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번호 432415 | 2008.12.06 IP 119.202.***.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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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겐 충무공이 계셨다. 비록 그가 통치자는 아니지만, .....

 

호치민, 그는 어려운 시기에 태어났으나 지피지기를 위해 일찍 그들의 적국에서 배움을 했고 그것을 그 자신, 일신을 위해 쓸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는 그의 능력과 열정과 배움을 그들의 가장 낮은 기층 민중을 위해 썼고 한 점 남김 없는 빈 몸으로 돌아갔다

소박했고 자국민을 자식처럼 사랑하고, 청렴하게, 그러나 조국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치고 마침내는 그의 적국사람들에게까지 경외의 대상이 된 이였다.

그러나, 나는 좌절하지 않는다. 우리도 언젠가는 저런 진정 위대한 지도자를 맞게 될 희망의 끈을 놓지 않으련다. 살아서도 죽어서도 상층과 하층, 이념의 좌우에 관계 없이 존경 받는 인물이 우리에게도 언젠가는 출현할 것임을 믿고 살아 보련다.

 

 


흔히들 베트남하면 요즘 사람들은 대부분 '베트남처녀랑 결혼하세요' 라는 문구부터 생각날것이다. 우리에겐 가까워보이기도하지만 멀리있고, 우호관계가 돈독해보이기도 하지만 한때는 서로 총을 겨누고 싸우던 사이였던 나라 베트남.

 

베트남은 우리나라 역사 못지않게 눈물겨운 투쟁의 역사로 유명했던 나라이다.


 


 한때 고대에서 19세기 말엽까지 중국의 침공으로 부터 자신들의 나라를 지키려했던 이 정글의 전사들, 19세기 말엽에 프랑스의 억압에도 굴하지 않은 민초들... 20세기 들어와서 최신예 전폭기와 헬리본 작전 대규모 물량전을 앞세운 미국에 굴하지 않고 볼품없는 칼라니쉬코프 소총 한자루를 들고 저항했던 전사들의 나라.



우리에게는 베트남전쟁 당시 월맹의 지도자로...베트남 국민들에게는 우리네 백범 김구선생님처럼 '호 아저씨'로 영원히 기억되고 있는 이 작은 베트남출신의 혁명가. 쿠바혁명의 체 게바라와 함께 영원히 세계인의 기억속에 혁명가로 남아있는 그, 

그의 이름은 '구엔 타트 탄 (Nguyen Tat Thanh)'

1890년 5월 8일에 중(中) 베트남의 게친주(州)의 중견 공무원이자, 농민출신 문학자의 아들로 태어난 그... 부친은 명망받던 중견 공무원이었지만, 프랑스 정부로 부터 민족주의자라는 이유로 자기가 앉아있는 자리에서 쫓겨났어야 했다. 단지 "이상한 생각을 한다'는 명목아래...

3남매중에 막내로 태어난 그는 청년 시절에 부친으로 부터 배운 민족주의를 여러 사람들에게 전파시켰다는 이유로 자신의 형과 누나와 함께 투옥되는 아픔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청년 시절 왜 같은 사람인데 자신과 같은 베트남 사람들은 프랑스인에게 억압받아야 하는지에 대한 의문을 가지고 어떻게 하면 이러한 제국주의의 억압에서 자유로워질수 있을까, 라는 생각끝에 21살이 되던 1911년, 좀더 넓은 세상을 보기위해서 그는 영국행의 프랑스 유람선 견습요리사가 되어서 베트남을 떠났다. 대영제국의 수도인 런던에 도착한 그는 호텔 견습 요리사로 일하면서 아일랜드인들의 독립운동을 목격하고 그걸 바탕으로 아일랜드 독립을 포함한 다른 지역의 독립투쟁을 위해서 反 제국주의 비밀결사단체인 '해외노동자 연합(Overseas Workers' Association)'을 결성에 참여한다.

이 무렵 그는 미국을 방문해서 미국의 어두운 뒷면인 할렘가를 목격하고 다시 프랑스로 돌아가 그곳에서 세탁소 종업원이나 정원사등으로 일하면서 생활하였다.

그후 그는 1919년 프랑스 사회당에 가입을 하고 같은해에 베르사유 조약에서 베트남대표로 출석해서 '베트남 인민의 8항목의 요구'를  제출 29살이라는 젊은 나이에 일약 그 이름이 알려지게되었다. 그리고 1920년에 그는 프랑스 사회당 투르대회에서 코민테른 지지파에 가담, 프랑스 공산당 창립 멤버 중에 하나가 되고, 이듬해 공산당의 지원으로 프랑스식민지인민연맹을 결성, 기관지 <르 파리아>를  발행-편집하게되었다. 이 무렵부터 그는 구엔 아이 쿡 (Nguyen Ai Quoc) 이라는 가명으로 反 식민지, 反 제국주의 색채의 기사를 기고하였다.

그러다가 1922년에는 모스크바에서 열린 코민테른에 프랑스 대표로 참석, 모스크바에 2년 정도 머물면서 마르크스에 대해서 연구하고 레닌을 직접 만나게 되었다.

이어서 1925년 중국 광둥의 소련영사관 사무원 되어 모스크바로 떠났고 그 해에 중국 상하이에서 코민테른의 아시아 지역본부 책임자가 되었다. 그후 1930년에 코민테른의 의해서 권한을 부여받고 인도차이나공산당을 창립하게되었다. 이듬해에 홍콩에서 영국 관헌에게 체포되었으나, 석방 후 모스크바로 돌아갔다가, 1941년 베트남에 잠입, 인도차이나 공산당을 중심으로 베트민(베트남독립동맹회)을 결성, 본격적인 독립운동에 나섰다.

1942-1943년에 중국 국민당 정부에 의해 체포-투옥 당한 무렵부터 호치민이라는 이름을 사용1945년 8월 15일 일본의 무조건 항복으로 인한 종전과 동시에 총봉기를 주도해서,  당시 親프랑스 괴뢰정권인 구엔왕조[국가수반-바오다이]를 전복시키고 정권을 탈취(8월 혁명)에 성공 베트남민주공화국의 독립을 선언하고 정부 수석으로 취임한다. 1946년 퐁텐블로회의가 결렬되자 프랑스에 대한 항전을 직접지휘, 마침내 1954년 디엔비엔푸 전투에서 승리함으로써 베트남은 오랜만에 제국주의의 억압으로부터 벗어나게되었다.

결국 1954년 제네바 협정으로 북도 17도선을 기준으로 비무장 지대를 선언하고 이어서 이듬해에 남-북 베트남 총선거로 통일된 베트남정권을 수립한 준비를 하였다.

그러나 그런 독립의 기쁨도 잠시, 1955년 미합중국의 지지를 받고 고딘디엠이 독립국으로서의 베트남 공화국(월남정권)을 수립하고 스스로 취임하면서 베트남 독립의 꿈은 멀어지는듯했다.

결국 호치민은 다시한번 노구의 몸으로 무기를 들고 당시 최신예 무기로 무장한 미국에 단 한자루의 카라니쉬코프 자동소총을 들고 저항을 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1969년 7월 8일 미국의 닉슨 대통령이 남부 베트남으로부터 첫 군대 철수 공고함으로써.

어느정도 베트남전에서의 결실을 맺고 통일로 나아가려던 그 순간 1969년 9월 3일 80에 가까운 노구의 몸으로 결국 죽음을 맞이한다.

평생을 자기의 조국 베트남의 독립과 혁명을 위해서 싸웠던 그....

마치 어떤 영웅소설의 주인공과도 같은 삶을 살아갔지만, 죽는 순간까지도 낡은 옷 한벌에 고무타이어를 잘라서 만든 샌들을 신고 다녔던 그 대기근 중에 절식으로 기아에 허덕이는 인민과 함께 아픔을 같이 했고 조국을 위해 죽어간 무명의 병사 무덤 앞에서 진정어린 눈물과 피의 댓가를 조국해방으로 갚으려 했던 이 영원한 베트남의 아버지요, 사심 없이 민족과 조국을 위해 자신을 다 바친 이다.

철저한 비폭력,무저항,불복종으로 조국을 독립시킨 간디보다는 적극적 항왜의 민족주의자 백범 선생과 더 어울린다할 베트남의 '아버지' '호 아저씨'이다

그의 머리맡에는 다산 정약용 선생의 牧民心書가 놓여 있었다는데 올바른 관리로서의 소임을 잊지 않고자  하는 그의 마음을 읽을 수 있다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과, 부정부패 하지 않는 관리의 모습을 베트남 관리도 본받아야 된다고 생각하고 자신들 휘하의 장병과 부하들에게 가르쳤다 한다.

뿐만 아니라 자신이 죽을 때 자기 머리위에 목민심서를 놓으라 유언을 남겼다고  한다.

 

 

                                호치민 기념묘

(자신의 죽은 몸을 위해 땅 한 평도 쓰지 말기를 바랐으나 베트남 국민들은 그를 방부처리 하여 영원히 함께 할 수 있도록 기념묘를 세웠다. 혹자 김일성 아저씨도 그렇다고 강변할라. 저 왜소하고 소박하고 검소함이 지나쳐 남루한 모습을 보곤 그런 소리 안하겠지... ㅎㅎ  )

 

※《호치민-혁명과 애국의 길에서》

다니엘 에므리(성기완 옮김) / 시공사(1998)

 

75회 생일에 부쳐 - 미리 쓴 유언장 -

일찍이 중국 당나라의 위대한 시인인 두보는 “인생칠십고래희(人生七十古來稀)”라 했다. 올해 나는 일흔다섯이다. 아직 정신이 말짱하고 건강이 좋지만 나는 이미 그 '자고로 드문’사람들에 속한다. 내가 몇 달이나, 몇 년이나 더 살 것이며 당과 혁명과업에 얼마나 더 봉사할 수 있을 것인지 누가 감히 말할 수 있으랴. 그리하여 존경하는 카를 마르크스, 블라지미르 일리치 레닌, 그리고 먼저 간 우리 혁명 제위들을 만나러 갈 날에 대비하여 간단하게 몇 자 적는 것이니 모든 동포들과 당의 동지들은 놀라지 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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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당에 대해 말하겠다.’:
우리 당은 긴밀한 단합력과 노동자 계급과 민중, 조국에 대한 전적인 헌신 덕분에 창립 이래로 우리 민족을 단결시키고 조직하여 열과 성을 다해 그들을 투쟁으로 이끌었으며 승리에 승리를 거듭할 수 있게 했다. ‘하나됨’은 당과 민족의 지극히 고귀한 전통이다. 중앙위원회에서 하위세포에 이르는 모든 동지들은 당의 단합과 하나됨을 눈동자처럼 소중히 간직하자.

당차원에서 광범위한 민주주의를 실현하고 성실한 ‘자아비판과 비판’을 정기적으로 실천하는 것이 단합과 하나됨을 굳건히 발전시키는 가장 좋은 방법이다. 중요한 것은, 모든 동지들의 유대는 동포애적 사랑에서 나온다는 것이다. 우리는 권력을 쥐고 있는 당이다. 당원 각자와 관료들 각자가 ‘혁명윤리’를 깊이 체화해야 하고, 근검절약과 청렴, 공명정대, 공정인 일에 헌신하는 등 진정한 모법을 보여야 한다. 당의 완벽한 순수성을 지켜야 하고 스스로 지도적 위치에 설 만한 격을 지녀야 하며 인민에 진정 충실한 공복이 되어야 한다. ‘노동청년단원과 우리 젊은이들’은 훌륭한 자질을 갖추었으며 모든 임무를 열성적으로 수행한다. 그들은 난관을 두려워하지 않으며 쉬지 않고 앞으로 나아가고자 한다. 우리당은 그들에게 ‘고양된 혁명적 윤리’를 차근차근 가르쳐 그들을 사회주의 건설의 ‘붉은’, 그리고 ‘숙련된’전수자로 양성해야 한다는 것을 명심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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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래의 혁명세대들을 육성하고 교육하는 일은 지극히 중요하고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산악지대와 평야에 사는 우리 노동자 인민들은 수세기 동안 수많은 고초를 견뎌왔다. 그들은 봉건제도와 식민지의 착취와 억압을 겪었으며 게다가 여러 해 동안 전쟁을 겪었다. 그럼에도 우리 민중은 언제나 영웅적 투쟁과 용기와 열성, 그리고 근면함으로 놀랄 만한 모범을 보여왔다. 그들은 당이 창립된 이래로 당을 따랐으며 늘 충성을 바쳐왔다. 당은 끊임없이 ‘민중의 삶의 수준을 높이고’ 경제와 문화를 발전시키기 위해 훌륭한 계획을 세워야 한다.

‘미국의 침략에 맞선 항쟁’은 아직 몇 년 더 지속될 것이다. 우리 동포는 아직 수많은 목숨과 재산의 희생을 묵묵히 받아들이고 있다. 우리는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완전한 승리의 그날까지 침략자 미국에 항거해야 한다. ‘우리의 강, 우리의 산, 우리 국민들은 언제나 변치 않으리니, 양키를 무찔러 지금보다 열 배 더 아름다운 나라를 세우리라!’ 난관과 궁핍이 아무리 심하다 해도 우리민족은 반드시 승리할 것이다. 미제국주의자들은 틀림없이 줄행랑을 칠 것이다. 우리 조국은 분명 다시 통일될 것이다. 우리 북과 남의 동포들은 확실히 한 지붕 아래 모여 살 것이다. 우리나라는 영웅적인 전투를 통하여 두 거대한 제국주의자들(프랑스 제국주의자와 미제국주의자)을 무찌르고 민족 해방운동에 값진 기여를 한 작은 나라라는 빛나는 영광을 누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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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개인적 문제에 관하여’:
내가 죽은 후에 웅장한 장례식으로 인민의 돈과 시간을 낭비하지 말라. 내 시신은 화장해 달라. 나는 화장이 점차 일반화되기를 바란다. 위생상 좋고 땅도 절약되기 때문이다. 나중에 전기가 풍부해지면 ‘전기화장’도 할 수 있고, 여러모로 그게 더 나을 것이다. 재는 언덕에 뿌려 달라. 탐다오와 바비 근처에 좋은 언덕이 있는 듯하다. 재가 뿌려진 곳 위에는 단순하고 넓고 튼튼하며 통풍이 잘되는 집을 세워 방문객들을 쉬어가게 하는 것이 좋겠다.

언덕에 ‘짙푸른 나무 숲’을 꾸미도록 하라. 방문객마다 추모의 뜻으로 나무를 심는 것이다. 나무가 잘 자라려면 나무 하나하나에 수고를 들여야만 할 것이다. 세월이 지나면 나무들은 숲을 이룰 것이고, 그러면 경치가 더 좋아지고 농업에도 이로울 것이다. 만일 내가 나라가 통일되기 전에 죽게 되면 재의 일부를 남베트남 동지들에게 전해주라. 마지막으로 우리 인민 모두에게, 우리 당과 군인 모두에게, 내 조카와 사촌들, 젊은이들과 어린이들에게 끝없는 애정을 보낸다. 또한 내 동지들과 친구들과 모든 나라의 젊은이들과 어린이들에게도 형제로서 같은 축복을 보낸다.

내 마지막 희망은 우리 당과 인민 전체가 단단히 뭉쳐 평화 베트남, 통일된 독립 민주 베트남, 번영된 베트남을 건설하여 세계혁명에 값진 기여를 하는 날까지 모든 노력을 다하는 것이다.

                               

중앙위원회 제1서기 레 두안 입회하에 하노이.

                                                                1965년 5월 15일

                                                                                      호치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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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마지막 혁명 전사 호치민, 현대와 전통, 두 문화의 중간에서 스스로 깨우친 자, 그는 1911년 프랑스의 압제하에 있던 인도차이나를 떠나 30년 동안 지하운동과 망명생활을 거듭한 후 통킹의 국경을 넘어 베트남으로 들어온다. 때마침 강대국의 식민지 경영은 2차대전의 시련을 견디지 못했고, 그가 조직한 베트남 독립동맹은 민족해방을 위한 정치적 연하전선을 이루어냈다. 그리고 불타는 인도차이나, 20세기에서 가장 오래 지속된 전쟁이 끝나고 베트남 사회주의공화국이 탄생되었다.”

                                                                                            - 본문 中에서

 

<더 알기- ‘MBC스페셜-리더십 시리즈’ 제 3부 ‘호찌민, 코끼리를 이긴 호랑이’>

 


호치민 박물관

 

이야기 하나

호치민은 미국과의 전쟁이 계속되는 와중에도 유능한 젊은이들을 선발해서 세계 각국으로 유학을 보낸다. ‘엄청나게 추운’ [조선]으로 유학을 떠나는 비엔 선생(1965년 호치민 유학생으로 북한에 유학을 옴)에게 베트남 정부가 해 준 것은 입고 갈 옷 한 벌, 구두 한 켤레, 가방 하나가 전부였다.

아, 호치민의 말씀이 있었다.


‘우리 정부가 어려워서 너희들을 빈손으로 떠나보내지만, 너희들은 지금 전쟁으로 고통 받으며 죽어가는 인민들에게 크나큰 빚을 지는 것이다. 반드시 그 빚을 갚아야 한다. 이 전쟁에서 우리가 승리할 것은 자명한 일이지만 시간이 좀 걸릴 것이며, 그 과정에서 조국의 많은 인재들이 희생될 것이고 너희들의 부모 형제들도 죽어갈 것이다. 조국을 대신해서 이 아저씨가 너희들에게 받아 두아야 할 약속이 하나 있다. 무슨 일이 있더라도 학업을 마치기 전에 돌아와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우리가 승리한 다음 너희들은 전쟁으로 파괴된 조국의 강산을 과거보다 세계의 어느 나라보다 아름답게 재건해야 한다. 너희들은 공부하는  것이 전투다.


숙식은 조선정부가 제공해주었지만 겨울의 혹한을 난방이 되지 않는 기숙사에서 견뎌야 했다. 아직 전후 복구 작업으로 사정이 어렵던 조선 정부는 열대지방에서 유학 온 학생들을 위해 특별한 배려를 할 여유가 없었다. 무엇보다 견딜 수 없었던 것은 도무지 입에 맞지 않는 음식이었다. 60킬로가 넘는 몸무게는 45킬로로 줄었고 살기 위해 맨밥을 억지로 목구멍에 퍼넣고 냉수를 들이 붓고 삼켰다. 목구멍에 밥알이 걸려서 토하고 나면 눈물이 저절로 주르르 흘렀다. 전선이 아닌 곳에선 죽는 것도 조국의 인민에 대한 배반이었다. 하루에도 몇 번씩 돌아가고 싶었지만 호 아저씨와의 약속을 어길 수는 없었다.

 

 

이야기 둘. / 내일신문 2005-06-14

 

청렴의 리더십’ 실천한 역사의 스승 
호치민, 다산의 ‘목민심서’ 탐독 … ‘백성’에 대한 책임감 교류

실용·개혁 논쟁 뛰어넘는 실사구시형 지도자의 전형


 “다산과 호치민은 공통점이 많다”고 말한다.

◆권력만 추구하고 책임지지 않는 정치풍토에 경종= 그는 ‘백성’에 대한 애정을 바탕으로 처지와 환경에 좌우되지 않는 강한 책임감을 실천한 사람이 다산과 호치민이라고 평했다.

다산의 ‘목민심서’는 ‘백성을 보살펴 주고 보호해 주며 편안하게 돌봐 준다’는 뜻의 ‘목민’과 ‘마음은 있으나 몸소 실행할 수 없기에 마음만 있는 책’이라는 ‘심서’를 합쳐 만든 이름이다.

‘깨우치는 자’란 의미로 지은 호치민(胡志明)은 평소 ‘목민심서’를 정독했고 그의 무덤에도 놓여 있다고 한다.

xxxx xx는 “두 사람이 목민심서를 통해 만나게 된 것은 백성과 역사에 대한 책임감의 교류”라고 해석했다.

유배생활 속에서도 백성에 대한 책임감과 아픔을 드러내며 ‘심서’를 지은 다산과 중국 국민당에 체포, 투옥되어서도 자신의 역할을 ‘깨우치는 자’로 규정하고 이름을 바꾼 호치민의 일화는 권력만을 추구하고 책임을 지지 않으려는 우리 정치풍토에서 추구해야 할 모범이라고 그는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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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렴을 통한 정치력과 리더십= 다산과 호치민은 청렴의 대명사라는 점에서도 닮았다. 다산은 “부임할 때 빈수레를 가지고 가지마라” “재임 중에 집을 고치거나 짓지마라”고 말했다.

다산 연구소 박석무 이사장은 ‘목민심서’의 핵심으로 두 번째 편의 두 번째 조항인 ‘청심’을 꼽았다. 이에 따르면 공직자 청렴의 최상급은 ‘봉급이외에는 아무 것도 먹지 않으며, 먹다가 남은 것은 역시 가지고 집에 돌아가지 않으며, 벼슬을 그만두고 집으로 돌아가는 날에는 한 필의 말로 조촐하게 가는 것’이라고 했다. 다산 역시 암행어사 등 벼슬에 나가있을 때 청렴을 실천했다.

호치민에게 있어 청렴은 정치력과 국민적 신뢰와 리더십의 원천이었다.

 

그는 평생 허름한 농민복을 입고 초라한 집에 살았다. 베트남 국민들은 국가원수인 그를 ‘호 아저씨’라고 불렀다.

그의 청렴의 리더십은 베트남 뿐 아니라 적대국인 미국에서도 경외의 대상이 됐다.


◆실용이 아닌 실사구시 = ‘허를 버리고 실을 찾으며 실을 찾으면서도 그 중에서 가장 옳은 것만을 구해야 한다’는 다산의 철학은 호치민에게도 이어진다. 그는 이념적 엄격함이 아니라 민족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실사구시형 지도자였다는 것. 호치민에게 있어서 국제공산주의는 베트남의 통일이라는 목적을 위한 수단이었고 맑스-레닌주의는 민족해방이론에 사용되는 한 정당했다는 게 김 특보의 생각이다.

NguyenSinhCung(Minh, Ho Chi)


 

Posted by kevin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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