나라보다 아름답게 재건해야 한다. 너희들은 공부하는  것이 전투다.


숙식은 조선정부가 제공해주었지만 겨울의 혹한을 난방이 되지 않는 기숙사에서 견뎌야 했다. 아직 전후 복구 작업으로 사정이 어렵던 조선 정부는 열대지방에서 유학 온 학생들을 위해 특별한 배려를 할 여유가 없었다. 무엇보다 견딜 수 없었던 것은 도무지 입에 맞지 않는 음식이었다. 60킬로가 넘는 몸무게는 45킬로로 줄었고 살기 위해 맨밥을 억지로 목구멍에 퍼넣고 냉수를 들이 붓고 삼켰다. 목구멍에 밥알이 걸려서 토하고 나면 눈물이 저절로 주르르 흘렀다. 전선이 아닌 곳에선 죽는 것도 조국의 인민에 대한 배반이었다. 하루에도 몇 번씩 돌아가고 싶었지만 호 아저씨와의 약속을 어길 수는 없었다.

 

 

이야기 둘. / 내일신문 2005-06-14

 

청렴의 리더십’ 실천한 역사의 스승 
호치민, 다산의 ‘목민심서’ 탐독 … ‘백성’에 대한 책임감 교류

실용·개혁 논쟁 뛰어넘는 실사구시형 지도자의 전형


 “다산과 호치민은 공통점이 많다”고 말한다.

◆권력만 추구하고 책임지지 않는 정치풍토에 경종= 그는 ‘백성’에 대한 애정을 바탕으로 처지와 환경에 좌우되지 않는 강한 책임감을 실천한 사람이 다산과 호치민이라고 평했다.

다산의 ‘목민심서’는 ‘백성을 보살펴 주고 보호해 주며 편안하게 돌봐 준다’는 뜻의 ‘목민’과 ‘마음은 있으나 몸소 실행할 수 없기에 마음만 있는 책’이라는 ‘심서’를 합쳐 만든 이름이다.

‘깨우치는 자’란 의미로 지은 호치민(胡志明)은 평소 ‘목민심서’를 정독했고 그의 무덤에도 놓여 있다고 한다.

xxxx xx는 “두 사람이 목민심서를 통해 만나게 된 것은 백성과 역사에 대한 책임감의 교류”라고 해석했다.

유배생활 속에서도 백성에 대한 책임감과 아픔을 드러내며 ‘심서’를 지은 다산과 중국 국민당에 체포, 투옥되어서도 자신의 역할을 ‘깨우치는 자’로 규정하고 이름을 바꾼 호치민의 일화는 권력만을 추구하고 책임을 지지 않으려는 우리 정치풍토에서 추구해야 할 모범이라고 그는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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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렴을 통한 정치력과 리더십= 다산과 호치민은 청렴의 대명사라는 점에서도 닮았다. 다산은 “부임할 때 빈수레를 가지고 가지마라” “재임 중에 집을 고치거나 짓지마라”고 말했다.

다산 연구소 박석무 이사장은 ‘목민심서’의 핵심으로 두 번째 편의 두 번째 조항인 ‘청심’을 꼽았다. 이에 따르면 공직자 청렴의 최상급은 ‘봉급이외에는 아무 것도 먹지 않으며, 먹다가 남은 것은 역시 가지고 집에 돌아가지 않으며, 벼슬을 그만두고 집으로 돌아가는 날에는 한 필의 말로 조촐하게 가는 것’이라고 했다. 다산 역시 암행어사 등 벼슬에 나가있을 때 청렴을 실천했다.

호치민에게 있어 청렴은 정치력과 국민적 신뢰와 리더십의 원천이었다.

 

그는 평생 허름한 농민복을 입고 초라한 집에 살았다. 베트남 국민들은 국가원수인 그를 ‘호 아저씨’라고 불렀다.

그의 청렴의 리더십은 베트남 뿐 아니라 적대국인 미국에서도 경외의 대상이 됐다.


◆실용이 아닌 실사구시 = ‘허를 버리고 실을 찾으며 실을 찾으면서도 그 중에서 가장 옳은 것만을 구해야 한다’는 다산의 철학은 호치민에게도 이어진다. 그는 이념적 엄격함이 아니라 민족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실사구시형 지도자였다는 것. 호치민에게 있어서 국제공산주의는 베트남의 통일이라는 목적을 위한 수단이었고 맑스-레닌주의는 민족해방이론에 사용되는 한 정당했다는 게 김 특보의 생각이다.

NguyenSinhCung(Minh, Ho Chi)


 

Posted by kevin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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