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G와 보이지 않는 손이라는 유령
- 비숍 mor****
자본주의 사회에서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은 시장을 지나치게 맹신하는 경향이 있다. 사람들은 시장이 모든 문제를 해결해 줄 것이라고 믿는다. 거의 신앙에 가까운 이 믿음은 사실 그 역사가 꽤 오래된 것으로 ‘보이지 않는 손’과 ‘수요공급의 법칙law of demand and supply’이라는 학문적 이론에 입각해 있다.
요즘 신문이나 인터넷을 들여다보면 이 믿음이 얼마나 광범위하게 퍼져 있는지가 드러난다.
사람들은 시장에 어떤 문제가 생길 때마다 저마다 수요공급의 법칙이라는 카드를 꺼내든다.
투기꾼들의 개입으로 아파트값이 비정상적으로 치솟을 때에도 사람들은 “아파트 값은 수요공급의 법칙으로 결정된다. 따라서...”이라고 말한다.
거품의 붕괴로 아파트값이 폭락할 때에도 사람들은 여전히 “아파트 값은 수요공급의 법칙으로 결정된다. 따라서...”이라고 말한다. 심지어는 과잉생산공황에 의해 시장이 완전히 붕괴되는 상황이 벌어져도 사람들은 시장-수요공급의 법칙-에 맡기는 것이 최선의 해결책이라고 믿는다.
도대체 이런 대책 없는 믿음은 어디에서 생겨난 것일까?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이 광신적인 믿음은 전적으로 ‘수요공급의 법칙’이라는 잘못된 이론으로부터 비롯된 것이다. 그런데 이 잘못된 이론에 대해서 논하기 전에 우리는 우선 ‘법칙’이라는 것에 대한 오해로부터 자유로워질 필요가 있다.
자연에는 ‘열역학의 법칙’, ‘만유인력의 법칙’과 같은 물리학의 법칙들이 작용한다. 마찬가지로 인간의 사회에는 다양한 사회적 법칙들이 작용하고 있으며 수요공급의 법칙도 그 가운데 하나다. 이러한 ‘법칙’을 개념적으로 정의하자면 다음과 같다.
법칙 : 모든 사물과 현상의 원인과 결과 사이에 내재하는 보편적이고 필연적 관계로 인간의 의식이나 소망, 목적 등으로부터 독립하여 작용하는 것.
즉 법칙이란 인간이 원하는 바에 따라 결과가 ‘어떻게 되어야 한다’거나 ‘어떻게 되었으면 좋겠다’가 아니라 사물 자체의 인과성에 따라 결과가 ‘이렇게 되었다’거나 ‘이렇게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이 정의에 따른다면 시장에서 발생한 문제의 핵심은 아파트의 값은 ‘수요공급의 법칙으로 결정된다’가 아니라 아파트의 값이 ‘수요공급의 법칙에 따르지 않았다’는 데에 있다. 생각해보라. 벌어진 현상은 분명 수요공급의 법칙에 위배된 결과를 나타내고 있는데 갑자기 모든 것은 수요공급의 법칙에 따른다고 결론을 내려버린다면 듣는 사람은 얼마나 황당하겠는가.
실제로 가격의 비정상적인 등락이나 혹은 과잉생산공황 등의 발생은 수급을 조절하는 시장의 기능이 저하되거나 마비되었기 나타나는 현상이다. 따라서 우리는 이를 분석하여 수요공급의 법칙이 왜 제대로 작용하지 않았는지를 밝혀야 한다. 즉 법칙 자체에 오류가 있었는가, 아니면 어떤 다른 요소(혹은 법칙)의 개입이 있었는가를 밝혀야 하는 것이다. 이를 무시한 채 뜬금없이 “수요공급의 법칙에 의하면”이라고 말하는 것은 과학이라기보다는 신앙에 가까운 것이다.
역사적으로 볼 때 수요공급의 법칙은 아담 스미스의 ‘보이지 않는 손’이라는 관념에 입각해 있다. ‘보이지 않는 손’에 대한 관념은 당시 시장에서의 가격과 공급량을 결정하는 가장 근본적인 원리로 다루어졌고 이에 근거한 자유방임주의와 경제적 자유주의는 자본주의 초기의 사상적 기초가 되었다.
아담 스미스는 시장에서 개인의 이기심에 입각한 경쟁으로 모든 경제활동이 조정되고 개인과 사회의 풍요가 실현될 것이라는 낙관론을 가지고 있었다.
"우리가 저녁식사를 기대할 수 있는 것은 정육업자, 양조업자, 제빵업자들의 자비심 때문이 아니라 그들의 개인이익추구 때문이다. 사람은 누구나 생산물의 가치가 극대화되는 방향으로 자신의 자원을 활용하려고 노력한다. 그는 공익을 증진하려고 의도하지 않으며 또 얼마나 증대시킬 수 있는지도 알지 못한다. 그는 단지 자신의 안전과 이익을 위하여 행동할 뿐이다. 그러나 이렇게 행동하는 가운데 '보이지 않는 손'의 인도를 받아서 원래 의도하지 않았던 목표를 달성할 수 있게 된다. 이와 같이 사람들은 자신의 이익을 열심히 추구하는 가운데서 사화나 국가전체의 이익을 증대시킨다."
여기서 '보이지 않는 손'이란 가격의 자동조절기능을 말하는 것으로 시장에서 다른 여건이 일정하다고 가정하면 특정한 재화의 수요량은 가격과 반대 방향으로 움직이고, 공급량은 가격과 같은 방향으로 움직이게 된다는 것이다.
가령 공급량이 수요량보다 많다면 생산자들은 가격을 낮추어서라도 재고를 처분하려 할 것이기 때문에 가격은 낮아진다. 그리고 가격인하가 계속되면 소비자들은 보다 많은 수량을 구입하려고 할 것이기 때문에 초과공급량은 점차 줄어든다. 반대로 수요량이 공급량보다 많다면 소비자들은 서로 더 높은 가격을 지불하더라도 상품을 사려고 할 것이기 때문에 가격은 올라간다. 가격이 계속 오르면 생산자들은 보다 많은 수량을 내다팔기 위해 생산량을 더욱 늘릴 것이기 때문에 공급량은 점차 늘어나게 된다. 결국 시장의 이러한 조정을 거쳐 마침내 수요량과 공급량이 일치되는 점에 다다르면 가격은 안정되고 최적의 자원배분이 실현된다는 것이다.
가격에 의한 시장의 자동조절기능을 믿기 때문에 아담 스미스는 정부정책에 대해서도 철저한 자유방임을 주장했다.
"여러분은 선의의 법령과 규제로 경제에 도움을 주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자유방임 하십시오. 간섭하지 말고 그대로 내버려두십시오. '이기심이라는 기름'이 '경제라는 기어(gear)'를 거의 기적에 가까울 정도로 잘 돌아가게 할 것입니다. 계획을 필요로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통치자의 다스림도 필요 없습니다. 시장이 모든 것을 해결할 것입니다."
이것이 ‘보이지 않는 손’의 핵심이다. 정부는 최소한의 야경을 담당하고 나머지는 모두 개인의 이기심과 시장의 자동조절기능에 맡겨두라는 것이다.
이렇듯 아담 스미스를 시조로 하는 고전학파 경제학자들은 모든 경제 주체가 건전한 사회제도 하에서 아무런 제약 없이 각자 자신의 이익을 위해 경쟁을 전개한다면 시장이라는 ‘보이지 않는 손’에 이끌려 전체 국민경제는 질서와 조화 속에서 부富와 번영을 이루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고전학파의 ‘보이지 않는 손’은 경쟁적 균형으로 최적의 자원배분을 실현시킬 수 있다는 신념에서 비롯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신념은 산업혁명 전야의 영국에서 봉건적 잔재와 속박을 철폐하려는 시민계급의 요구와도 일치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경쟁적 균형에 바탕하고 있는 고전학파의 이론은 오늘날에는 그다지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이 논리는 경쟁의 순수성과 시장의 완전성이라는 두 가지 전제 하에서만 작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즉 규모의 경제가 존재하지 않음으로써 완전경쟁이 보장된 시장이어야 하고 시장을 통하지 않은 다른 경제 주체가 영향을 미치는 외부효과가 전혀 없어야 한다는 것, 그리고 생산요소의 이동이 자유로워야 하고 가격이 보내는 신호에 따라 시장균형이 신속하게 변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경쟁의 순수성과 시장의 완전성이라는 전제 하에 제시된 이 조건들 가운데 단 한 가지라도 충족되지 않을 경우 ‘보이지 않는 손’은 자동할 수가 없다. 따라서 균형은 깨지고 최적의 자원배분도 실현되지 못한다.
실제로 우리는 현실에서는 이 조건들 가운데 어느 하나도 쉽게 충족되기 어렵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현실에서는 이 ‘보이지 않는 손’이 가진 최적의 자원배분의 기능은 필연적으로 실패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역사적으로도 19세기 전반에 걸쳐 세계를 지배했던 자유방임주의는 산업과 상업을 둘러싼 국가 간의 대립이 심화되던 1870년대부터 쇠퇴하기 시작하여 제1차 세계대전을 계기로 완전히 몰락하게 된다. 현실에서는 산업화와 기술의 진보에 따른 급속한 변화 속에서 생산자본이 집적과 집중을 통해 독점자본으로 발전하기 시작했고, 이러한 독점의 대두는 가격제도의 운행을 방해하고 소득분배의 형평문제를 제기했으며 경기변동의 진폭을 격화시키는 등 여러 가지 경제적 문제를 가중시켰다.
결국 1929년 대공황으로 결정적인 타격을 입은 자유방임주의는 국가의 적극적 개입으로 완전 고용을 실현하고 유효수요의 원리에 입각하여 경기순환을 안정시켜야 한다고 주장하는 케인스주의에 그 자리를 내어주게 된다. 그 후 과잉생산공황에 의해 촉발된 제2차 세계대전을 맞게 된 각국의 정부는 마침내 시장에 적극적으로 관여하기 시작한다.
이처럼 시장이 자동적으로 수급의 균형을 가져오고 조화와 풍요를 선사할 것이라는 ‘보이지 않는 손’에 관한 고전적 이론은 이미 오래전에 종말을 고했다. 그럼에도 시장에 대한 우리 시대 사람들이 가진 절대적인 믿음은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 도대체 그 이유는 무엇일까?
자본주의 사회에서 수급의 불균형은 일상적인 문제가 되고 있다. 특히 불황이나 공황과 같은 상황이 닥칠 때는 극심한 수급의 불균형으로 인해 한쪽에서는 과잉생산된 물품이 산더미처럼 쌓이고 다른 쪽에서는 물품의 부족으로 기아에 허덕이게 된다. 역사적으로 몇 번의 공황을 거치면서 자본주의 경제학은 수정자본주의의 길로 나아갔음에도 불구하고 신앙의 핵심이론인 수요공급의 법칙에 대한 믿음만큼은 전혀 변하지 않았다.
자본주의 경제학자들이 복음처럼 외우는 수요공급의 법칙은 지나간 공황과 앞으로 있을 공황에 대해서는 아무런 답변도 하지 않는다. 그저 주문처럼 “수요공급의 법칙에 따르면....”, “수요공급의 법칙이 결정하므로....”라고 중얼거릴 뿐이다. 이정도면 경제학이 아니라 진짜 신앙이라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자본주의사회에서 실재로 벌어지고 있는 일은 ‘수요공급의 법칙’이 아니라 ‘생산과 소비의 모순’이다. 자본주의 하에서는 ‘생산’은 그 규모가 점점 커지고 무제한적으로 확대되는데 반해 ‘소비’는 지극히 개인적이고 제한된 틀 속에서 이루어진다. 그럼으로 인해 생산과 소비의 괴리라는 모순이 발생한다.
인간은 항상 물품을 소비하면서 살아간다. 소비는 생존을 위한 전제이며 이 소비를 위해서는 한편으로 물품의 생산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안 된다. 따라서 생산과 소비는 인간사회라는 유기체가 수행하는 물질대사의 시작점이자 종착점인 것이다. 그런데 이 물질대사가 원활하게 이루어지지 않으면 유기체는 병이 들고 아프게 되고 심지어는 사망에 이르게까지 될 수 있다.
따라서 사회가 원활하게 발전하려면 생산과 소비는 반드시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 자본주의에서 시장은 처음에 이 생산과 소비를 매개하는 유용한 수단이었다. 그런데 자본주의가 점점 발전함에 따라 시장은 더 이상 수단이 아니라 목적이 되었고, 이 목적은 다름 아닌 자본의 최대가치증식과정-기업의 이윤극대화의 원칙-에 기여하는 것이다.
자본은 한편으로는 생산을 무제한적으로 확대함으로써 무한한 축적을 이루려는 충동을 가졌고, 다른 한편으로는 가능한 많은 이윤을 획득하기 위해 노동자의 임금을 가능한 적게 지불함으로써 소비자-노동자-의 소비를 갈수록 제한된 틀 속에 한정시킨다. 그 결과 생산과 소비는 조화를 이루는 것이 아니라 대립하고 충돌하는 관계가 되어버리고 마는 것이다.
이 모순의 격화를 매개하는 것은 자본주의의 또 다른 모순의 발현형태인 ‘생산의 무정부성’이다. 자본주의적 상품생산사회에서는 의식적 계획적 생산에 의해서 사회적 생산의 균형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맹목적 무계획적 생산이 행해짐으로써 무정부적 생산이 된다.
자본주의에서는 생산이 생산수단을 사유한 독립적 생산자에 개개인에 의해 행해지기 때문에 무엇을 얼마나 생산할지는 그들의 자의적 재량에 맡겨져 있다. 이러한 자본주의는 생산을 대규모화함으로써 공장(혹은 기업) 자체적으로는 합리성과 조직성을 갖지만 사회 전체로는 오히려 무정부성을 한층 심화시키게 되는 것이다.
이 생산의 무정부성은 시장에서 이윤을 실현하는 과정에서 현재화하게 되는데, 사회적 수요에 대응하지 않는 생산의 누적으로 가격의 불안, 판매의 부진, 기업의 부도 등 다양한 부작용을 일으킨다. 나아가 생산의 무정부성의 폭발로 일어나는 주기적 공황은 과잉자본, 과잉상품을 폭력적으로 폐기함으로써 사회적 생산의 균형을 회복하게 되는 과정이다.
자본축적의 가속도를 증대시키기 위해 무정부적으로 이루어지는 대대적인 고정자본의 투하가 과잉중복투자를 유발하여 결국에는 사회적 재생산의 고리를 스스로 끊어버리는 결과를 가져오게 되는 것이다.
‘생산과 소비의 모순’과 ‘생산의 무정부성’은 실제로 자본주의의 역사에서 계속 반복되어 나타났던 근대적 과잉생산공황의 기초이자 궁극적인 원인이었다. 그리고 반복적인 모순의 발현은 학문적으로 고전학파의 경제학을 시장에 대한 국가의 적극적 개입을 선언하는 신고전학파의 경제학으로 바뀌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하지만 오늘날 경제학의 주류를 형성하게 될 이 이론가들은 엉뚱하게 또다시 보이지 않는 손 이론-수요공급의 법칙-을 주장함으로써 ‘생산과 소비의 모순’과 ‘생산의 무정부성’을 근본적으로 치유하는 길을 스스로 차단해버렸다.
한동안 자본주의 경제학자들은 ‘국가의 시장에 대한 최소한의 개입’과 ‘수요공급의 법칙’이라는 두 가지 주사바늘로 주기적으로 발행하는 과잉생산공황을 완전히 치료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생산과 소비의 모순의 누적이 일정한 임계점에 이르게 되자 억눌렸던 모순은 새로운 형태의 과잉생산공황으로 폭발하기 시작했다. 오늘날 스태그플레이션이나 금융공황이라는 괴물들의 등장이 바로 그것이다.
“일본은 1980년대에는 주요 OECD 회원국 가운데 가장 역동적인 나라(1991년까지 경제성장률이 연평균 약 4%)였지만 그 뒤에는 가장 정체된 나라(경제성장률이 연평균 1%)로 전락했다. 일본의 장기불황은 1980년과 1990년 사이에 무려 5배로 오른 부동산 가격과 6배 이상으로 상승한 주가의 거대한 거품이 터지면서 시작됐다. 2000년대 초에 부동산 가격은 1980년의 수준으로 하락했고 주가 역시 붕괴했다. 이는 은행의 대출과 기업의 투자에 심각하고도 장기적인 억압효과를 미쳤고, 모든 기업의 대차대조표가 자산가격 하락의 타격을 받았다.” (앤드류 글린)
이러한 현상은 비단 일본에서만 벌어진 일이 아니다. 1990년대 말에는 통제되지 않는 금융자본에 의해 아시아에 금융위기가 휩쓸고 갔고 2000년대 말에는 미국의 부동산 거품으로부터 시작한 금융부문의 부실이 전 세계적인 위기로 번지고 있다.
각국의 정부는 이 위기를 초래한 자본가들에게 천문학적인 공적자금을 투자하는 것으로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지만 그 과정에서 노동자를 비롯한 민중들이 겪어야할 고통들에 대해서는 아무런 대책도 없다.
다음의 기사를 보면 우리는 수요공급의 법칙이라는 미명하에 그동안 실제로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었는지를 알 수 있다. 게다가 자본주의 하에서 시장에 대한 정부의 개입이라는 것도 너무 늦었을 뿐만 아니라 누구를 위한 개입인지도 확연히 드러난다.
“도널드 콘 미연방준비위 부의장은 지난 5일 상원 금융위 청문회에서 AIG 구제 자금의 용도를 공개하라는 요구에 "그럴 경우 AIG가 비즈니스를 계속하는데 타격이 가해질 수 있다"며 거부했었다. 콘은 당시 "AIG가 연기금과 미국 가입자를 포함해 전 세계에 엄청나게 많은 비즈니스 파트너가 있기 때문에 파문이 커질 수 있다"며 "비공개는 AIG 사태가 확산돼 전체 금융시장에 더 큰 충격을 주는 것을 막기 위한 것"이라고 덧붙였다. 벤 버냉키 FRB 의장도 앞서 지난 3일 상원 청문회에 출석해 "이번 금융위기 과정에서 무엇보다 제일 화가 났던 것은 헤지펀드처럼 운영돼온 AIG를 구제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라고 밝힌 바 있다. AIG가 헤지펀드처럼 파생상품을 이용한 투기적 행위를 해오다가 천문학적 손실을 입게 됐으나, AIG 파산처리시 전세계적으로 엄청난 후폭풍이 몰아칠 것이 확실해 불가피하게 지원을 하고 있다는 얘기인 셈이다.” (뷰스앤뉴스 2009-03-08 20:51:21)
금융시장의 자율성이 가져온 결과는 매우 참혹함에도 불구하고 정부와 금융자본은 공적자금이 어디에 어떻게 쓰였는지조차 공개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비즈니스를 계속하는데 타격이 가해질 수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미국의 금융자본들이 ‘수요공급의 법칙’에 따라 만들어 팔았던 파생상품 손실은 아직 그 규모조차 알 수 없다. 왜냐하면 이 손실은 평소에는 대차대조표에 잡히지도 않다가 거래만료 시점이 되어서야 그 실체가 드러나기 때문이다. 미국에서 이러한 투기적 거래로 천문학적 손실을 숨겨온 금융사가 단지 한두 곳이 아니라 대부분의 투자은행이 해온 비즈니스였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본주의 경제학자들은 여전히 시장에 대한 최소한의 개입과 수요공급의 법칙이 문제를 해결해줄 것이라고 주장한다. 즉 국가가 AIG처럼 ‘파생상품을 이용한 투기적 행위를 해오다가 천문학적 손실’을 입게 된 이 금융사들을 ‘구제할 수밖에 없는 이유’라는 것이 ‘금융시장에 더 큰 충격을 주는 것을 막기 위한 것’이라는 점이다. 게다가 정부의 역할이란 이 세계금융 불안의 원인제공자를 구제하고 그 자금이 어디에 투입되었는지 철저하게 비밀에 붙임으로써 그들의 비즈니스를 보장해주는 일이라는 것이다.
위의 기사를 보면 벤 버냉키 FRB 의장처럼 자본에 고용된 경제학자가 할 수 있는 일은 단지 수요공급의 법칙이 지배하는 신성한 시장에서 투기를 일삼아온 대다수 은행들에 대해 ‘매우 화를 내면서’ 뒷돈을 챙겨주는 일이었던 것이다.
결국 AIG는 정부로부터 받은 1천730억 달러의 공적자금 가운데 900억 달러를 20여개 대형 금융기관-파생상품 보증보험 계약 금융기관-에 갚은 사실이 드러났다. 그럼으로써 정부가 애써 감추려고 했던 것이 사실은 도박판에 참여했던 다른 은행들-골드만삭스, 도이체방크, 모건스탠리, RBS, HSBC, 메릴 린치, BOA, 로이드 등-에게 진 도박 빚을 갚는 데 막대한 공적자금을 소비했다는 것임이 들어났다. 게다가 AIG는 “4억5000만 달러의 보너스를 간부에게 지급해야 한다”고 밝힘으로써 정부마저도 황당하게 만들고 말았다.
이것이 우리 사회에서 실제로 벌어지고 있는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본에 고용된 경제학자들은 계속 ‘수요공급의 법칙’ 이외에 다른 대안을 없다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자본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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